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만든 트랙

홈 > 여행기/사진 > 여행기 > 중국대만
여행기

남이 만든 트랙

네버스탑맘 5 526

  

언젠가 아들아이는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언제인 줄 알아? 바로 맛밤을 먹고, 포도 주스를 마시며 삼국지를 읽는 거야.”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들을 세세하게 파악하는 아들아이는 그중에서도 관우를 제일 좋아한다. 이번에 만리장성에 올라, 관우가 남긴 흔적을 눈으로 보고 싶은지, 장성엔 언제 가냐고 자꾸만 채근한다.

우리나라도 서울구경을 하려고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듯, 중국에도 북경구경을 하려고 중국각지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숱하게 많다. 그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상인들이 극성을 부려 천안문 앞에는 공안들이 한 블럭 걸러 하나씩 배치되어 있다.

 

 북경에 온 시골 사람들은 눈 뜨고 코 베어 가는 세상에서 코를 베어가지 않게 스스로도 무척이나 조심하는 눈치였다. 나도 그렇다. 우린 여행사마다 내놓은 만리장성투어 중 가장 가격이 저렴한 100위안 짜리 상품을 그 전날 예약하고 새벽같이 여행사 앞에서 출발을 기다렸다. 여행사 사장은 곧 이어 우리보고 낡은 봉고차에 타라고 지시한다. 비밀스럽게 수런거리는 새벽공기 속에서 말도 통하지 않고 어제 겪은 횡액도 있었던 터라 초조하게 그들의 행동을 주시했다.  ​중간 집결지에 가보니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해 있다. 1시간 동안 띄엄띄엄 패키지 손님들이 좌석에 앉는다.

드디어 운전수와 조수, 그리고 분위기가 남다른 가이드가 자리를 잡자 버스는 붕붕 소리를 낸다. 가이드는 자신이 하는 일에 굉장한 긍지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검은 가죽 잠바를 입었는데 마치 여인의 옷처럼 목선에 밍크로 장식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좌중을 들었다놨다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우리는 중국말을 모르니 버스 속의 이방인이 되어 그의 말이 어떤 말일까 상상만 할 뿐이다.

 

 설명 대신 그를 자세히 바라본다. 거리에서 만난 중국인과는 사뭇 다르다. 미끈하게 빠진 외모도 다르지만 누군가를 속이려거나 혹은 귀찮아서 무시하는 내색이 없는 태도가 무엇보다 다르다. 능수능란하게 관광객을 후린다. 국적이 달라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도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는 것은 말의 리듬감 때문이 아닐까? 그가 하는 말의 뜻은 모르지만 그의 말은 마치 노래처럼 듣기 좋다.

 

 걱정으로 뭉쳤던 마음이 풀어진다. 아이에게 아껴두었던 칸초를 꺼내 주고 나는 수첩에 오늘 일을 기록했다. 옆줄에 가족 단위로 관광을 나선 무리도 시선이 간다. 7살 아이를 대동한 부부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여행길에 오른 눈치다. 남편은 검은 모자를 쓰고 있고 아내는 큰 대바늘로 뜬 빨간 목도리를 둘렀다. 아이는 스포츠 머리다. 코도 좀 흘린다. 어릴 적 취학 통지서가 나오자 엄마가 준비해주신 건 가슴에 손수건을 옷핀으로 달아주는 일이었다.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은 왜 그리 코를 많이 흘리는 걸까? 국경을 초월해서 말이다. 그래도 아이의 얼굴엔 호기심과 기쁨이 넘친다.

 

 첫 번째 당도한 곳은 팔달령이다. 우리 아이도 기대감으로 팔짝팔짝 뛴다. 그들이 우리에게 준 말미는 두 시간이다. 서둘러 장성에 발을 디뎠다. 겨울이라 그런지 관광객은 드물다. 관우의 쳥룡언월도가 전시된 것을 보고 아이는 벙싯거린다. 책으로만 보던 삼국지 인물이 현실에 살아나오는 기분이라 그러리라.

