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y의 인도네시아 여행기 34 아유타야에 대한 짧은 내 생각
나는 50대 중반으로 중학교 1학년인 막내와 둘이 인도네시아를 다녀왔습니다. 일정은 2005년 1월 5일 출발하여 자카르타 - 족자카르타 - 발리 - 방콕 - 인천으로 1월 25일 귀국했습니다.
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2005. 01. 22(토)
아유타야를 돌아보고 짧은 내 생각
정보에는 흔히 아유타야 파괴의 주범으로 버마군의 침입을 들고 있다. 특히 ‘왓 프라마하탓’에선' 같이 불교를 신봉하는 종족으로 이렇게 무참하게 불상을 파괴하다니…’하며 분개하는 사람도 있다. - 사실 경주박물관 뒤뜰을 가보면, 우리도 전시된 불상만으로도 아유타야의 숫자를 넘을 만큼 많은 수의 파괴된 불상을 가지고 있다. - 그러나 직접 답사해보니 꼭 버마의 만행(蠻行)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처음 ‘왓 프라시산펫’ 앞의 넓은 공터를 다니다가 무엇인가 발굴 복원하고 있는 현장을 봤다. 지하로 약 2m 정도 파고 내려간 현장에 건물의 기초부분을 발굴 복원하고 있었다. 2m 정도의 절단한 토양면에 적어도 3개 층(層)정도의 범람(氾濫)의 흔적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이 기초가 쌓인 후로 적어도 3번 정도의 큰 홍수가 삼각주인 아유타야를 휩쓸었다는 가정(假定)을 할 수 있다. 아유타야에는 ‘계획된 것’이 분명한 반듯한 수로가 여러 개 있다. 지금은 ‘운하(運河)’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초기에는 운하보다는 배수로(排水路)의 기능이 더 강하지 않았을까 한다.
‘왓 로카야수타’ 근처에는 건물의 바닥면 기초가 드러나 있는 곳이 있다. 벽돌을 쌓아 만든 기초(基礎)가 파도치듯 굽이져 있다. 그 위에 다시 벽돌을 쌓아 바닥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처음의 건물 바닥이 홍수로 인해 침강(沈降)하여 굴곡이 생기자, 훗날 수리(修理)를 한 흔적이다.
워라체타람 사원의 바닥, 홍수에 의해 침하된 것을 수리하여 다시 사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왓 프라마하탓’에 있는 수많은 쩨디들은 크건 작건 간에 다 조금씩, 또는 많이 기울어져 있다. 보기에도 위태한 모습으로 서있다. 이것들은 모두 지반(地盤)의 침몰이 원인인 것 같다. 아마도 수많은 ‘쩨디’들이 ‘앙코르 왓’이나 ‘보르부두르’와 같이 석재(石材)로 만들어 진 것이었다면 지금의 이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이다. 아유타야의 쩨디들은 전탑(塼塔) - 불에 구운 벽돌 - 이기 때문에 이만큼의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왓 프라마하탓'의 기울어진 크메르양식의 쩨디. 보기만 하여도 위태하다.
복원중인 '왓 프라마하탓의 쩨디', 파괴된 모양으로 보아 물에 의한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이 홍수이든지 또는 빗물이든지간에
아유타야인들은 불에 구운 벽돌로 왕궁을 짓고, 사원을 짓고, 건물의 기초도 모두 벽돌로 했다. 남아있는 벽의 두께는 거의 40 ~ 50cm 정도다. 이정도 두께를 가지고 있어야만 현대식으로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도 높은 건물을 짓고, 뜨거운 열기를 막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내부는 목재를 사용하여 공기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였을 것이다. 또한 아유타야인들은 벽돌을 구울 때 우리와 같은 가마를 사용하지 않고, 노천(露天)에서 굽는 방법을 사용한 것 같다. 꼭 화재(火災)와 접하지 않았을 것 같은 부분의 벽돌에서도 불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또 벽돌의 경도(硬度)가 낮고, 벽돌 속에 벼의 껍질 - 우리식으로 말하면 왕겨 - 이 섞여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소성 온도도 높지 않았던 것 같다.
