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y의 인도네시아 여행기 33 아유타야 왓 프라마하탓
나는 50대 중반으로 중학교 1학년인 막내와 둘이 인도네시아를 다녀왔습니다. 일정은 2005년 1월 5일 출발하여 자카르타 - 족자카르타 - 발리 - 방콕 - 인천으로 1월 25일 귀국했습니다.
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2005. 01. 22(토)
아유타야 '비한 프라몽콘보핏'과 '왓 프라마하탓'
‘비한 프라몽콘보핏’은 주차장 가까이에 있는 사원이다. 깨끗한 붉은색 지붕이 산뜻한 거대한 건물이다. 사원 안에는 건물에 어울리게 거대한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항마촉지의 수인(手印)을 한 전형적인 석가모니불이다. 금색이 찬란하여 요즈음 조성된 불상인가 하여 처음에는 큰 흥미를 갖지 않았다. 그러나 안에 있는 사진을 보니 폐허 속에 검은색의 불상이 있다. 초기에는 청동불(靑銅佛)로 주조되었는데, 역시 버마군의 침략 때 불에 타고 버려진 채로 있었다고 한다. 그 뒤로 1950년대에 들어와 사찰을 복원하고 청동에 금Gold을 입혀 현재와 같은 금동불(金銅佛)로 만들었다고 한다. 사원 내부에는 복원시 발견된 돌로 만들거나 또는 청동조으로 만든 불상들이 전시되어있다. 완전한 모양도 있고, 불두(佛頭)만 남아있는 것도 있으나, 모두 수많은 신앙(信仰)의 흔적으로 덮혀있다. - 태국에서는 기도를 드릴 때 얇은 금종이를 불상에 문질러 부친다. - 지금도 많은 태국 사람들이 각자각자의 소원을 열심히 빌고 있다.
산뜻한 붉은 색의 거대한 ‘비한 프라몽콘보핏’은 아유타야를 재건하고 싶은 태국인의 마음이 들었있는 사찰이라고 하겠다.
미니버스가 다음 목적지에 섰을 때 우린 ‘뭐 이런 것까지’하고 실망했다. 태국 스타일의 높은 ‘쩨디’임에든 틀림없는데 요즈음 시멘트로 만들어 세운 것 같았다. 거기에 흰 페인트칠 까지 해 놓은 아주 ‘유치한’ 쩨디였다. 그 앞에 가건물과 같은 사찰건물이 있는데 가이드가 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기둥이 들어난 가건물 안에는 태국스타일의 부처님이 앞뒤로 네구가 있다. 시선(視線)은 아래로 하고, 입귀가 살짝 들어 올려진 특이한 표정에 가이드는 ‘스마일 부처’라고 했다. 앞에는 플라스틱 바케츠에 ‘슈퍼마켓’에서 파는 상품들이 제물로
차려져 있다. 너무 생소하고 주변과 어울리지 않아 ‘혹시 요즘 만든 플라스틱제 불상’이 아닌가하고 만져보고 싶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뒤쪽으로 다시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가운데 큰 불상은 석가모니불인데 그 앞으로 조금 작은 3구의 불상이 또 모셔져 있다. 우리나라에선 중앙에 본존 불상과 좌우에 ‘협시보살’을 두는 일자(一字)형 배열인데, 태국에서는 협시보살을 앞과 옆에 두는 이자(二字)형 배열을 하는가 보다. 또 이 가건물은 원래는 두개의 법당이 있어야 하는 것을 하나의 건물 안에 넣은 것 같았다. 주변으로 이 사찰의 과거를 보여주는 사진과 설명이 걸려있는데 이번만큼은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해 자세히 보지 않았다.
이제 앞에 있는 커다란 ‘쩨디’를 말할 순서다. 우선 그 이름을 ‘왓아룬’이라고 했다. 내가 무언가 잘못 들었는가? 왓아룬은 방콕의 짜오프라야 강가에 있는 ‘새벽사원’의 이름이 아닌가? 그러나 생각해 보니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방콕의 ‘왓아룬’도 태국 스타일의 쩨디라면 두개의 탑은 ‘대동소이(大同小異)’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어쨌든 이 탑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쩨디며, 그대로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될 것 같아, 최근 수리를 하고 도색(塗色)을 하였다고 한다. 한 장의 옛 사진을 보여주는데 거기에는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이 ‘왓아룬’의 모습이 있었다. 처음 우리가 이 탑을 대했을 때 실망스러웠던 것은 현대식 복원의 탓인것 같다.
