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y의 인도네시아 여행기 24 보로모에서 발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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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ky의 인도네시아 여행기 24 보로모에서 발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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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50대 중반으로 중학교 1학년인 막내와 둘이 인도네시아를 다녀왔습니다. 일정은 2005년 1월 5일 출발하여 자카르타 - 족자카르타 - 발리 - 방콕 - 인천으로 1월 25일 귀국했습니다.

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보로모에서 발리까지 버스로 10시간


‘요시히 호텔Yoschi Hotel’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픽업버스를 기다렸다. 픽업 시간은 9시, 그러나 9시가 되도 픽업버스는 오지 않았다. 호텔 지배인이 오더니 로컬 버스를 타고 가도록 주선을 했다. - 우리를 받은 여행사가 약속을 어긴 것인지, 호텔이 약속을 어긴 것인지, 아니면 족자에서부터 이렇게 계획이 되어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우리나라 마을버스 정도 되는 봉고차보다 조금 큰 버스인데, 짐은 모두 지붕으로 올리고 빈 몸으로 탔다. 버스는 앞좌석 빼고 뒷좌석만 4열이다. 3열 시트에 하나를 더 추가한 것이다. 다리를 곧추세워 겨우 꾸겨 넣어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불편했다. 뒷좌석 첫 번째 열은 그래도 원래대로 조금 넓었는데 언제 탔는지 서양애 커플이 차지하고 앉아있다. 얄미운 녀석들 아침에 지프 탈 때도 언제 올라왔는지 제일 좋은 앞자리 차지하고 앉았더니, 버스에서도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다니. 이기적인 서양 애들의 원단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는 맨 뒤 구석으로가 자리를 잡았다. - 차장이 거기가 좋다고 손짓으로 더 들어가라고 했다. -



버스는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보로모 산의 급경사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버스가 주요한 교통수단인지, 마을을 떠나기도 전에 벌써 가득 찼다. 앞자리 3명, 뒷자리 4명씩 4열, 벌써 19명이다. 그런데 저 앞에 웬 할머니 버스를 보고 손을 든다. 버스는 당연한 듯이 선다. 또 아저씨 손을 든다. 또 아가씨 손을 든다. 운전석 앞자리는 어린애까지 해서 4명이 탔다. 서양 애 앉은 발 앞으로 사람들이 밀고 들어온다. 버스 안으로 못 들어온 사람은 문에 매달린다. 세어보니 32명이 타고 있다.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버스는 외륜산의 내리막길을 급회전, 급브레이크, 이러면서 달리고 있다. 매달려 온 사람들도 모두 당연하게 내려서는 차비를 낸다. 그래도 우리가 앉은 맨 뒷자리는 더 이상 밀릴 곳이 없는 데라 불평을 말할 처지가 못 되었다. 이렇게 1시간 하고 30분을 내려와 한 버스터미널에 사람들을 모두 내려놓고 우리만 태우고 조금 더 가서 여행사 앞에 세워주었다.



어제 족자카르타에서 같이 미니버스를 타고 온 사람은 8명, 독일인 두 명은 보로모에 남고, 6명은 같이 행동하여 여기까지 왔다. 서로 특별하게 주고받은 것은 없어도, 관광하면서 오고간 눈빛에 정이 들었다. 여기서 인도네시아 아줌마 2명은 족자카르타로 돌아가고, 서양 애와 우리는 발리로 가게 되었다. 여행사 안내서에 발리까지 10시간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에어컨 빅버스’ 이렇게 쓰여 있는 것이다.



여행사 사무실에 있는데 ‘발리~ 발리~’ 하면서 찾는다. 배낭을 메고 나가니 정말 대형 버스가 떡 버티고 서있는 것이 아닌가! 발리까지 가는 우리 네 명의 짐을 따로 짐칸에 싣고 버스에 올라가 보니 벌써 사람들이 꽉- 차 있다. 겨우 한자리를 얻어 종민이를 앉히니까, 그 옆에 앉았던 사람이 일어나며 자기는 딴 자리로 갈 테니까 나보고 앉으라고 한다. 그래서 다행스럽게 나란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버스는 바로 출발하였다. 10시 50분경이었다.



