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를 빙자한 주뇽이의 북경여행기(7.끝)
-소감문 발표회-
연경에서 돌아와서는 저녁시간에 소감문 발표회를 겸한 만찬이 개최되었다. 이곳에 온 지난 4일 동안 저녁시간 이후에는 항상 학생들에게 과제물이 주어졌고 그 시간을 통해 하루하루의 느낀점을 구체적으로 기록하도록 지도했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 아이들은 아이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느낌은 피상적일 수 밖에 없는 면이 있다. 사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아이들의 나이가 아니라 패키지 관광이란 시스템에 있다. 예를들면 수학여행 때 관광버스를 타고 둘러보는 설악산에서 진정한 설악산을 느낄 수 있겠는가? 정말로 설악산을 알고 싶으면 관광버스에서 내려서 배낭을 짊어지고 힘들더라도 산에 올라야 한다.
사실은 지금도 그래야 한다. 하지만 학생들의 숫자가 너무 많고 더 근본적으로는 "인솔"과 "책임"의 문제가 따른다. 따라서 이런 문제는 나같은 선생의 몫이 아니라 그들의 부모가 해줘야 할 부분이다.
어젯밤에는 대체 이 녀석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들의 방에 갔었다. (그동안에는 내가 나타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길까봐 일부러 아이들 방에는 가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밤 늦도록 중국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오늘...
발표회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초딩과 중딩 그리고 수학과 과학으로 나눠 네그룹에서 각각 소감을 이야기 하고 그들 중 가장 잘한 학생을 뽑아 전체를 대상으로 이야기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어제 나랑 이야기한 녀석이 이런 발표를 했다.
"어제 OOO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가 보는 화려함의 이면에 감춰진 이곳 사람들의 어려운 삶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베개위에 10위안의 팁을 올려 놓았는데, 저녁에 방에 돌아와보니 탁자위에 감사하다는 내용의 영어로 씌어진 장문의 편지가 높여 있었습니다..."
가슴이 뭉클했다. 내가 어제 한 이야기는 팁문화에 대한 것이었다. 팁은 너희들이 기분 좋을 때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의이며, 여기서 청소하는 사람들은 월급이 거의 없거나 받아도 1000위안 정도밖에 안되므로 팁을 안주는 것은 그들을 공짜로 부려먹겠다는 심보라고 했었다.
이 이야기 말고도 사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녀석에게는 이게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모양이다. 어쨌든 녀석은 모두의 심금을 울려서 우리 조의 대표가 되어 전체학생을 대상으로도 발표를 했다.
-천안문 광장과 자금성-
1월23일(금). 오늘은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아침에 모닝콜을 들었을 때는 정말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서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짐은 어젯밤에 이미 다 싸놓았으니 씻고 밥먹으러 내려가면 된다.
최후의 조찬... 오늘은 오전에 천안문광장과 자금성을 보는 것외에 특별한 일정이 없으니 밥도 많이 먹을 필요가 없다. 물론 밥맛도 없었다.
그렇게 아침을 해결하고 내려가니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이다. 어제까지 이용했던 버스가 오늘은 시동이 안 걸려서 다른 것으로 교체했다더니 아닌게 아니라 추위가 장난이 아니다.
그런 가운데 천안문광장에 도착.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모자와 귀마개를 든 상인들이 떼로 몰려와서 사라고 난리들이다. 아침기온 영하 16도. 그러나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 체감온도는 영하30도가 되는듯 했다. 무엇보다 귀가 떨어져 나갈것 같다. (이 상황에서 나는 내 코트에 모자가 달려있음을 까먹고 온몸으로 추위를 견뎠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모자와 귀마개를 구입하지 않는 나의 절약정신!! 한참을 개처럼 떠는데 옆에 있는 선생님이 알려줘서 모자를 썼다. 크크.. 사지 않기를 잘했다!!)
