風花雪月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따리....
아름답고 어머니의 모태처럼 포근한 곳이다.
숭성사 삼탑을 갈 때는 걸어 갔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시내 버스를 탔다. 1위안.
꾸청에 도착하니 혹시 못 본게 있나 다시 시내를 돌아 다닌다.
이곳은 사실 리지앙의 비하면 따리의 꾸청은 볼 것이 많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짧은 여행일자로 윈난성여행을 오면 이곳을 우선적으로 제외시키는 곳이란다.
그래도 리지앙에 사는 나시족의 배반으로 사라진 바이족의 고도인데....
아직까지 관광객 유치에서도 리지앙에 밀리는 곳이다.
총통병마대원수부....
이곳은 두문수라는 사람이 자신의 회족 이름인 "술탄 술라이만"의 중국식 의미로 "총통병마대원수"로
칭함에 따라 이렇게 이곳에 현판으로 흔적이 남아있다.
청나라가 이곳을 지배할 때 회족을 살해하는 쿤밍 대학살 사건(1856년)이 생겼고 두문수는 회족과 바이족,
그리고 만주족인 청나라에 반감을 갖고 있던 한족의 세력을 규합하여 봉기를 일으켰고 따리를 중심으로
윈난성 일대를 장악하여 20여년간이나 지배를 했던 중국내 유일한 이슬람 국가인 평남국(平南國)을
건국하였단다.
결국 청의 반격으로 지도층은 모두 살해당하고 두문수와 그의 가족들은 자살을 함으로 그는 50년의 짧은 생은
아침 이슬처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꿈은 구름처럼 흩어지고 만다.
중원의 입장에서는 소수민족 반란사건으로 기록하고 있겠지만....
그러나 리지앙의 저자거리처럼 혼잡한 곳이 싫다면 한적한 이곳 고성을 걷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여유롭고 한가롭게 걷는 古城漫步.... 잊지 말자.
이제 돌아가 저녁을 먹고 꾸청의 야경이나 구경하자.
등어리에 짊어진 배낭에는 항상 귤과 바나나와 물이 들어있다.
귤은 갈증을 막아주고 바나나는 간식으로 좋은 과일이다.
돌아 다니다 다리가 아프면 의자에 앉아 쉬었다 가자.
여행이란 이렇게 바람처럼 구름처럼.... 흐르는 물처럼 그리 다녀야 한다.
쉬어가는 참에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메모도 하고 간다.
이곳 따리 꾸청 안에는 쉴 수 있는 의자가 많아 언제든지 쉬었다 갈 수 있다.
감기 기운이 점점 심해진다.
이제 여행의 시작인데.... 비상약을 준비했지만 이곳은 타국이 아닌가?
혹시 그럼 佳人이 신종플루?
밤에 돌아다니려면 옷을 따뜻하게 입어야 한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데..... 젠장... 숭성사 입구에도 한글로 개들이 쉬는 휴개처라고 써 있던데...
숙소로 들어와 우선 카메라에 담아놓은 사진을 객잔에 있는 컴퓨터를 이용해 준비해간 메모리로 옮기려고
하는데 컴맹이라 중국어로 뜨는 컴퓨터로 작업을 하려니 혹시 기록이 모두 날아갈까 걱정이 된다.
쩔쩔매고 있는데 중국 젊은 여성 배낭여행자가 도와주겠단다.
그래서 그녀에게 부탁을 하고 무사히 스린에서 부터 찍은 사진을 모두 메모리에 옮겼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처럼 내일 리지앙으로 가겠다고 하여 그들 부부와 함께 뭉치기로 했다.
여행이란 이렇게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 함께 할 수 있어 좋다.
여행자란 비록 낯선 곳일지라도 함께 공유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부부와 같이 숙소에서 리지앙행 미니버스를 예약(1인당 40위안)하고 다시 나온다.
이제 저녁을 먹고 다시 꾸청 안으로 들어간다.
따리의 꾸청은 불을 밝혀 아름답다.
다시 남문에서 오화루를 거쳐 북문으로 훑어본다.
오화루 안에는 관세음보살상을 모신 곳이란다.
이렇게 아름다운 따리국을 창산을 넘어 온 원나라의 쿠빌라이가 박살을 냈단 말인가?
