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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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숙이!

향고을 8 2131
창숙이 

창숙이는 내가 살고 있는 부락 옆동네 신작로옆 외딴집에 살고 있던 
내 국민학교 동창이다. 
아마 창숙이 한테 지금 국민학교 동창중에 내이름을 알려주고 
이런 사람이 국민학교 동창이라고 하는데 창숙이 너는 알고 있냐고 
누가 대신 물어 본다면 창숙이는 백발 백중 나를 모른다고 대답할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나를 모른다고 대답할거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내가 국민학교 
다닐때 그렇게 다른 학생들 눈에 띠는 아이가 아니었다는걸 
내스스로가 너무 잘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평범한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을뿐 
나를 기억해주리라고 생각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지금도 창숙이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창숙이는 동그란 얼굴에 커다란 두눈과 양갈래로 머리 
겁많고 수줍음 많은 예쁜 소녀 모습이었다. 
나와 창숙이가 국민학교 1학년때 부터 6학년때 까지 같은반이된 
햇수는 몇번 아니었던것 같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창숙이를 본기억이 사실 별로 없지만 
지금도 창숙이 얼굴이 또렷이 기억 나는 이유는 
어느해 가을 운동회날 기억 때문에 더욱더 창숙이 얼굴을 또렷이 
기억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시절 시골 국민 학교 운동회 때만해도 일년 학교 행사중 
가장큰 행사가 가을 운동회 였다. 
운동회날이 되면 온동네 사람들이 국민학교에 모여 어린 자녀들 
재롱 잔치를 보기위해 곡식이 알알이 풍성하게 영글어 가는 계절에 
너나 없이 바쁜 농사일을 잠시 멈추고 자녀들 먹일 음식 보따리를 
바리바리 싸들고 고갯길을 넘어 읍내 학교로 모여 들었다. 

사람들은 읍내에 있는 국민학교 운동장 주변에 싸온 음식 보따리를 풀고 
귀여운 자녀들의 율동과 달리기 재롱 잔치를 구경하며 점심 시간을 기다렸다. 
6학년 여자 아이들은 장롱속에 묻혀 있던 엄마 한복 곱게 꺼내 입고 
부채 춤을 사뿐사뿐 추면서 고된 농사일에 지친 부모님 피로를 
덜어주었다. 
아버지들은 임시 천막 돼지 국밥집에서 막걸리 한사발 털털 하게 마시고 
흥에 겨워 춤을 덩실덩실 추기도 하였다. 

부락 동네 별로 학교 운동장 한쪽 구석에 자리를 깔고 한보따리 
싸온 음식들을 나눠 먹으며 자녀들 재롱 잔치에 웃음꽃을 피우던 가을 운동회, 
동네 처녀들도 오랜만에 일손을 멈추고 곱게 분을 찍어 바르고 
장농속에 곱게 아껴뒀던 원피스를 꺼내 입고 삐쭉 구두도 꺼내 신고 엉덩이를 
씰룩이며 운동장 주변을 서성거리면 동네 청년들이 암내난 개처럼 
침을 질질 흘리며 시골 아가씨 궁뎅이를 졸졸 따라 다니는 풍경이 
국민학교 운동회날 벌어지는 진풍경이 아닐수 없었다. 

부락별 청년들 단체 경주도 끝나면 어느덧 땅거미가 엉금엉금 
어두워 질때 사람들은 국민학교 임시천막 막걸리 대포집에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각자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길을 떠났다. 

운동회도 끝나고 날은 저물어 사람들은 빈보따리를 챙겨 집으로 
돌아가는데 복수개 고갯길에서 창숙이 엄마는 임시천막 
돼지 국밥집에서 마신 막걸리에 취해 
복수개 고갯길을 못올라 가고 있었고 
창숙이는 눈물을 흘리며 술취한 엄마를 부축하고 있었다. 

나는 십리길을 걸어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으면서 
아직도 복수개 고갯길에서 울고 있을 창숙이를 생각했다. 

운동회 다음날은 학교에 가지 않는 공휴일이었다. 
공휴일날에는 시골 아이들은 집에서 부모님을 도와 집안 농사일을 거든다. 
나는 공휴일 내내 집안 농사일을 거들면서 창숙이 엄마와 창숙이를 생각했다. 
공휴일이 끝나고 다음날 학교에 가보니 창숙이는 별탈없이 학교에 나와 있었다. 
나는 동그란 얼굴에 양갈래 머리 토끼 같은 커다란 두눈의 창숙이를 보면서 
창숙아 사랑해! 학교에 별탈없이 나와 줘서 고마워! 마음속으로 간절히 속삭였다. 