광장에는 오성홍기가 펄럭이고 천안문에는 "중화인민공화국만세"와 "세계인민대단결"이라고 씌어진 구호가 선명하다. 1949년 10월 1일. 저 천안문의 성루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던 모택동 주석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사실은 지금도 시간만 허락한다면 저 성루에 오를 수 있다. 여행이 의미를 가지려면 상상력을 키워야 하거늘...
모택동기념관이다. 안에 들어가면 모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모습을 볼 수 있다는데 오늘도 여기는 생략이다. 아마 패키지 관광은 열번을 와도 매번 똑같은 것만 보다가 갈 것같다. 시신을 보면서 사회주의 국가원수의 장례문화에 대해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을... 정말 다음에는 꼭 가족들하고 배낭여행을 와야지... 다짐을 하게 된다.
이 날씨에 이 친구들을 보면 경이롭게 느껴진다. 얼마나 춥겠는가!! 하지만 광장 곳곳에는 이렇게 구호를 외치며 뛰어다니는 군인들이 도처에 있었다.
인인영웅기념비와 멀리 보이는 인민대회당의 모습이다. 여기 오면 저 앞에서 사진도 찍고 기념비가 갖는 역사성을 음미하고 그래야 하는데 역시 오늘은 춥기 때문에 그냥 한번 보고 끝이다.
전루를 보고 태양을 기다려 맞이한다는 정양문(전문)을 지나 천안문으로 들어서는데 오로지 전진뿐이다. 주위의 전각들에는 눈을 돌릴 겨를도 없다. 이미 작동이 중지된 카메라를 소생(?)시키기 위해 카메라를 품안에 넣어 녹였다가 간만에 제자녀석하고 태화전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자금성은 지난번에 한번 봐서 감흥도 덜했지만 무엇보다 날씨때문에 감상이고 뭐고 없이 모두들 그저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뭐 이런 여행이 다 있나 싶다. 하여간 그렇게 사진이나 한방씩 날리면서 신무문으로 뛰어나오니 아까 광장부터 여기까지 딱 1시간이 걸렸다.
바로 눈앞의 경산공원은 오늘도 생략이다. 여름같으면 경산공원 옆으로 돌아가서 인력거라도 타겠는데 오늘은 날씨때문에 인력거가 한대도 보이지 않는다.
트롤리버스는 북경의 명물이다. 예전에는 서울에도 저거랑은 다르게 생겼지만 청량리에서 마포까지 전차가 다녔다는데(그래서 유명한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이란 노래가 있지 않은가?) 1968년에 모두 뜯어내고 지금은 차가 다니지만 북경에는 도심에 한해서 아직도 운행중이다.
-돌아오기-
경산공원 옆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공항을 향하는데 북해공원 부근에서는 여러 이름의 후통들이 보였다. 날씨는 춥지만 인력거 타고 안에 들어가서 아무 사합원에나 들러 차나 한잔하면 좋을것 같다. 비행기 타는 시간이 오후 2시라 12시까지는 공항에 가야 하고 오전인데도 차가 막혀서 안 그래도 시간이 부족한데 점심까지 먹어야 했다. 앞에서도 인솔과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지금 밥을 먹는 이유는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집에 가서 "굶고 다녔어요"라고 말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지난 4박5일 동안 우리를 안내해 준 박범호선생(133-6665-7717)과는 수도공항의 입구에서 인사를 나눳다. 우리는 돌아가서 설을 쇠면 되는데 그는 내일 또 다른 손님을 맞이하러 공항에 나온다고 했다. 난 이번 중국여행이 3번째이고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패키지였는데, 만나는 가이드마다 사람들이 참 좋았다. 이번 박선생은 나이 스물여덟에 결혼한지 5개월된 새신랑인데 사람이 참 순박하고 좋았다.
오후2시발 KE856편. 기내에서 신문을 펴 보니 그동안 한국에서는 건물위에 농성하러 올라갔던 철거민들이 화재사건으로 6명이나 사망했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다.
