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y Lim의 파키스탄 여행기 19편 아쇼카왕의 다르마라지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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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ky Lim의 파키스탄 여행기 19편 아쇼카왕의 다르마라지 카

Lucky 0 2240

나는 50대 중반으로 같이 여행을 다니던 막내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부득이 혼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일정은 2007년 7월 15일 출발하여 파키스탄의 라호르 - 라왈핀디 - 탁실라 - 칠라스 - 훈자를 거쳐 카라코롬 하이웨이를 타고 7월 27일 중국으로 출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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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나의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2007년 7월 21일

 

라왈핀디에서의 세째날 - 탁실라의 다르마라지카 - 아쇼카왕의 불심

 

 

돌아가는 길은 사실 멀고 지루한 길이 된다. 아무리 쿠나라스투파에서 내가 가진 짐을 덜어 놓고 왔다고 해도 옆구리에 끼고 있는 카메라와 기타 잡다한 것들이 들은 가방마저 무거워진다. 그러나 릭샤왈라는 설렁설렁 잘도 걸어간다. 빨리 다음 목적지로 가야하는 것이 왈라의 목표다. 사실 나는 이 릭샤왈라가 맞이한 손님 중에 꽤 귀찮은 손님에 속할지도 모른다. 어느 곳을 가도 무슬림인 그의 눈에는 하잘것없는 것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고 시간을 끌곤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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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샤왈라가 자기의 밭이 보이는 곳에 서 있다. 그런데 이 친구의 나이가 29살 이라니!





나는 쿠나라스투파에서 내려와서 정말 지치고 말았다. 점심을 못 먹은 데다. 날씨는 더워 음료수를 너무 많이 먹었다. 일어서 걸어갈 때는 두 다리가 교대로 움직이기는 하는데, 어디엔가 앉으면 팍 까불어지며 눞고 싶어지고, 누우면 잠들고 싶어진다. 탁실라 박물관 근처에 있는 유적지는 생략하고 ‘다르마라지카’로 가자고 했다. ‘아쇼카 왕’이 쌓았다는 탑이다.

‘아쇼카 왕’은 불교를 인도전역에 확장시킨 왕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자세히 알고 있다. 특히 탁실라는 ‘아쇼카 왕’이 왕자시절에 이곳으로 파견되어 직접 다스리던 땅으로 남다른 감회가 있을 곳이요, 자신이 사랑하는 왕자를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는 인도 여행 중에도 만난 적이 있다. 바로 사르나트에서 였다. 그러나 7세기에 이곳을 답사한 중국 현장스님(602∼664)의 <대당서역기>에 엄청난 위용으로 기록된 ‘아쇼카 왕’의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바라나시의 ‘자가트 싱’이란 관리에 의해 1794년 바라나시의 석재와 벽돌을 충당하기위해 헐려졌다. 당시 탑의 꼭대기에서 아래로 약 9m 되는 지점에 돌 상자가 하나 있었는데, 용기(用器) 안에는 뼛조각이 들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자가트 싱’의 무리들은 "부처님 유골일 가능성이 높은" ‘뼛조각은 갠지즈강에 떠내려 보냈고, 용기는 탑 터 근방에 버렸다.’라고 기록했다. 그래서 내가 사르나트에 갔을 때는 거대한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의 기단흔적만 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아쇼카 왕’이 세웠다는 ‘아쇼카 석주’가 부러진 채로 철책 안에서 보호받고 있었다.

 

그 위대하다는 부처님의 힘이, 그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듯이 소원을 빌어보라는 부처님의 힘이, 자신의 뼛조각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자기를 찬양하는 돌기둥마저도 철책으로 보호받아야 한다면 과연 부처님의 힘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또 파란 눈의 다른 종교를 가진 영국의 ‘커닝햄’이라는 사람이 ‘오 마이 갓!’을 외치며 ‘아쇼카 석주’를 파내준 덕분에 태양아래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인생무상뿐만 아니라 ‘종교에도 무상함’이 있음을 느낀다.

 

파키스탄의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를 찾아가는 길에는 잠시 배고픔도 잊을 만큼 긴장되고 바빴다. 넓게 그리고 잘 포장된 길은 산으로 올라가는데, 마주 내려오는 관광객은 하나도 없었다. 다르마라지카는 어디에선가 눈에 뜨일듯한데 주변으로는 있음직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드디어 릭샤가 작은 나무아래 서고, 왈라는 나보고 작은 개울을 건너 낮은 언덕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작은 개울에는 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는데 왜 그런지 여기가 먼 이국땅 파키스탄이란 것을 깜빡 잊어버렸다. 정말 우리나라 농촌의 유월정도 되는 풍경이었다. 오솔길 같은 계단을 올라가는데 위쪽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나타나 ‘월컴’이라고 소리 지르지 않았다면 나의 이런 생각은 좀 더 이어졌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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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올라가게 되면 보이는 다르마라지카 전경. 앞에 있는 돌 무더기가 아쇼카왕의 ‘다르마라지카’이며 그 뒤쪽으로 사원구역이 있다.





