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여행하는 법] 11. 빠이의 낮과 '밤'
어제는 흐림. 오늘은 맑음. 내일은 비 예상.
날씨의 변덕은 자연스러운데,
왜 사람 맘이 들쑥날쑥한 것은 그리도 간사하게 여겨지는 걸까요.
빠이에서의 내 일기장이 꼭 그 짝입니다.
남친에게 전화를 해대며 투정을 부리는 것은 바로 이 날로 끝납니다.
그 이후,
남친의 전화는 못 받기 일쑤이고 때로는 귀찮아서 슬그머니 꺼놓기도 합니다.
그리움이란 건,
심심할 때 내 맘대로 꺼내 씹는 껌 같은 건가,
그런 건가...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아찔합니다.
나는 슬그머니... 전화기 탓을 해봅니다.
생각나는 것과 보고 싶음은 다릅니다.
보고 싶음은 통증을 수반한 감각입니다.
그리움의 대상이 되려면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전화기 덕분에 우리는 너무 가까이 있게 됩니다.
단축 버튼 하나로 바로 연결됩니다.
문명의 이기란... 이렇게 그리움의 감각마저도 마비시키고 맙니다.
2006년 6월 17일
어제는...
타페 중고책방에서 산 하이틴 로맨스를 읽느라 밤을 샜습니다.
아침 일찍 첵아웃하고 강변 쪽의 숙소로 옮기려는 내 계획은 불발로 끝납니다.
눈을 뜨니 이미 첵아웃 시간입니다.
천천히 씻고 나와 빠이 동네를 어슬렁거려 봅니다.
한 시간이면 몇 바퀴 돌고도 몇 분이 남을 아담한 동네, 빠이.
강변 쪽으로 나가봅니다.
여행지에서 딱히 할 일이 없을 땐,
다음 숙소 물색하는 게 가장 좋은 소일거리입니다.
터미널을 지나 강변으로 가는 그 거리에서,
한 남자분을 만납니다.
“니혼노 까따데쓰까?” (일본 분이십니까?)
이렇게 말을 하면 열이면 열 일본인들이 다 속습니다.
그는 속지 않습니다.
한국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또박또박, 발음에 신경 써서 얘기하는 그의 말투는 무척 독특했습니다.
“3개월 이상 여행하셨죠?”
억양도, 국적도, 나이도, 정체불명인 그는...
한눈에 장기여행자임이 분명했습니다.
3개월이 아닌 3년째 여행 중이라는,
나올 땐 백인이었는데 이제 점점 황인종이 되어간다는,
그래도 여전히 뽀얀, 가늘고 긴 머리칼의 ‘그’와
점심을 함께 먹으며,
이리저리 겉도는 얘기들을 잔뜩 했습니다.--;
점심을 먹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서로에게 바이를 하고,
나는 나의 길을, 그는 그의 길을, 갔습니다.
나는 강변 쪽의 숙소를 쭉 둘러보았습니다.
하루 1500밧의 리버코너빠이,
히피 분위기가 물씬 나는 골든헛방갈로,
베란다에 삼각쿠션이 있는 아기자기한 방갈로 반빠이빌리지까지...
결론적으로, 나는 강변 숙소 찾기에 실패합니다.
현재 빠이 강가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습니다.
공사 때문에 모래는 다 파헤쳐 놓았고 불도저 한 대가 중간에 떡 하니 서 있습니다.
그렇게 오후 시간을 보내고,
딱 저녁을 먹을 타이밍에 또 한명의 한국분을 만납니다.
낫키친이라는 레스토랑을 지나는데,
오후에 얼핏 본 남자분이 식사 중입니다.
맞은편에 앉아서 같이 저녁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는데,
이분 이력이 잼 납니다.
빠이에 1년을 체류하면서 빠이 다큐를 찍은,
왕년에 영화 몇 개 엎고 다큐로 방향 전환을 했다는,
이번엔 휴식을 취하러 빠이에 왔다는,
네이티브 스피커.
이때부터 나는 그를 영화인이라고 부릅니다.
그에게 빠이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특히, 밤문화에 대해.
열시면 조용해지는 빠이,
그 이유는 모두가 잠들기 때문이 아니라,
모두 외곽에 위치한 ‘바’들로 순회를 가기 때문이라는 놀라운 사실.
그렇게...
나는 그와 함께 ‘비밥’에 가게 됩니다.
23시.
비밥의 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블루스 느낌의 질질 늘어지는 듯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있습니다.
귀를 쩡쩡 울리는 음향 시스템으로 옆 사람과의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치앙마이 짠순이 언니에게 살며시 전화를 걸어 ‘비밥’을 들려줍니다.
점점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정각 12시에 비밥이 환상적인 나이트 무대로 변신합니다.
무엇보다 휴그랜트 닮은 가수가 압권입니다.
하이네켄 첫 모금에...
아, 바로 이것이야...란 강한 느낌!
목구멍을 싸, 하고 훑고 지나가는 알코올의 감각.
생음악과 차가운 맥주는 나를 완전히 사로잡고 맙니다.
현지인들과 외국인들이 어울려 맘껏 춤추고 나니, 어느새 1시.
영화인과 나는 숙소로 돌아왔다가,
다시 아쉬워 비밥 옆 sayhi로 2차를 갑니다.
거기서 싱을 마시며 많은 얘기를 한 것 같은데...
기억이 잘...-_-;
빠이는...
정말 밤이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