인천에 도착하여 먼저 아내에게 전화를 하고 공항버스에 몸을 싣고 돌아오니 아내가 두 딸과 어머니까지 모시고 정류장에 나왔다. 나의 여덟번째 해외여행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재미없는 글이지만 그동안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연경에서 돌아와서는 저녁시간에 소감문 발표회를 겸한 만찬이 개최되었다. 이곳에 온 지난 4일 동안 저녁시간 이후에는 항상 학생들에게 과제물이 주어졌고 그 시간을 통해 하루하루의 느낀점을 구체적으로 기록하도록 지도했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 아이들은 아이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느낌은 피상적일 수 밖에 없는 면이 있다. 사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아이들의 나이가 아니라 패키지 관광이란 시스템에 있다. 예를들면 수학여행 때 관광버스를 타고 둘러보는 설악산에서 진정한 설악산을 느낄 수 있겠는가? 정말로 설악산을 알고 싶으면 관광버스에서 내려서 배낭을 짊어지고 힘들더라도 산에 올라야 한다.
사실은 지금도 그래야 한다. 하지만 학생들의 숫자가 너무 많고 더 근본적으로는 "인솔"과 "책임"의 문제가 따른다. 따라서 이런 문제는 나같은 선생의 몫이 아니라 그들의 부모가 해줘야 할 부분이다.
어젯밤에는 대체 이 녀석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들의 방에 갔었다. (그동안에는 내가 나타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길까봐 일부러 아이들 방에는 가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밤 늦도록 중국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오늘...
발표회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초딩과 중딩 그리고 수학과 과학으로 나눠 네그룹에서 각각 소감을 이야기 하고 그들 중 가장 잘한 학생을 뽑아 전체를 대상으로 이야기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어제 나랑 이야기한 녀석이 이런 발표를 했다.
"어제 OOO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가 보는 화려함의 이면에 감춰진 이곳 사람들의 어려운 삶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베개위에 10위안의 팁을 올려 놓았는데, 저녁에 방에 돌아와보니 탁자위에 감사하다는 내용의 영어로 씌어진 장문의 편지가 높여 있었습니다..."
가슴이 뭉클했다. 내가 어제 한 이야기는 팁문화에 대한 것이었다. 팁은 너희들이 기분 좋을 때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의이며, 여기서 청소하는 사람들은 월급이 거의 없거나 받아도 1000위안 정도밖에 안되므로 팁을 안주는 것은 그들을 공짜로 부려먹겠다는 심보라고 했었다.
이 이야기 말고도 사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녀석에게는 이게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모양이다. 어쨌든 녀석은 모두의 심금을 울려서 우리 조의 대표가 되어 전체학생을 대상으로도 발표를 했다.
-천안문 광장과 자금성-
1월23일(금). 오늘은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아침에 모닝콜을 들었을 때는 정말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서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짐은 어젯밤에 이미 다 싸놓았으니 씻고 밥먹으러 내려가면 된다.
최후의 조찬... 오늘은 오전에 천안문광장과 자금성을 보는 것외에 특별한 일정이 없으니 밥도 많이 먹을 필요가 없다. 물론 밥맛도 없었다.
그렇게 아침을 해결하고 내려가니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이다. 어제까지 이용했던 버스가 오늘은 시동이 안 걸려서 다른 것으로 교체했다더니 아닌게 아니라 추위가 장난이 아니다.
그런 가운데 천안문광장에 도착.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모자와 귀마개를 든 상인들이 떼로 몰려와서 사라고 난리들이다. 아침기온 영하 16도. 그러나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 체감온도는 영하30도가 되는듯 했다. 무엇보다 귀가 떨어져 나갈것 같다. (이 상황에서 나는 내 코트에 모자가 달려있음을 까먹고 온몸으로 추위를 견뎠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모자와 귀마개를 구입하지 않는 나의 절약정신!! 한참을 개처럼 떠는데 옆에 있는 선생님이 알려줘서 모자를 썼다. 크크.. 사지 않기를 잘했다!!)
광장에는 오성홍기가 펄럭이고 천안문에는 "중화인민공화국만세"와 "세계인민대단결"이라고 씌어진 구호가 선명하다. 1949년 10월 1일. 저 천안문의 성루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던 모택동 주석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사실은 지금도 시간만 허락한다면 저 성루에 오를 수 있다. 여행이 의미를 가지려면 상상력을 키워야 하거늘...