급경사의 계단으로 ‘쩨디’에 오르면 바로 옆에 강이 흐르고 멀리까지 넓은 평야가 펼쳐져있다. 아마 관광객이 ‘아유타야’에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 여기가 아닌가 한다. 이 쩨디에 올라가면 쩨디의 중심부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이 있다. 문 앞에는 책상과 의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자리를 지키는 것 같은데 우리가 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문을 들어가면 한 10m 조금 못되는 좁은 통로가 있고, 통로의 끝에는 두 평정도 되는 공간이 있다. 그 속에 작은 불상이 모셔져 있다. 물론 아무런 조명장치가 없다. 랜턴을 가져오지 않아 라이터 불에 의지해 확인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이 토굴과 같은 장소와 암흑 속에 있는 불상은 무엇일까? - 이 ‘왓아룬’의 정체가 무엇일까 몹시 궁금했다.
'왓 아룬'이라고 소개받은 '수리요타이 쩨디' 이방인의 눈에는 볼품없어 보여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중요한 유물이라고 한다.
'수리요타이 쩨디' 상층부 동굴 속에 남모르게 모셔져 있는 불상. 어둠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었던지 소원지가 단정하지 못하지만 무척 많이 붇어있다. 벽에는 불에 그을른 자국이 많은 것을 보아 조명장치는 처음부터 없고 촛불을 켰던 것 같다.
서울에 돌아와 ‘아유타야 사진첩’을 놓고 내가 찍어온 사진과 비교해 보니 ‘수리요타이 쩨디’임이 틀림없었다. 아유타야의 지도를 봐도 이 쩨디의 위치와 내가 본 경치가 대강 맞았다. 사진 설명에 ‘수리요타이’는 ‘차크라팟’왕의 왕비로서 1548년 버마군이 아유타야를 침공했을 때 남편과 함께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다. ‘차크라팟’왕은 왕비를 기려 이 쩨디를 세우고 왕비의 유골을 안치했다고 한다. 가이드가 쩨디 부속사원을 자세히 설명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수리요타이 쩨디’로 들어오는 큰 길 중앙에 근래에 새로 만든 ‘기마인상(騎馬人像)은 혹시 ’차크라팟‘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확인해 볼 길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수리요타이 쩨디’에서 내려오다 아까 본 가건물 옆에 ‘두개의 지붕’을 가진 한 개의 건물이 있음을 봤다. 그 건물의 박공부분에 태국 전형의 모자이크화가 있었다. 이 모자이크화의 원본이 어디에 있는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얼만큼 태국의 현대적인 모습이 들어갔는지 짐작도 할 수 없지만, 전체적인 디자인에 있어서는 우리나라 ‘김해(金海)’에서 발견한 디자인과 무언가 통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되었다.
아유타야는 14세기 중엽에 건설된 태국 불교왕국의 도읍지다. 그러나 ‘아유타야’라는 이름은 이미 대 서사시 ‘라마야냐’에서 나타난다. ‘악신(惡神) ‘라바나’를 물리치고 아내 ‘시타’를 찾은 ‘라마’는 ‘아윳티아’로 가서 왕국을 꾸미고 산다‘는 것이 ’라마야냐‘의 줄거리다. 물론 이 신화에서의 ‘아윳티아’는 ‘인도’ 갠지스강 상류에 있는 도시다. 그리고 1세기에 인도에서 멀리 떨어진 우리나라 남해안, 지금의 김해(金海)지역에 ‘가락국(駕洛國)’을 세운 ‘김수로왕(金首露王)’은 ‘나는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다.’라고 주장하는 여인과 결혼하게 된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아유타국’이란 나라 이름을 틀림없이 적고 있다. 신화(神話)의 신빙성의 논의는 학자들에게 두고, 기록을 기록으로 믿는다면 ‘가락국(駕洛國)’의 후손들은 ‘아윳티아’의 왕족 ‘라마’와 ‘시타’의 후손들이 되는 셈이다.
