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y의 인도네시아 여행기 14 보로부두르의 빠웬사원
나는 50대 중반으로 중학교 1학년인 막내와 둘이 인도네시아를 다녀왔습니다. 일정은 2005년 1월 5일 출발하여 자카르타 - 족자카르타 - 발리 - 방콕 - 인천으로 1월 25일 귀국했습니다.
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보로부두르의 빠웬사원
마차는 ‘믄듯사원’을 떠나 왔던 길을 되 집어 ‘보로부두르’로 돌아가고 있다. 나는 불안하여 ‘빠웬사원’이라고 외치니, 조그만 체구의 마부는 알고 있다는 듯이 손을 들어 주택가를 가르쳤다. 마차는 찻길에서 벗어나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동네 어린이들의 놀이터쯤 되어 보이는 공터가 있고, 정말 완형(完形)으로 복원된 조그만 ‘빠웬사원’이 얕은 철책 안에 있었다. 그 크기로 보아서는 많은 사람들이 ‘정말 허접하다.’고 혹평할 만큼 작았다. 그러나 이 크기는 상대적인 것으로, 세계 3대 불교유적의 하나인 ‘보로부두르’를 이웃에 두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작지만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있는 빠웬사원
인도네시아에서 본 사원들은 거의가 오랜 세월 전에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복원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다. 디엥고원에서 본 힌두사원들이 그랬고, 또 조금 전에 본 ‘믄듯사원’도 완전한 복원인지 알 수 없었다. 단지 현재의 균형 잡힌 모습으로 보아 완전한 복원인 것 같았고, 그 옆에 쌓아둔 돌무더기로 보아 ‘아직도 남아있는 무엇인가 있나보다’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런데 ‘빠웬사원’을 보는 순간 앞선 모든 사원들에서 무언가 허전했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빠웬사원’은 상륜부(上輪部)까지 완벽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정사각형의 축대위에 갑석(甲石) 두르고 기단을 올렸다. 기단에는 돌아가며 꿈틀거리는 화염문(火焰紋)을 돌렸다. 그 위에 약간 퇴물림하여 1층을 올려 그곳에 신성소를 마련했는데, 사원은 전체적으로 아(亞)자 형으로 변화를 주었다. 완만한 경사의 지붕을 만들고 급격히 작아지는 2층, 그리고 아(亞)자형이 변형된 3층이 있으며, 중앙에 날아가는 듯 경쾌한 기울기를 가진 상륜부가 종(鐘)을 엎어 놓은 듯이 있다. 상륜부의 모습은 우리 석탑의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과는 다르게 매우 간단하고 소탈한 형식으로 되어있는데, 사원의 복잡한 몸체를 하나로 다잡아 끝내는 경쾌함이 있다.
빠웬사원은 정면을 제외한 삼면이 모두 벽화로 채워져 있다. 이 점은 '믄듯사원'과 같다.
신성소(神聖所)로 올라가는 입구는 정면에 하나뿐인데, 입구 위에는 귀면(鬼面)같은 무서운 얼굴이 출입자를 감시하고 있다. 문의 양쪽에는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있는 신장이 지키고 있는데, 사뭇 모든 잡인의 출입을 엄하게 감시하고 있는 듯하였다. 왼쪽의 것은 손이 파손되어 있어서 가지고 있는 무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데, 오른쪽의 것은 더 철저하게 파괴되어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얕은 철책이 출입을 금하고 있어서 신성소를 들어가 보지 못했다.
빠웬사원 각 귀퉁이를 장식하고 있는 '팔부신장'중에서
빠웬사원의 1층 외벽에는 벽화가 부조(浮彫)되어 있는데, 삼면의 부조가 거의 비슷하다. 위쪽으로 꽃병을 가운데 두고 두개의 창살을 댄 작은 창문이 두개씩 뚫려 있고, 그 아래에는 역시 꽃병과 4구의 신상(神像)이 조각되어있다. 크고 풍만한 둥근 형으로 된 꽃병에는 무언가 영험(靈驗)한 꽃이 잔뜩 피어 있다. 이것을 가운데 두고 위쪽으로는 풍만한 가슴을 드러낸 두개의 비천상이 다리를 들어 올리고 가볍게 날아오르는 모양으로 조각되어있고, 아래쪽에는 두개의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상(像)은 사람의 상체에 새의 하체를 가지고 있는데, 힘찬 날개와 멋진 꼬리깃털로 미루어 독수리나 매(鷹) 종류인 것 같았다. 불교의 신화에도 수많은 신상(神像)이 나오지만 이러한 모양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으니 아마도 힌두교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됐다. 그러나 나중에 보로부두르의 조각상 중에도 이것과 같은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상과, 또 ‘새 부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 모양의 조각을 발견하고,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불교가 있음을 깨달았다. 역시 이 삼면의 부조 좌우측에는 신장(神將)이 조각되어 있다.
빠웬사원 외벽의 대형 부조벽화, 삼면의 그림이 거의 비슷하다.
빠웬사원 부조 중 인반조(半人半鳥)상 - 다음날 보르부두루 벽화에서도 이와같은 것을 발견하였다.
빠웬사원은 마치 우리나라의 석가탑과 다보탑을 하나로 합한 것과 같았다. 석가탑의 완벽한 균형과 단아한 모습에, 다보탑의 세밀하고 오묘한 모습을 하나로 합치면 ‘빠웬사원’이 나올 것 같았다. ‘보르부두르’의 축조시기를 8세기 중반에서 9세기 중반으로 잡고 있다. 이때 우리나라는 ‘남북조(南北朝)’의 통일신라시대다. 그렇다면 불국사와 석굴암 그리고 석가탑과 다보탑이 만들어지던 시대가 바로 이때가 아닌가. (두 탑이 만들어진 것을 신라 경덕왕때로 본다면 8세기 중반이 된다.)
뜻하지 않게 믄듯사원과 빠웬사원이라는 보물을 건진 우리는 5시 30분 ‘로투스’로 돌아왔다. 옥상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아직도 해는 지지 않았다. 종민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일몰(日沒 sunset)을 기다렸다. 해는 ‘보르부두르’를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산등성이 위로 넘어간다. 그러나 짖은 구름이 황홀한 일몰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금방 어둠이 밀려왔다. ‘보르부두르’에서 자는 사람은 꼭 사원에서의 일몰을 고집하지 않고 이곳 ‘로투스’옥상에서 부담 없는 일몰을 구경하여도 좋을 것 같다. 산 넘어가는 태양과, 그 햇빛을 받고 있는 ‘보르부두르’ 사원의 모습과, 가까운 친지와, 시원한 맥주한잔을 곁들인다면 모자랄 것 없을 것 같았다.
저녁을 먹으러 나갔는데 관광객이 떠나간 ‘보로두부르’는 적막 그 자체였다. 그렇지 않아도 관광객이 없어서 파리 날리던 상가들은 ‘보로두부르’의 폐장과 함께 모두 문을 닫았다. 겨우 한군데 문 연 곳을 찾아가 ‘나시고랭’ 한 그릇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내일 일출 예정시간은 5시 40분이다. 4시 40분으로 알람을 맞춰놓고 모든 짐을 다 싸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보로부두르의 일몰-포토샾으로 약간 수정했음
--- 다음은 보로두부르의 일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