높지 않은 언덕 위에는 회색 펀자브를 입은 건장한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가 입장권을 검사하러 나타난 관리인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입장권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이 여기를 안내해 주겠다고 다르마라지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그 사람의 영어를 알아들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가 관리인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나의 달콤한 환상을 깨트린 것에 대해 화가 났다. 그래서 사실 있으면 편리할 수도 있는 그의 가이드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사람은 잠시 머뭇하며 다시 시도하였지만 연이은 나의 거절에 이리 저리 구경하라고 하고는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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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를 제대로 짐작할 수 없는 ‘다르마라지카’ 탑을 둘러싸고 뛰쪽 사원구역까지 오솔길이 나 있었는데 안내판을 보니 순례코스였다.





사실 나는 잠시 뒤 후회했다. 그 사람에게 있어 오늘 내가 첫손님일지도 모른다. 그가 아무리 이상한 영어로 떠들어도 이심전심이랄까? 중요한 사항은 다 알아듣게 마련이다. 그리고 가이드가 있으면 중요한 것을 빠짐없이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유적을 보는 동선을 알게 된다. 사실 가이드비 몇 푼이야 비쌀 수도 있지만 우리식으로 계산하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내가 왜 그렇게 화가 났었는지 모르겠다.

 

가이드를 보내고 탑을 설명하는 안내판 앞에 섰다. 혼자 구경해야 하니 안내판을 좀 더 자세하게 봐야 한다. 그런데,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안내판에 서투르지만 한자가 쓰여 있는 것이다. 아니 쓰여 있다기보다는 그려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안내판의 아래쪽에는 일본어로 설명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우리 불교인들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해 준 것이 백제라는 고대의 우리나라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사실 부여의 백마강변에는 ‘불교전래사은비(佛敎傳來謝恩碑)’라는 일본 불교종단이 세운 비석도 있다. 또 전라도 어디엔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왕인박사가 태어난 고장에는 일본인들의 참배순례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 그러면 무엇인가? 지금 그 불교를 세계화 시키고 있는 나라는 어디인가? 부처님의 성지마다 절을 세우고 불공을 드리고 있는 경쟁에서 우리는 일본에 얼마만큼 앞서고 있는가? 인도에서 그렇듯이, 중국에서 그렇듯이, 무엇이든지 크게 꽃이 피면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인 학자 나라대 ‘야스아키’교수는 이런 주장을 했다.

 

불교가 처음 신선한 교리와 행동으로 민중의 호응을 얻고 세력을 얻었지만 점점 왕족이나 귀족들의 비호(庇護)를 받으며 그들의 근면하고 신선한 맛이 떨어졌다. 정작 그들을 필요로 하는 일반인들과는 멀어지며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학문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교(敎)가 어쩌고 선(禪)이어쩌고 하는 중에 학문을 뒷받침하는 광장으로서의 사원과 인재를 잃게 되고 결국 존재의 실체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중들이 절에서 학문연구에 몰두하고, 자기들끼리의 지적유희(知的遊戱)에 빠져있는 사이 대중들은 불교에 등 돌리고 타 종교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 지금도 불교방송을 켜 보면 정말 많이 아는 박식(博識)한 중들이 저마다 잘났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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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마라지카’에는 이와 같이 탑에 바짝 붙거나, 또는 탑의 기단부를 파고 들어간 유적의 흔적이 있다. 왜 이런일이 일어났느지는 알 수 없다.





사실 인도에서 그렇게 세력을 떨치던 불교도 자기들끼리의 지적유희에 빠지게 되고, 대중들과 사이가 벌어지면서 대중들은 힌두교나 새로운 세력을 떨치던 이슬람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한때 민중종교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포용력을 가지고, 민족의 산신령과 조왕신(竈王神)마저도 포옹했던 불교가 지금은 어떤가? 중들만의 종교로 대중과 멀어지는 사이 기독교가 얼마나 그 세(勢)를 불렸던가? 기독교의 전파를 미군의 초콜릿 때문이라고 떠넘기기에는 너무 낯간지러운 것이 아닌가? 불교인구의 감소는 대중적 지지가 없는, 대중의 생활에 지침이나 도움을 주는데 인색했던 ‘학문적 불교’의 예정된 말로였다고나 할까.

 

지금 여기서 나는 한국 불교의 미래와 일본 불교의 미래를 천리안같이 볼 수 있었다. 일본불교의 미래는 있어도, 한국불교의 미래는 없다.