버스는 수라바야(Surabaya)에서 발리의 덴파사르로 가는 로컬버스였다. 버스 안에는 허름한 차림의 인도네시아 사람들로 가득 찼다. 거의 다 남자이며 간혹 애인이나 아내 같은 여자를 동행한 사람도 있고, 가족인 것 같은 사람도 몇 있다. 만약 우리가 여자였다면 ‘이 버스 안타겠다.’며 내릴지도 모를 정도로 낯설었다. 세수도 하지 않은 것 같은 피부색에, 수염은 다듬지도 않고 제멋대로고, 바짝 마른 몸에, 옷은 남루하다 할 정도, 머나먼 이국땅 낮선 버스에서 만난 사람들 치고는 친근감이 가는 얼굴이라고 할 수 없었다. 여태까지 얄밉다고 생각했던 서양애가 어디 있나 찾아보았고, 서양애도 우리를 찾다가 눈이 마주치자 서로 안도의 눈길을 보냈을 정도다.



빅 버스는 커서 그런지 미니버스만큼 속도를 내지도 않고 조용히 달렸다.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도 없었고, 가끔 화장실 가는 사람 외에는 움직이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차장이 ‘조금 있다가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차비에는 점심 값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며 점심값 10,000Rp을 받아갔다. - 우리와 서양애만 - 인도네시아에는 ‘휴게실’ 또는 ‘휴식’이란 개념이 없는 것 같았다. 버스는 아무데도 서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달린다. 팔다리가 저리던, 쑤시던 아무런 상관이 없이 달리다가 식당 앞에 멈추었다. 운전사는 일일이 식권을 한 장씩 나눠주고 식당으로 들어가 식사를 하라고 한다.




정보에서 본대로 ‘이것이 부페식 식당이란 곳이로구나.’하며 들어갔는데 정말 정보와는 달랐다. 커다란 밥통에 밥 잔뜩, 그리고 된장국 비슷한 것, 닭다리, 오이등 야채, 그 외 이상한 반찬 2가지, 인도네시아에서 잘 먹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10,000Rp의 값어치 치고는 형편없지 않나 싶었다. 거기에다가 접시를 들고 기다리는 줄에, 줄이란 것은 없었다. 밀고 들어가 밥을 먼저 푸는 사람이 선수인가보다, 모두 새치기를 한다. 거기에다 인도네시아 사람들 식사량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접시에 수북하도록 밥을 퍼 담아 가니 밥 한통이 금방 없어진다.




점심을 먹고 잠시 쉬는데 무척 덥다. 이 식당은 화장실 4개에 ‘만디룸’이 4개다. 여태까지 ‘만디룸’하면 화장실도 포함하고 있었는데, 이 식당의 ‘만디룸’은 정말 물통에 물바가지 한개 동동 떠 있다. 장거리 버스에 지친 인도네시아 사람들 중 몇몇은 얼른 물을 몇 바가지 껴얻고 나온다.



그리고는 다시 출발, 아까같이 조용히 버스는 달려간다. 점심을 먹은 사람들은 식곤증에 깊은 잠에 빠져든다. 나도 깨다 자다를 반복하다 눈을 떠 보니 도시를 달리던 버스가 커다란 터미널로 들어간다. 아마 바뉴왕이(Banyuwangi)의 끄다빵(Ketapang)이란 페리부두인것 같았다. 이제 쟈바섬의 끝에 온 모양이다. 시간을 보니 5시를 막 넘기고 있다. 그렇다면 예상시간보다 빨리 도착한 것 같았다. 잠시 버스 밖으로 나가 팔다리를 움직여도 보고 하는데, 운전수가 버스를 타라고 한다. 버스는 천천히 움직여 잔교(棧橋)를 건너 커다란 카페리로 들어간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다시 버스를 타기고 하고, 또는 걷기도 하여 페리를 탄다. 일단 버스가 페리에 올라선 다음 페리의 여객실로 가 보았다. 정말 간단한 의자가 소박하게 줄지어 있고, TV한대와 매점이 있다.