아유타야 왕국의 귀족들은 이렇게 벽돌로 튼튼하게 지은 건물에, 흰색 회칠(灰漆)을 하여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며 화려한 생활을 누린 것 같다. ‘왓 프라마하탓’의 유적 중에 회칠을 한 다음 아름다운 무늬를 양각(陽刻)한 흔적이 몇 군데서 발견되었다. 특히 이런 모습은 기둥의 윗 쪽 부분에 더 많이 남아있는데, 이것은 홍수가 아래쪽 부분을 휩쓸었다는 것을 반증(反證)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왓 프라마하탓에 남아있는 아유타야왕국의 흔적들, 벽돌을 쌓아 건물을 짓고 흰색 회를 발라 마무리했다. 아름다운 문양으로 장식을 한 호화스러운 건물이었던 듯하다. 남아있는 부분들로 보아 역시 홍수에 의한 파괴가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왜 아유타야 사람들은 홍수에 시달리면서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물어볼 아유타야인은 남아있지 않으니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아마도 ‘해충(害蟲)들로 부터의 보호’ 때문이 아닌가 한다. 태국은 열대국가로 우리가 상상할 수없는 온갖 해충이 인간을 위협하다. 일반인은 처음부터 기둥위에 집을 짓고, 아래에는 돼지를 기르므로 해충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왕족(王族)은 어떻게 할까? 왕족들도 돼지우리 위에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물로 집을 둘러싸 뱀, 전갈, 독거미 등의 해충으로 부터 보호받는 방법이 있다. 아유타야는 짜오프라야강의 상류 돕부리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천연의 요새’인 것이다. 외부와의 입구만 잘 관리하면 잠자리에서 뱀을 만나거나, 옷 입다가 전갈을 만날 일이 없는 것이다. 이 이익이 홍수로부터 당하는 손해보다 컸던 것이다. 또한 아유타야를 위협할 만한 홍수는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 태국은 태풍(颱風)의 영향이 없는 나라다. - 100 ~ 200년 만에 한번 정도일 것이다. 이 정도의 시간은 사람을 망각(忘却)으로 몰기에 충분하다.
왓 프라마하탓
방콕으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시간이 덜 걸렸다. ‘방파인 별궁’을 신청하지 않은 사람들만 모아 3시 45분 카오산에 내려 주었다. 샤워하고 짜이디에가 맛사지 받고 ‘아시아 호텔’에 가서 ‘알카쟈 쇼’를 보았다.
작은 규모의 소극장에서 공연하여 ‘캬바레쇼’라고도 한다. 성전환여자?들이 쇼를 펼쳐간다. 등장인물은 모두 여자로 성전환한 남성(男性)?이다
다음은 태국을 떠나 고국으로
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2005. 01. 22(토)
아유타야를 돌아보고 짧은 내 생각
정보에는 흔히 아유타야 파괴의 주범으로 버마군의 침입을 들고 있다. 특히 ‘왓 프라마하탓’에선' 같이 불교를 신봉하는 종족으로 이렇게 무참하게 불상을 파괴하다니…’하며 분개하는 사람도 있다. - 사실 경주박물관 뒤뜰을 가보면, 우리도 전시된 불상만으로도 아유타야의 숫자를 넘을 만큼 많은 수의 파괴된 불상을 가지고 있다. - 그러나 직접 답사해보니 꼭 버마의 만행(蠻行)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처음 ‘왓 프라시산펫’ 앞의 넓은 공터를 다니다가 무엇인가 발굴 복원하고 있는 현장을 봤다. 지하로 약 2m 정도 파고 내려간 현장에 건물의 기초부분을 발굴 복원하고 있었다. 2m 정도의 절단한 토양면에 적어도 3개 층(層)정도의 범람(氾濫)의 흔적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이 기초가 쌓인 후로 적어도 3번 정도의 큰 홍수가 삼각주인 아유타야를 휩쓸었다는 가정(假定)을 할 수 있다. 아유타야에는 ‘계획된 것’이 분명한 반듯한 수로가 여러 개 있다. 지금은 ‘운하(運河)’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초기에는 운하보다는 배수로(排水路)의 기능이 더 강하지 않았을까 한다.
‘왓 로카야수타’ 근처에는 건물의 바닥면 기초가 드러나 있는 곳이 있다. 벽돌을 쌓아 만든 기초(基礎)가 파도치듯 굽이져 있다. 그 위에 다시 벽돌을 쌓아 바닥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처음의 건물 바닥이 홍수로 인해 침강(沈降)하여 굴곡이 생기자, 훗날 수리(修理)를 한 흔적이다.
