라오스 이야기 #026 - 안녕, 그리고 루앙남타.
라오스 이야기 - 안녕, 그리고 루앙남타.
2011년 5월 31일.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죽음의 트라이앵글.
루앙남타 게스트하우스 정원에 피어있던 독참파-
게스트하우스 옆에 있는 카오삐약집- 루앙프라방 카오삐약집 만큼이나 맛있는 집이었다.
루앙남타의 우체국-
캄보디아에서 사 온 카드에 편지를 쓰고 우표와 봉투는 라오스에서. 글로벌하다.
오전 중에는 어제 계획한 대로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뭔가 남미스러운 컬러감을 보여주는 우체국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라오사람들이 무슨 구경 난 듯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사진을 찍는 나를 구경한다.
그리고 나를 구경하는 그들을 구경한다. 이제는 낯선 일도 아니다.
집 근처에 있는 오토바이 렌트샵에 가서 오토바이를 한 대 빌리고,
지도를 펼치고 오늘의 일정을 정해본다.
앞에 있는 거대 오토바이는 어제 프렌치 쉬크 부부가 빌려서 무앙씽을 갔던...;;;
루앙남타를 기준으로 남하 보호구역을 지나면 카오라오 동굴에 들를 수 있어.
그리고 그 동굴을 지나면 Vieng Phou Ka라는 마을이 있는데 거기서 점심을 먹겠지?
그리고나서 왠지 이름이 마음에 드는 Na Lae라는 마을까지 가자.
거길 지나쳐서 루앙남타로 다시 돌아올 수 있어. 트라이앵글 처럼 되어 있는 길은
내가 지나온 길을 다시 돌아가지 않아도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올 수 있겠지.
지나 온 길을 다시 돌아가지 않으면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언제나 삶이 새롭길 바라는 내게 꽤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생각이었다.
루앙남타의 뜨거운 햇살아래서...
열한시 반쯤 집을 떠나 한시간쯤 달렸을까?
남하보호구역을 지나는 길에 파랑새 한 마리가 내 앞을 가로질러 날아간다.
파랑새?
어쩜 저렇게 열대의 파랑을 간직한 새가 있을까.
순간이었지만 너무나 선명한 파란빛을 가진 새를 보고 순간 환상을 본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한시간을 더 달리니 Kao Rao Cave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안녕? 카오라오 동굴이라고 해.
이런데 무슨 Cave람. 그래도 일단 너무 오래 앉아있어 엉덩이가 아파오기 시작했으니 내려보자.
동굴이라곤 찾아 볼 수도 없게 생긴 곳에 무언가 공사중이고, 인부들이 앉아 쉬고 있는 곳에서
“여기가 카오라오 동굴?”
이라고 물으니 맞단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큰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러준다.
몇분 후, 마치 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고산족 할아버지가 가방 가득 손전등을 들고 나타났다.
론리플래닛 라오스편, 카오라오 동굴이 안내되어 있는 페이지를 보면-
비엥푸카로 내려가는 길에 있는 카오라오 동굴은 혼자서는 갈 수가 없고,
“운이 좋아야” 만날 수 있는 종종걸음의 고산족 노인 길잡이가 없이는 그 곳의 문 조차도
열수가 없다. 이런 식으로 설명이 되어있다. 그리고 영어는 통하지 않는다는 친절한 덧붙임.
할아버지의 걸음걸이를 보자마자, 종종걸음의 고산족 길잡이임을 한 눈에 알아본다.
그리고 역시 영어는 통하지 않는다. 원,투,쓰리. 그리고 헬로우와 굿바이.
론리플래닛의 설명대로였다.
오픈 쎄서미중.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한창 공사가 진행중인 숲을 지나 때때로 비가 내리는 이 곳의 날씨를
대번에 느낄 수 있게 하는 축축한 바위길을 따라 올라가니 자물쇠로 굳게 닫힌 문 하나가 나타난다.
동굴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뿜어져 나오는 곳에서 이 곳의 깊이를 어설프게나마 가늠해본다.
라오스에서 내가 몇군데의 동굴을 갔었던가.
탐콩로 이후로 나는 이제 동굴의 끝을 보았으니 더 이상 보지 않겠어, 하며 방비엥의 탐푸캄을
올랐다가 실망만 안고 내려오고, 루앙프라방에선 심지어 동굴 근처에도 가지 않았건만.
또 동굴에 왜 와있는지는 알수가 없지만 왠지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게 된 것은...
아무래도 우연의 선물이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이지.
자물쇠가 잘 열리지 않는지 할아버지는 얕은 짜증을 뱉으며 문을 두들긴다.