3층에 올라가니 반 갑판인데 벌써 20여명이 올라와 시원한 바닷바람을 쏘이고 있다. 10살 전후의 까만 녀석들이 눈을 반짝거리면서 뭐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수 없다. ‘무언가 사라는 것인가 보다.’하고 있는데 이 녀석 뱃전에 위태롭게 서더니 아래로 뛰어 내린다. 그러더니 계속해서 또 한 놈, 또 한 놈, 어디선가 동전을 한개 던져 준다. 인도네시아 동전 중 200Rp 와 500Rp는 알루미늄으로 만든 것이 있어 물에 빨리 가라앉지 않는다. 그걸 목표로 죽어라 하고 헤엄을 쳐 물속으로 들어가더니 건져온다. 입에다 집어넣더니 또 달라고 손짓한다. 몇몇이 동전을 던져주니 서너 놈이 경쟁하며 건저 올린다. 종민이가 1000Rp 종이돈을 던져주니 역시 빠른 놈이 잘 살기 마련인가보다. 이렇게 잠시 아이들의 재롱을 보니 페리가 출발을 한다. 아이들은 물속에서 마지막 인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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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서 뛰어내리는 묘기?를 보인뒤 팁을 달라고 하는 소년들



쟈바와 발리는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다. 페리는 미동(微動)도 하지 않는 듯, 천천히 해협을 건넌다. 이렇게 천천히 가도 해협을 건너는 시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 발리 섬 ‘길리마눅 Gilimanuk’에 접안하는데 자리가 없어 잠시 기다리다가 내리는데 까지 약 30분 정도 걸린다.



페리에서 내리기 위해 버스를 타니, 우리가 앉은 자리 옆에 사람들이 웅기중기모여 있다. 흰 남방을 깨끗하게 입은 사람이 같이 버스를 타고 온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모아놓고 뭔가 지시를 하고 있었다. 버스는 발리 섬에 내려 바로 목적지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검문을 받는 것 같았다. 한 곳으로 가더니 모두 버스에서 내린다. 우리는 멈칫하고 있는데 운전수가 그대로 앉아있으라고 한다. 버스에는 우리와 서양 애, 그리고 인도인인 듯 한 가족만 남아있고,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뭔가 신분증명서 같은 것을 들고 사무실 같은 곳으로 들어간다. 버스는 그들이 나오는 문으로 가서 대기한다. 잠시 후 검문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이 버스에 타자 화장실에서 5-6명의 사람이 튀어 나왔다. 생각에 같은 인도네시아에서도 ‘쟈바’사람들이 ‘발리’로 가는 데는 적법한 이유 - 노동허가 또는 취업계약서 - 가 있어야 하는가 보다. 당당하게 검문을 받은 사람들은 적법한 사람들이고, 화장실에 숨었던 사람들은 소위 불법취업자들인 것 같다. 이들의 옷이 이렇게 남루하고, 점심때 식사량이 많았던 것은 이러한 이유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낸 고액(高額)의 차비나 점심 값을 이들도 똑같이 내고 탔을까? 이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외국인은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중가격(二重價格)’에 매어져 있는 것 같았다. 혹시 관광회사를 경유하지 않고 수라바야(Surabaya)에서 직접 이 버스표를 샀다면 어떻게 됐을까? 누군가의 정보가 있었으면 좋겠다.



‘길리마눅 Gilimanuk’에서 덴파사르 Denpasar 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확실하게 써 놓은 정보는 없지만 보통 2시간 정도로 써 놓았다. 아까 페리에서 시간 계산을 해 보았다. ‘그대로라면 덴파사르에 8시 정도에 도착할 것이고, 그렇다면 우붓 Ubud 가는 교통편이 남아있을 리 없다. 택시를 타면 얼마정도면 될까? 거리를 짐작할 수 없으니 택시비를 흥정하기도 어렵다. 밤에 도착하여 게스트하우스를 찾아도 어렵다. 그렇다면 굳이 우붓 Ubud을 고집할 필요가 없이, 계획을 바꾸어 꾸따 Kuta를 먼저 들르자’하고 종민이와 계획을 수정하였다. 서양 애는 엊그제 꾸따 Kuta를 간다고 했었다. 페리의 3층 갑판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데 둘이 올라왔다.


‘너 어디 가니?’
‘우린 꾸따 Kuta로 간다. 너희는 우붓 Ubud 간다고 했지?’

- 자식 기억력도 좋다. -

‘그랬는데 생각해 보니 일정을 바꿔야겠다. 지금 덴파사르에서 우붓 Ubud 가는 버스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일단 꾸따 Kuta로 갈까 생각중이다.’
‘잘 생각했다. 난 우붓이 별루다. 꾸따 Kuta가 제일 좋다. 꾸따 Kuta로 가자, 우리 같이 택시타고 가면 차비도 절약된다.’

