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씽이(兴义)로 가는 길

홈 > 여행기/사진 > 여행기
여행기

<20일간의 동남아시아 여행> (4) 씽이(兴义)로 가는 길

res 0 1954


씽이로 오는 길은 장장 여섯 시간이 걸렸습니다. 동남 아시아의 장거리 버스는 VCD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맨 뒷좌석까지 잘 들리도록 볼륨을 최대한 크게 맞춘 TV에서 나오는 것은 어김없이 홍콩 영화. 안 보고 풍경에 집중하고 싶어도 소리가 들리니 안 볼 수가 없어, 버스 안에서 홍콩 영화를 세 편이나 보았습니다. (이제 어지간한 영화는 집중하지 않고 봐도 스토리 흐름을 놓치지 않으니, 중국어가 꽤 늘긴 늘었나 봅니다. 양조위와 왕조현이 나오는 천녀유혼3, 유덕화와 장국영이 열연한 신상해탄, 그리고 이름 모를 영화 한 편.)



구이양에서 출발한 게 두 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기 때문에 밖은 밝았고, 한 눈으로 영화를 보면서 다른 한 눈으로 창 밖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 보는 구이저우 땅. 어디서 듣기를, 구이저우에 3일 맑은 날이 없고, 땅은 3리 평평한 곳이 없으며, 거리엔 서 푼의 돈 가진 사람도 없다고 했는데 (天无三日晴,地无三里平,人无三分银) 그 말이 정말인지 굽이굽이 산길은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풍경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예전에 많이 보던 것 같은 정겨운 풍경이었다는 것입니다. 산이 많고 끝이 없지만 티벳같이 이국적인 느낌이 나기 보다는 우리네 80년대 산동네 같이 낯익습니다.

b0026212_479b69dbcbd60.jpg
우리집 소는 누렁이였는데.
멀뚱멀뚱 날 보는 이 소도 꽤 귀엽습니다. 1월 8일 씽이.

80 년대 출생인 제가 80년대 시골을 이야기하면 우습지만, 예전에 우리 할아버지 댁도 나름 이런 시골 깡촌이었습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밭에서 어느 날 할머니와 감자를 캐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합니다. 할머니는 호미를 내 손에 쥐어 주고는 "몽주리 몽주리 캐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집에는 외양간이 있어 황소와 돼지를 키웠고, 황소는 가끔 몸이 아파 할아버지가 약을 여물에 섞어 먹이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황소가 약을 먹지 않으려고 버둥대다 줄을 끊고 외양간 밖으로 뛰쳐나와 난동을 부린 적도 있었습니다.
푸세식 화장실은 외양간 바로 옆에 있어서, 할아버지는 푸세식 변기(라기 보다는 그냥 나무판을 몇 개 걸쳐놓은 것) 옆의 넓은 빈 공간에 거름을 쌓아 두었고, 서울에서 자란 사촌 오빠는 그래서 화장실 가기가 무섭다며 벌벌 떨기도 했습니다. 사실 어린 친구들 사이에선 화장실이란 이름보다 똥뚜간이란 이름이 더 익숙했지요.
집은 전형적인 옛날식 온돌 기와집이라, 돌담으로 둘러싸인 집 앞에 커다란 나무 문이 있었고, 흙벽에 기와가 얹힌 건물 두 채가 봉당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안방엔 할머니, 할아버지가, 건넌방엔 증조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셨고, 군대간 삼촌이 쓰던 사랑이 붙어 있었습니다.
가끔 할아버지는 산에서 나무가 아닌 낭구를 해 지게에 잔뜩 짊어지고 왔고, 그 낭구들은 사랑방 옆에 쌓아 두었는데, 나는 할머니가 솥에 불을 땔 때 옆에 앉아 그 낭구 몇 개를 집어다가 불 속에 살짝 던져 넣었습니다. 할 일이 없으면 하루 종일 솥 앞에 앉아 불 때는 걸 구경하다가 고모한테 혼나기도 했었지요.
고모는 나중에 차를 샀는데, 시내에서 집까지 들어오는 길이 하도 구불구불해서 따로 운전 연수를 받을 필요도 없다고 웃었습니다.


씽이로 가는 길에는 옛날 우리 할아버지가 메고 내려 왔던 그만한 나무짐을 지고 내려오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았습니다. 나는 즐거이 향수에 젖었지만 이 곳이 지긋지긋한 사람도 있겠지요. 마치 아빠가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다고 했듯이. 아빠도 여기 아이들처럼 그 흙길을 지나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를 따라 걷고 또 걸어서 학교에 갔었을 것입니다. 아빠의 어릴 적 꿈이 세계 여행이라고 했는데, 여기도 산으로 둘러싸인 앞이 보이지 않는 좁은 마을을 벗어나 더 넓은 세계로 가고 싶은 아이들이 있겠지요. 월급이 500위안쯤 된다는 상해 조선족 음식점의 종업원 아이의 고향도 이런 곳이었을까요.

여기도 이십년이 흐르면 할머니댁처럼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하고, 커다란 솥 대신 전기밥솥과 전자레인지를 갖다 놓게 될까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어쩐지 안타까웠습니다.

0 Comments
포토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