날씨는 맑지 않았다. 최대한 많이 오르고 싶은 마음에 망루를 향해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옮겨서 올라가보면 그건 아래서 기대했던 종착지와 달랐다. 저 앞에 더 오르고 싶은 망루가 또 펼쳐져 있다. 다시 기운을 짜내어 도착해보면 마찬가지다. 막상 잡아보면 검은색이 되는 파랑새처럼 만리장성은 우리의 희망을 끝없이 유보시킨다. 이제 진짜 여기가 가장 높은 망루라고 생각해 올라가보고 또 다시 기함을 했다. 끝을 알 수 없는 장벽이 굽이쳐서 똑같은 모양으로 건재하고 있기에.

 

 예사 등산과는 거리가 먼 경험이다. 도봉산 망월사, 포대능선을 넘어 자운봉에 오를 때, 손끝에서 쇠파이프의 녹내가 날 정도로 어렵지만 오르고 난 뒤 호연지기로 가슴이 시원해지는 지점은 정상을 밟으면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뒤따랐다.

 

 그러나 이곳은 아니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다. 복사본과 같은 망루의 연속 앞에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아이는 지치지도 않고 자신이 먼저 살펴보겠다고 서둘러 올라가면서 시간을 잘 살피라 한다. 그러고 보니 벌써 1시간이 훨씬 넘었다. 하산 길은 시간이 덜 든다지만 30분도 안 남았다.

 

 “이제 내려와~! 사람들 기다려!! 시간 없어!.”

손나팔로 아이에게 소리를 치고 길을 되짚어 내려오면서, 인생이 길을 걷는 거라면 난 어떤 길을 걸어야하는가? 중얼거려보았다.

 

 땀도 흘리고 숨이 가빠, 때론 바위에 앉아 바람도 맛보고, 정상에서 속세를 관조하기도 하는 산행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쳇바퀴 돌 듯, 남이 만든 트랙을 이유 없이 걸으며 저기 저 위에 뭐가 있을까? 내 발밑의 행복을 짓밟는 태도는 경계해야 할 일이다.

 

내려오면서 간간히 한국에서 단체로 온 청소년들이 가슴에 명찰을 달고 다니는 모습도 보인다. 이 아이들은 오늘 여기서 무엇을 보았을까? 마찬가지로 우리 아이는 또 무엇을 느꼈을까? 그것은 각자의 몫이니 내가 간여할 바는 아니지만 모쪼록 남이 만든 트랙의 정체에 대해서는 한번쯤 성찰했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저 아래, 우리를 마중하러 나온 가이드 보조 아저씨가 보인다. 우리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한다. 앳된 아들아이를 보고 저희끼리 이 아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내기를 냈다며 성별이 무어냐고 물었던 아저씨. 남자라고 답하자, 저희끼리 뭐가 좋은지 박장대소를 하던 분.

 

그 분이 순박하게 웃는다. 만리장성보다 버스 안에서 본 중국인들이 더 마음에 새겨진다. 그들과 공동체가 되어 움직이는 하루의 시간이 값지다.

5 Comments
향고을 2017.01.31 15:50  
마지막 앤딩은
확실하고
분명하고
똑떨어진 느낌,ㅎㅎ
역시 여행은 풍경 좋은곳에서 낯선 이방인들과
부대끼며 어울리는맛이 아닐까 생각해보네요.ㅎ
네버스탑맘 2017.01.31 23:12  
자세히 북경 동선을 기억했다가 그 다음해에 큰 아이와 남편까지 함께 북경을 다시 여행했지만 역시 100원짜리 북경투어가 짱이었어요~`
돌이킬수없어요 2017.01.31 17:57  
인물들의 세심한 묘사가 눈에 들어 오네요^^
어릴적.. 코 흘리는 이유는...코 닦기 귀찮아서죠;;;
코 닦을 필요성이... 그냥 놀기도 바쁘니까요~~ㅎㅎ
향고을님 글 있나 와봤는대.. 네버스탑맘님 글이~~
네버스탑맘 2017.01.31 23:13  
코를 흘려도 뭐라하는 사람도 없지요.ㅎㅎ너도나도 흘리니까.
타이거지 2017.02.02 08:58  
맛밤을 먹으며..목메지 않게 포도쥬스..홀짝.
삼국지 인물들을 파악할 때가 행복하다는 그 떡잎은.
아주...시퍼~~~~~~~~~~~래 보여요^^.
포토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