그리고 마치 열려라 참깨, 라는 주문을 외우기라도 한 것처럼 끼익- 하고 열리는 무거운 나무 문.
동굴 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느껴진다. 내부에 들어서니 꽤 높은 천장에 들어오는 입구가
크지 않아 바깥세상과 다른 시간이 흐르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특이하게도 좁고 높은 입구.
들어오자마자 오른쪽에 놓여있는 제단에 촛불을 붙이시더니 기도하는 포즈를 하며 뭐라고 하시는데,
아무래도 동굴을 탐험하기에 앞서 이 곳의 수호신에게 인사를 하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시주하는 차원에서 천낍짜리도 하나씩 내야한다고.
작은 돈이 안보여 2천낍 짜리를 꺼내니 한사코 고개를 저으며 천낍이라고...자꾸 원낍 원낍 하신다.
아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든 더 받으려고 하는데...
결국 지갑 구석에 있는 천낍짜리를 하나 발견해서 제단에 올리고 나니 만족한 듯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동굴에 올 생각을 했으면서 헤드랜턴을 배낭 구석에 박아놓고 꺼내오지도 않았던지라,
할아버지가 빌려주는 조도가 어마어마하게 낮은 헤드랜턴을 하나씩 받아들고 뒤를 따라 나선다.
카오라오 동굴은 아직 개발이 되지 않은 곳이라 내부에 그 흔한 조명하나 없고,
잡고 디딜만한 손잡이 같은 것도 전혀 없는 말 그대로 태초의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천연동굴이다. 탐콩로가 규모면에서 압도했던 동굴이라면, 이 곳은 뭐라고 해야할까.
세월의 흔적을 사람의 손에 의해 재구성 하지 않은 곳이다.
미로같은 동굴의 내부를 지도하나 없이 종종걸음으로 안내하는 할아버지가 없으면 아마 이 곳에
들어간다고 해도 절대 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동굴은 “경이로움”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의미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더 이상 어떤 말이 필요할까. 동굴따위 다 똑같지, 라는 나의 씨니컬하고 시큰둥한 태도가
오늘만큼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번복해도 괜찮게 느껴질 정도였다.
끝없이 감탄사가 나오는 카오라오. 한시간이 조금 넘게 그 곳을 둘러보았을까?
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 돌아가며 올라오면서는 보지 못했던 풍경들을 다시 한번 발견한다.
제단이 있던 동굴 초입으로 돌아오자 전기공사를 시작하는 듯한 흔적들이 눈에 들어온다.
할아버지는 그것들을 가리키며 라오어로 무언가 끝없이 설명을 해준다.
이제 이 곳에 전기가 들어오게 될거야. 이 곳도 관광지로 개발이 되는거지.
봤지? 밖에서 한창 공사하는거. 그게 여기 전기를 집어넣고 동굴 문 밖에는 발전기가 돌아갈거야.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겠지? 밖에 매표소도 짓고 있어.
그럼 여기도 조금 더 보기 편해질거고, 내가 빌려준 손전등도 필요 없이 이 안을 구경할 수 있게
될거야. 좋지 않겠니?
좋지 않겠니?
써바이? 써바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알아듣게 되는 상황이라는 게 있다.
특별한 만남에는 특별한 공기가 흐른다. 그 것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국적과 언어마저 초월한다.
할아버지의 손짓, 말투, 눈빛을 보며 대화를 읽어간다.
이 곳이 개발되면, 이 곳을 찾기 쉬워지면, 이 안을 다니기 쉬워지면, 좋지 않겠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내가 라오어를 하지 못한다는 것과 할아버지가 영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핑계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웃기만 했다.
좋을까요?
내가 우연의 선물처럼 할아버지를 만나 이 동굴에 들어와 느꼈던 경이로움을,
그렇게 쉽게 찾아온다면 다른 사람들도 내가 느낀 감동을 느낄 수 있을까요?
동굴바닥에서 미끄러져 넘어질까봐 나보다도 한참 작은 할아버지가 내밀어 주는 손에 의지해
이 곳을 돌아봤던 그 감동을 누가 느낄 수 있을까요?
할아버지에게 아쉬운 인사를 건네며 그 곳을 떠난다.
몇 년 후에 다시 돌아온다면, 아무래도 내가 느꼈던 이 곳은 더 이상 없을 거라는 쓸쓸한 감상을
마음 한켠에 담아두고. 늦지 않아 다행이라는 안도와 함께.
동굴주변은 숲으로 둘러싸여있다.
나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