지금도 나는 창숙이 토끼같이 수줍어 하는 얼굴이 떠오르고 
창숙이가 살던 신작로 옆 외딴집이 눈물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8 Comments
돌이킬수없어요 2016.01.09 17:04  
우와~~♡♡
이글도..대단한대요
향고을님 혹시 이글 예전에 써놧던거중에  ..제일 잘쓴거 아니에요?
왠지..너무 잘쓰셔서 의심이... ㅎㅎㅎㅎ
향고을 2016.01.09 19:16  
비엔티엔 와서 술마시고 하다보니 휠이와서 쓴글인데요.
감사합니다.
런너 2016.01.16 09:18  
재미진 소설 하나 읽은듯~ㅎ
황순원의 소나기를 연상케하네요 .
풍마님! 잘 계시죠~
향고을 2016.01.16 09:56  
런너님 안녕 하시죠?
타이거지 2016.09.10 10:15  
창숙이............................
향고을님 기억하시죠?.....................
향고을 2016.09.10 21:05  
국민학교~ㅎ
세월 빠르네요~
네버스탑맘 2017.02.04 12:18  
창숙이글을 읽으니...저도 이번에 내는 책 중 일부가 생각이 나요^^
네버스탑맘 2017.02.04 12:19  
휴일 오후 라면을 끓인다. 물이 팔팔 끓으면 두 쪽으로 쪼갠 라면을 스프와 함께 넣은 다음 부스러기는 입에 탁 털어 넣는다. 어떤 땐 눅눅하고 어떤 땐 아삭하다. 아삭한 라면은 생라면을 부숴먹던 어린 시절로 불러들인다. 물 없이 라면부스러기를 뻑뻑하게 씹어 삼키는 맛이 라면을 날 것으로 먹는 진미다. 특유의 풍미가 혓바닥, 어금니에 남아서 주린 배도 배지만 입안을 즐겁게 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과자의 유해성을 말하며 일부러 과자를 피하지만 그땐 과자가 귀해 생라면도 마다 않고 잘게 부수어 스프를 뿌려 봉지주둥이를 쥐고 위아래로 흔들어 먹는 게 큰 기쁨이었다. 그 후로 ‘라면땅’도 나오고, ‘뿌셔뿌셔’도 나왔다.
 가게도 멀고 식구도 많은 우리 집은 라면을 박스로 사놓는데 엄마가 막아도 몰래 빼내어 라면을 날것으로 먹기 일쑤였다. 그런 우리 자매들에게 누진 라면은 낭패다. 후라이팬에 구워 봐도 그 고소함을 되살릴 수가 없다. 결국 누진 라면은 끓여먹는 수밖에 없었다.
 석유곤로에 스프가루를 흘리고 세로로 라면봉지를 찢어 여기저기 버려두고 냄비와 젓가락을 설거지해놓지 않으면 엄마에게 호되게 꾸중을 듣기도 했지만 혼날 때뿐이지 다음에도 또 그렇게 해놔서 지청구를 들어야했다.
 세로로 찢은 라면봉지는 쓸모없지만 가로로 찢은 것은 그 안에 학교서 해오라는 잔디씨도 담을 수 있고 어느 땐 도랑의 물을 담아 송사리도 넣어 다닐 수 있어서 요긴했다.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우리 학교에  전학 온 남학생이 있었다. 그날도 차비로 라면을 부숴먹으며 하교를 하다가 추수가 끝난 땅콩 밭을 지나가게 되었다. 집주인이 캐가고 남은 땅콩밭에 더러더러 알갱이가 남아 있었다. 햇살에 흙이 익어 푸슬푸슬하게 먼지를 일으키고 그 사이로 땅콩넝쿨을 잡아당기면 땅콩이 따라 나왔다. 볶지 않은 땅콩이 맛날 리 없지만 뭔가를 줍는 기쁨은 어린 마음에도 커서 흙 묻은 줄기의 땅콩을 따서 라면 봉지를 채우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한참 죠다쉬 청바지와 프로스펙스 신발이 유행하던 때, 조심조심 흙이 묻지 않게 땅콩을 주웠다. 그 남학생도 경쟁적으로 땅콩을 주웠다. 동네 남자애들과만 친했지 낯선 아이에겐 경계가 일어서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다음날 그 아이는 하굣길에 내 곁에 와서는 불쑥 퉁퉁한 삼양라면 봉지를 내밀었다.
 “땅콩이야.”

 12살 먹은 5학년 여자아이인 나로서는 당황했다. 잘 모르는 남자아이가 주는 땅콩을 넙죽 받을 수가 없었다. 그냥 싫다고 하면 될 것을 아스팔트 위에 내동댕이쳤다.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모르겠다. 그 남학생은 얼마 후 아버지의 발령으로 또 훌쩍 전학을 갔다.
 
 가끔 어른이 되어서 사람들과 교류할 때, 내 진심을 사람들에게 보일 때가 있다. 그들이 흠칙 놀라며 뒤로 물러서는 걸 느낀다. 진심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이 이런 걸까? 그것이 그 때 그 남학생에게 입힌 상처의 대가라면 달게 받아야한단 생각이 인다. 눈빛으로서 말로서 행동으로서  심지어는 생각으로서 주변에 입힌 상처를 진심으로 사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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