쿠빌라이는 로마를 불사른 네로나 낙양을 불지르고 시안으로 야반도주한 동탁처럼 이곳을 불지르고 술잔을
기울이며 낄낄거렸을까?
세상의 역사란 전쟁의 역사고 힘있는 자의 기록이다.
사라진 나라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두문수가 평남국을 세웠을 때 이곳 바이족과 회족이 단결하여 과거 원나라의 침공 때 앞장서서
이곳으로 인도한 나시족에 대한 보복으로 리지앙 꾸청을 철저하게 파괴시키기도 했단다.
피는 또 다른 피를 부르는가?
역사란 늘 리지앙의 대수차처럼 돌고 도는게 맞는가 보다.
양런제라는 양인가...
주로 서양 관광객이 많이 머문다는 곳인가?.
그럼 동양인은 양인이 아닌가?
그렇게 강력한 원나라의 몽골군도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그리고 베트남 중부지방에 자리잡고 있던 참파까지
쓸어버렸지만 윈난 바로 턱 밑에 있는 베트남은 함락하지는 못했다.
4차례에 걸친 공격에서도 베트남의 초토화 작전과 게릴라 전술에 번번히 패한다.
그 때 베트남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 쩐 흥 다오(陳興道)라고 하는데 지금도 베트남에 가면 어느 도시나
도로명이 쩐 흥 다오라고 이름지어진 곳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때 유명한 전투가 제 2차 바익당강 전투로 베트남 사람들이 자부심을 갖고 아주 자랑스러워 하는 전투다.
유명관광지인 하롱베이로 흘러드는 바익당강을 거슬러 하노이로 공격하여 온 원나라군을 강 바닥에 말뚝을
박아 밀물 때 들어온 대규모 원나라의 함대는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해 원나라군 배가 강 양안에 매복한
베트남군의 화공에 의해 대부분 전멸을 한 유명한 전투가 바로 제 2차 바익당강 전투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민족이 얼마나 강한 집념을 지닌 민족인가를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은 이렇게 중국과 수천년을 걸쳐 싸워 물리쳤고, 강력한 프랑스를 몰아냈으며 우리와도 관련이 깊은
월남전에서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도 물리쳤다.
원나라의 3차 침입 때는 물러나는 원나라군의 일반 포로는 정중히 돌려보냈으나 우마루라는 장군 외에
장수들이 탄 배의 밑바닥에 구멍을 뚫어 모두 수장시킨 일이 있어 베트남 사람의 민족성을 읽을 수 있다.
우리 고려는 몽골이 수전에 약함을 알고 강화도로 천도를 하며 버텼으나 결국 원나라의 압력에 항복에
준하는 화친을 청하고 수많은 민초들이 원나라로 끌려가는 아픔을 겪었다.
원나라가 패망하자 고려 유민들이 이곳 따리 부근으로 와 백족과 섞여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그 이유로는 흰색을 숭상하고 우리와 같은 장을 담궈 먹고 사용하는 언어중 유사한 점이 있다고는 하나
확인 불가...
달아~ 달아~~ 너는 기억하니?
그날밤 야심한 시각에 창산을 넘어 온 기마병에게 이곳이 말 발굽에 짖밟히던 날...
그리고 우리의 선조들이 이곳으로 피신와 고향을 그리며 달을 쳐다보고 눈물 짓던 일들을.....
이곳 따리는 원나라 침공 이전에 당나라가 이곳을 침공했다가 수십만명을 얼하이 호수에 수장시키고 물러
간 적도 있단다.
그러나 천혜의 요새도 이웃마을인 나시족의 배반으로 이렇게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중국이 되었다.
오늘이 보름이다.
그래서 꾸청의 누각 위로 휘엉청 떠오른 보름달을 바라 본다.
내일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아름다운 강이라는 리지앙(麗江)으로 간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름다운 강이 없었다.
다만 아름다운 개울이 있을 뿐이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 아름다운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이곳 따리를 다스리던 왕 중에 9명이 무거운 곤룡포를 벗어 던지고 숭성사에
들어가 가사를 입었답니다.
가사란 108번뇌를 의미하여 버린 옷이나 죽은 사람의 옷을 108개의 천 조각으로
만들어 입는다는데 요즈음에는 구도자들 조차도 그런 옷을 입지 않습니다.
진정 아름다운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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