 

탁실라의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는 거대한 모습이 마치 인도(印度) 사르나트의 ‘디맥 스투파’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디맥’은 불완전하지만 복원된 모양이고, 이것은 중간까지만 복원되고 벽돌 같은 돌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인터넷 정보에는 직경 33m, 높이 13.7m라고 -불교신문 - 되어있는데 현지의 안내판과 숫자가 다르다. 영문 안내판에는 지름이 131피트 남아있는 높이는 45피트라고 쓰여 있고, 일본어 안내판에는 직경이 50미터 높이는 15미터라고 되어있다. 사실 그 크기가 뭐 그리 중요한가 단지 숫자일 뿐인데. 안내판에는 서기 40년에 지진으로 무너진 적이 있어 다시 복원하면서 처음의 규모보다 확장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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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마라지카 옆에 테라코다로 만들어진 탑. 줄리안 유적에서 본 탑과 같은 스타일인데 크기가 더 크다. 답은 파괴되어 기단부에서부터 몇층만 남아있어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데, 비를 막기위한 보호지붕을 낮게 만들어서 왜소해 보인다. 앞에 가이드하겠다고 한 파키스타니가 있다.





탑 주변으로는 작은 탑들과 승방건물들의 유지가 흩어져 있고, 석탑이 아닌 테라코타로 만들어진 탑과 불상들이 흩어져 있다. 테라코타로 만든 불상들은 대부분 파괴되어 온전한 모습을 한 것을 별로 없고, 그나마 문화재적 가치나,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것은 박물관으로 옮겼다고 안내되어있다. 그중에는 탁실라 박물관에서 이미 보고 온 것도 있지만 페샤와르 박물관이나 멀리 라호르 박물관까지 간 것도 있다. 일본인들은 이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를 구경의 입장이 아니라 참배의 입장으로 오는지, 안내판에는 참배로가 그려져 있고, 7주 14주 108주를 하라고 방법도 기록해 놓고 있다.

 

탑 뒤쪽으로는 커다란 승원이 있다. 승원은 익히 다른 곳에서 본 것과 같은 모양으로 되어있어 ㅁ 자 모양으로 폐쇄적인 공간을 마련하고 가운데 사각형의 마당 - 과연 이곳이 마당인지 연못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 을 중심으로 개인의 승방을 둘러놓은 형식이다. 너무 피곤하여 승원은 자세히 보지 않고 그냥 한번 눈길만 주고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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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코다로 만들어진 탑 기단부에 조성된 조각상들. 많이 파괴되어 그 정체를 정확하게 짐작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모습을 하고있는 상과,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는 상들이 섞여있다.





내가 오솔길로 연결되는 계단으로 가는데 어딘 선가 아까 가이드를 자청했던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를 본 내 소감을 물어왔다. 나는 ‘립 서비스’로 좋은 말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왔던 것에 비해 유적이 너무 정비되어 있지 않아서 실망했다고 말해 주었더니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실망한 눈빛으로 돌아갔다. - 가 아니라 그냥 돌아갔다. 사실 그는 내가 이 유적에 감동을 먹고 안 먹고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아주 감동적이었다 하면 그 감동을 돈으로 계산하여 약간의 팁을 달라고 할 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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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코타 탑의 기단부분 조각상의 하나. 명상에 잠긴 붓다와 협시보살의 모습인듯한데, 붓다의 머리는 없어지고, 협시보살들은 파괴되었다. 누구라도 이 조각이 놓여야할 자리가 여기가 아닌것을 알 수 있다. 탑이 매우 조잡하게 복원되었음을 알 수 있고, 아쇼카왕의 유적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무성의 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이 유적은 파키스탄에서는 가장 확실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불교유적이다. 그러나 파키스탄인 들에게는 한낱 옛날의 유물일 뿐 한국이나 일본인들이 느끼는 것만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안내판에 써 놓은 것과 같이 붓다라고 하는 사람의 ‘뼛조각과 숯’을 넣고 묻었다고 하는 스투파일 뿐이다. 한국이나 일본의 불교신자들이 느끼는 것과 같은 신앙(信仰)심이 아니다. 그래서 참배로는 정비되지 않고, 조금만 벗어나면 풀이 우거지고 물이 고여 있다. 그들은 관리할 뿐이다. 그리고 그 관리는 좀 게으를 수도 있는 것이다.

 

릭샤왈라에게 탁실라 삼거리로 가서 라왈핀디 가는 버스 타는 곳에서 내려 달라고 하고 50루피를 더 주었다. 바로 버스를 타고 자리를 잡고 앉으니 피곤한 몸에 잠이 몰려왔다. 별로 먹은 것도 없어서 배도 고팠는데 배고픔보다도 졸려움이 먼저인가보다. 혹시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치면 안 되기 때문에 참으며 졸며 하다 보니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아마 빨리 도착한 것이 아니라 잠들었었기 때문에 시간을 느끼지 못했으리라.







* 다음은 라왈핀디를 떠나 칠라스로 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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