모택동기념관이다. 안에 들어가면 모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모습을 볼 수 있다는데 오늘도 여기는 생략이다. 아마 패키지 관광은 열번을 와도 매번 똑같은 것만 보다가 갈 것같다. 시신을 보면서 사회주의 국가원수의 장례문화에 대해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을... 정말 다음에는 꼭 가족들하고 배낭여행을 와야지... 다짐을 하게 된다.
이 날씨에 이 친구들을 보면 경이롭게 느껴진다. 얼마나 춥겠는가!! 하지만 광장 곳곳에는 이렇게 구호를 외치며 뛰어다니는 군인들이 도처에 있었다.
인인영웅기념비와 멀리 보이는 인민대회당의 모습이다. 여기 오면 저 앞에서 사진도 찍고 기념비가 갖는 역사성을 음미하고 그래야 하는데 역시 오늘은 춥기 때문에 그냥 한번 보고 끝이다.
전루를 보고 태양을 기다려 맞이한다는 정양문(전문)을 지나 천안문으로 들어서는데 오로지 전진뿐이다. 주위의 전각들에는 눈을 돌릴 겨를도 없다. 이미 작동이 중지된 카메라를 소생(?)시키기 위해 카메라를 품안에 넣어 녹였다가 간만에 제자녀석하고 태화전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자금성은 지난번에 한번 봐서 감흥도 덜했지만 무엇보다 날씨때문에 감상이고 뭐고 없이 모두들 그저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뭐 이런 여행이 다 있나 싶다. 하여간 그렇게 사진이나 한방씩 날리면서 신무문으로 뛰어나오니 아까 광장부터 여기까지 딱 1시간이 걸렸다.
바로 눈앞의 경산공원은 오늘도 생략이다. 여름같으면 경산공원 옆으로 돌아가서 인력거라도 타겠는데 오늘은 날씨때문에 인력거가 한대도 보이지 않는다.
트롤리버스는 북경의 명물이다. 예전에는 서울에도 저거랑은 다르게 생겼지만 청량리에서 마포까지 전차가 다녔다는데(그래서 유명한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이란 노래가 있지 않은가?) 1968년에 모두 뜯어내고 지금은 차가 다니지만 북경에는 도심에 한해서 아직도 운행중이다.
-돌아오기-
경산공원 옆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공항을 향하는데 북해공원 부근에서는 여러 이름의 후통들이 보였다. 날씨는 춥지만 인력거 타고 안에 들어가서 아무 사합원에나 들러 차나 한잔하면 좋을것 같다. 비행기 타는 시간이 오후 2시라 12시까지는 공항에 가야 하고 오전인데도 차가 막혀서 안 그래도 시간이 부족한데 점심까지 먹어야 했다. 앞에서도 인솔과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지금 밥을 먹는 이유는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집에 가서 "굶고 다녔어요"라고 말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지난 4박5일 동안 우리를 안내해 준 박범호선생(133-6665-7717)과는 수도공항의 입구에서 인사를 나눳다. 우리는 돌아가서 설을 쇠면 되는데 그는 내일 또 다른 손님을 맞이하러 공항에 나온다고 했다. 난 이번 중국여행이 3번째이고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패키지였는데, 만나는 가이드마다 사람들이 참 좋았다. 이번 박선생은 나이 스물여덟에 결혼한지 5개월된 새신랑인데 사람이 참 순박하고 좋았다.
오후2시발 KE856편. 기내에서 신문을 펴 보니 그동안 한국에서는 건물위에 농성하러 올라갔던 철거민들이 화재사건으로 6명이나 사망했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다.
인천에 도착하여 먼저 아내에게 전화를 하고 공항버스에 몸을 싣고 돌아오니 아내가 두 딸과 어머니까지 모시고 정류장에 나왔다. 나의 여덟번째 해외여행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재미없는 글이지만 그동안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