사학자 ‘김병모’박사는 한양대학교 박물관장으로 재직할 당시, 인도와 태국을 답사하고 ‘태국의 아유타야는 인도에 아윳티아를 건설한 종족이, 타 종족에게 밀려 이주(移住)하여 세운 왕국이다. 또한 수로왕비(首露王妃) 허황옥도 시기적으로 인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태국의 아유타야에서 출발한 왕녀(王女)다.’라고 발표한 적이 있다. 역시 이 설(說)의 진위도 학자들에게 맡긴다. 그렇다면 태국의 아유타야 역시 ‘라마야냐’의 영향을 받는 신성한 왕국이며 김해의 가락국(駕洛國)과도 어떠한 연결고리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나라 가락국(駕洛國)의 흔적도 너무 많이 파괴되어 남아있는 것이 드물고, 지금 보는 태국의 아유타야 역시 스처가는 나그네의 눈으로는 폐허의 잔해만 있을 뿐인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두 그림의 공통점을 찾으려 노력해 본다.
'수리요타이 쩨디' 부속사원의 문양
김해 김수로왕능 유주각의 문양 .
아유타야 수리요타이에서 찾은 모자이크화와 김해 김수로왕의 유주각에서 찾은 그림, 둘 사이에 어떤 연관성은 없는 것일까?
태국은 ‘불교’를 국교(國敎)로 하고 있는 나라다. 현 태국의 왕가(王家)는 ‘아유타야’ 왕가(王家)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러는 가운데 힌두교의 신화인 ‘라마야냐’가 불교 속으로 녹아들어 가장 신성한 종족 ‘라마’의 후손이 ‘아유타야’왕가(王家)이고 - 김병모 박사의 주장이 드러난다. 갠지스강 상류의 ‘아윳티아’왕가는 태국의 ‘짜오프라야’강 상류 옛 ‘롭부리’강가에 ‘아유타야’를 세웠다. - 이 ‘아유타야’왕가(王家)는 지금까지 이어져 신성한 혈통 현(現) ‘푸미폰’국왕(國王)께서는 ‘라마9세’로 불리워지고 있다.
‘왓 프라마하탓’은 아유타야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표시되는 ‘파괴된 불상’의 사원이다. 엉켜진 나무뿌리 사이에 남아있는 불두(佛頭), 아유타야의 슬픔을 이야기할 때 꼭 나오는 사진이다. 이 외에도 줄지어 서있는 목이 잘린 불상군, 이 대목에선 꼭 버마군의 만행을 들먹거린다. 가이드도 버마의 새로운 국호 ‘미얀마’를 사용하지 않고, 꼭 ‘버마’라고 말하는 것은 버마에 대한 은근한 경쟁과 경시(輕視)의 표현이라고 한다.
‘왓 프라마하탓’은 ‘크메르양식’의 탑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 외 실론형의 탑과 버마양식의 탑 등이 줄지어 있다. 어디까지가 ‘왓 프라마하탓’의 경계인지 알 수 없어 그 크기를 알 수 없으나, 주변을 모두 하나로 본다면 아마 아유타야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사원이었을 것 같다. 셀 수 없이 많은 쩨디들, 14세기에 건설되었다고 하니 600년이 넘은 건물들이건만 아직도 이만큼 흔적을 보일 수 있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윗부분이 파손되어 처음의 높이가 얼마인지 짐작할 수 없지만, 지금 남은 것만으로도 찬사를 받기에 충분한 오벨리스크 obelisk는 당시 건축기술이 상당히 높았음을 상징해주고 있다.
건축기술의 자랑 오벨리스크, 당시에 이렇게 높은 것을 쌓을 수 있었음을 지금 까지도 자랑하고 있다
아유타야 투어버스는 이 정도에서 방콕으로 돌아간다. 희망사항으로는 강 건너에 있는 ‘왓 야이차이몽클’까지 볼 수 있다면 만족 할 수 있었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아쉬움을 남겨야 다음날을 기약할 수 있으니까.
다음은 아유타야에 대한 나의 짧은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