서양 애의 여자친구가 적극적으로 나선다. 처음 만났을 땐 이 여자애가 ‘현지처’ 정도로 생각되었는데 하루 이틀 보고 오늘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인도네시아인 이 아니라 ‘중국인’ 같았다. 서양애가 여자한테 돈을 쓰지 않는 것은 이들의 생활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좋아, 친구를 만나서 힘이 된다. 고맙다.’
‘발리 처음이냐? 우린 꾸따 Kuta 많이 왔었다. 게스트하우스 무척 많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길리마눅 Gilimanuk’에서 ‘덴파사르 Denpasar’까지는 어두워진 길을 세 시간이나 달려 9시가 되었다. 도시의 환한 불빛이 보이고서도 한참을 더 가서 버스는 커다란 터미널에 섰다. 같이 탔던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질서 있게 한 사람의 지휘아래 썰물같이 사라지고 우리 주위에는 많은 택시운전사만 모여 있다.



그중 한 사람과 여자애가 흥정을 한다.

‘꾸따비치 가자’
‘그래 가자.’
‘택시미터로 가냐?’
‘그럼 미터로 가야지.’
‘싫다 흥정하자!’

여자애는 미터를 마다하고 40,000Rp로 흥정을 했다. 택시는 어두운 거리를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새로 만든 검은 아스팔트 냄새가 스며들었다. 그러더니 휘황찬란한 상가거리에서 차는 빌빌~ 걸어가는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면서 간다.


그러더니 2년 전 폭탄테러로 많은 사람이 죽은 ‘사리클럽’이 있던 자리에서 택시에서 내렸다.

‘여기 교통은 항상 막혀서 미터로 오면 얼마가 나올지 모르거든, 게다가 뽀피스Poppies 골목은 좁아서 안 들어가는 것이 좋다. 여기서 조금만 걸어가자.’

며 배낭을 지고 앞서갔다. 동서남북 구분도 못하는 우리는 어느 쪽이 해변인지도 모르며 서양 애를 따라서 한 150m정도를 걸어갔다.


‘여기는 돈(요금)에 따라 집이 틀리다. 수영장이 있으면 비싸고, 에어컨이면 비싸고, 팬은 저렴하다. 넌 어떤 것 원하니?’
‘우린 저렴한 팬룸 원한다.’
‘그래 내가 잘 가는 집이 있다. 그 집 아주 좋으니까 그리로 가자 싫으면 다음날 옮기면 된다.’
‘그래 고맙다.’


'오키 하우스 O'Key House' 하루 60,000Rp에 아침식사포함, 이 애들은 정말 이곳에 몇 번 왔었는지 큰 창문이 있고, 작지만 개별 베란다가 있는 좋은 방을 골랐다.


‘베란다 문을 열고 앉아 있으면 정말 시원하다. 에어컨 필요 없다.’

며 여자애가 이 방을 쓰라고 했다. 자기들은 오늘은 아무 방에서나 자고 내일 좋은 방이 나오면 그리로 옮기면 된다고 했다. 여태까지 속으로 ‘이기적인 놈’이라고 욕했는데 한방 맞은 것 같은 느낌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우린 얘들한테 해 준 게 뭔가? 역시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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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사리클럽 폭탄테러로 숨진 82명의 추모공원 뒤에 명단이 있는데 우리 동포도 2명 끼여있다.



일단 늦은 저녁을 먹었다. 여행자 레스토랑이 제법 많아서 편리했다. 바닷가에 갔는데 사람들은 몇 되지 않고 바람이 몹시 세게 불었다. ‘아하! 이게 발리의 바닷바람이구나!’하는 정도만 있다 돌아왔다. 문을 활짝 열고 모기향을 피워놓고 잤다. 대체로 실링팬- 천장선풍기 - 이 있으면 모기가 그렇게 극성을 부리지 않는다. 그러나 꾸따 Kuta의 모기는 달랐다. 전자모기향과 일반 코일모기향을 3개나 피워놓고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 다음은 꾸따 비치에서
1 Comments
diana 2005.07.03 17:58  
  O'Key House정확한 위치 부탁합니다. 아드님과 여행다니시고 멋지십니다. 이번여름 준비중인데 많은 도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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