워라체타람 사원의 바닥, 홍수에 의해 침하된 것을 수리하여 다시 사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왓 프라마하탓’에 있는 수많은 쩨디들은 크건 작건 간에 다 조금씩, 또는 많이 기울어져 있다. 보기에도 위태한 모습으로 서있다. 이것들은 모두 지반(地盤)의 침몰이 원인인 것 같다. 아마도 수많은 ‘쩨디’들이 ‘앙코르 왓’이나 ‘보르부두르’와 같이 석재(石材)로 만들어 진 것이었다면 지금의 이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이다. 아유타야의 쩨디들은 전탑(塼塔) - 불에 구운 벽돌 - 이기 때문에 이만큼의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왓 프라마하탓'의 기울어진 크메르양식의 쩨디. 보기만 하여도 위태하다.
복원중인 '왓 프라마하탓의 쩨디', 파괴된 모양으로 보아 물에 의한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이 홍수이든지 또는 빗물이든지간에
아유타야인들은 불에 구운 벽돌로 왕궁을 짓고, 사원을 짓고, 건물의 기초도 모두 벽돌로 했다. 남아있는 벽의 두께는 거의 40 ~ 50cm 정도다. 이정도 두께를 가지고 있어야만 현대식으로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도 높은 건물을 짓고, 뜨거운 열기를 막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내부는 목재를 사용하여 공기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였을 것이다. 또한 아유타야인들은 벽돌을 구울 때 우리와 같은 가마를 사용하지 않고, 노천(露天)에서 굽는 방법을 사용한 것 같다. 꼭 화재(火災)와 접하지 않았을 것 같은 부분의 벽돌에서도 불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또 벽돌의 경도(硬度)가 낮고, 벽돌 속에 벼의 껍질 - 우리식으로 말하면 왕겨 - 이 섞여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소성 온도도 높지 않았던 것 같다.
아유타야 왕국의 귀족들은 이렇게 벽돌로 튼튼하게 지은 건물에, 흰색 회칠(灰漆)을 하여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며 화려한 생활을 누린 것 같다. ‘왓 프라마하탓’의 유적 중에 회칠을 한 다음 아름다운 무늬를 양각(陽刻)한 흔적이 몇 군데서 발견되었다. 특히 이런 모습은 기둥의 윗 쪽 부분에 더 많이 남아있는데, 이것은 홍수가 아래쪽 부분을 휩쓸었다는 것을 반증(反證)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왓 프라마하탓에 남아있는 아유타야왕국의 흔적들, 벽돌을 쌓아 건물을 짓고 흰색 회를 발라 마무리했다. 아름다운 문양으로 장식을 한 호화스러운 건물이었던 듯하다. 남아있는 부분들로 보아 역시 홍수에 의한 파괴가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왜 아유타야 사람들은 홍수에 시달리면서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물어볼 아유타야인은 남아있지 않으니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아마도 ‘해충(害蟲)들로 부터의 보호’ 때문이 아닌가 한다. 태국은 열대국가로 우리가 상상할 수없는 온갖 해충이 인간을 위협하다. 일반인은 처음부터 기둥위에 집을 짓고, 아래에는 돼지를 기르므로 해충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왕족(王族)은 어떻게 할까? 왕족들도 돼지우리 위에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물로 집을 둘러싸 뱀, 전갈, 독거미 등의 해충으로 부터 보호받는 방법이 있다. 아유타야는 짜오프라야강의 상류 돕부리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천연의 요새’인 것이다. 외부와의 입구만 잘 관리하면 잠자리에서 뱀을 만나거나, 옷 입다가 전갈을 만날 일이 없는 것이다. 이 이익이 홍수로부터 당하는 손해보다 컸던 것이다. 또한 아유타야를 위협할 만한 홍수는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 태국은 태풍(颱風)의 영향이 없는 나라다. - 100 ~ 200년 만에 한번 정도일 것이다. 이 정도의 시간은 사람을 망각(忘却)으로 몰기에 충분하다.
왓 프라마하탓
방콕으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시간이 덜 걸렸다. ‘방파인 별궁’을 신청하지 않은 사람들만 모아 3시 45분 카오산에 내려 주었다. 샤워하고 짜이디에가 맛사지 받고 ‘아시아 호텔’에 가서 ‘알카쟈 쇼’를 보았다.
작은 규모의 소극장에서 공연하여 ‘캬바레쇼’라고도 한다. 성전환여자?들이 쇼를 펼쳐간다. 등장인물은 모두 여자로 성전환한 남성(男性)?이다
다음은 태국을 떠나 고국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