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y Lim의 파키스탄 여행기 18편 쿠나라 스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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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ky Lim의 파키스탄 여행기 18편 쿠나라 스투파

Lucky 0 2763

나는 50대 중반으로 같이 여행을 다니던 막내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부득이 혼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일정은 2007년 7월 15일 출발하여 파키스탄의 라호르 - 라왈핀디 - 탁실라 - 칠라스 - 훈자를 거쳐 카라코롬 하이웨이를 타고 7월 27일 중국으로 출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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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나의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2007년 7월 21일

 

라왈핀디에서의 세째날 - 탁실라의 쿠나라 스투파.

아쇼카왕의 장님 왕자 쿠나라의 사랑의 확인 쿠나라 스투파

 

 

‘쿠나라 스투파’는 언덕위에 있었다. 그러나 언덕 아래서는 보이지 않는다. 처음에 몇 층의 높이로 지어졌는지 모르나 지금 현재 남아있는 것은 3층 정도이며 그 위는 허물어져 흙더미로 쌓여있다. 물론 탑의 내부에 어떤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고, 흙더미라고 했던 부분은 실은 돌무더기다. 머리만한 크기의 깨어진 돌무더기인데, 그 모양은 일정하지 않다. 또 어떤 이유에서인지 탑의 가운데 부분에는 구덩이가 파여진 듯 움푹 파여 있다. 언제 이런 모양이 되었는지 알 수 없는데 이 탑의 유래를 안다면 탑 속에 무엇이 있을까 호기심이 나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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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나라 스투파





‘쿠나라 스투파’에 관한 이야기는 ‘임현담’씨의 책에 잘 소개가 되어있어 그것을 인용해본다

 

 구나라(鳩那羅)는 쿠나라의 한역으로 [아육왕경(阿育王經)]의 4번째 <구나라인연품(鳩那羅因緣品)>에는 탁실라에 파견되기 전후의 왕자의 비극이 기록되어 있다.

 

 아쇼카 아들 쿠나라의 존재는 소설이나 우화가 아닌 역사적 진실이다. 한 번 바라본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반하고야마는 매우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한다. 쿠나라는 본디 인도의 새 이름으로 히말라야에서 하얀 눈을 먹고 산다는 아름다운 전설적인 새다. 왕자의 눈이 마치 쿠나라라는 새의 눈과 같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왕자는 아름답게 성장했다. 당시 아쇼카에게는 많은 왕비가 있었다. 그 중 가장 나이가 어린 ‘티샤라크시타’는 어느 날부터 쿠나라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다. 그녀는 쿠나라에게 접근했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하자 증오심이 솟아 복수를 맹세하였다. ‘티샤라크시타’는 한역으로는 미사락기다(微沙落起多)다.

 변방에 자리 잡은 탁실라는 늘 골칫거리였다. 다시 반란이 일어나자 아쇼카는 군대를 파견해야만 했다. 이 때 앙심을 품은 티샤라크시타가 나서 ‘탁실라는 중요한 지역이기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가야한다’고 간언하여 쿠나라를 천거했다. 어린 왕비 티샤라크시타는 ‘탁실라 주민들의 맹렬한 반항으로 쿠나라가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내심 쾌재를 불렀으나, 웬걸, 탁실라 주민들은 아버지 아쇼카 시절처럼 쿠나라를 열렬히 환영했다.

 탁실라 주민들은 괴물에 가까운 얼굴의 아버지 아쇼카와, 정반대로 자비로운 눈만 바라만 보아도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그의 아들 쿠나라에게는 무조건 항복한 것이다. 쿠나라는 역시 아버지 뒤를 이어 무혈입성 후에 탁실라에서 아버지의 명을 따라 통치를 시작했다.

 티샤라크시타는 다시 음모를 꾸몄다.

 무서운 일이다. 오뉴월에 서리도 이런 서리가 없으니 전생으로부터의 기막힌 악연이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었으리라.

 당시 대왕의 칙서에는 아쇼카 자신의 치아 자국이 있어야 했다. 방대한 제국을 통치하자니 공문서 위조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리라. 티샤라크시타는 (책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른 방법이 나온다) 가짜 공문서를 만들어 아쇼카를 잠재운 후 치아자국을 받아내어 탁실라로 보낸다. 문서 내용은 왕자의 두 눈을 빼버리라는 것.

 탁실라 관리들은 경악했다. 그런데 아쇼카의 옥쇄에 다름 아닌 치흔(齒痕)이 선명한 문서가 아닌가.

상대는 무시무시한 야쇼카다!

거부할 수 없다!

 모두들 눈물을 흘리는 사이에 형장에서 왕자의 아름다운 두 눈은 뽑혀지고 말았다.

 왕자는 두 눈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탄했다.

 “이렇게 조그마한 살덩어리 두 점, 이것이 그동안 바깥을 볼 수 있도록 만들었구나. 두 눈을 나의 모든 것이라 생각했던 어리석음이여. 모든 것은 물거품과 같으며, 모든 것은 실체가 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아니더냐. 나는 이제 눈이 없이 확고부동한 지혜의 눈을 얻으리라.”

 아버지처럼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아들은 만뜨라를 외우며, 이제 한 손에는 평소 자신이 즐겨 연주하던 악기 비파를,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사랑하는 아내 칸차나마라의 팔을 잡고 왕성을 떠났다. 한때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왕궁을 보살피던 왕자는 냉혹한 부왕이 자신을 버린 것으로 생각하고 이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몸을 끌고 저잣거리로 나섰다.

 슬프다. 영원한 것은 없다.

그 아름다운 눈은 사라지고, 부귀영화도 한 순간이 아니었더냐.

 세월이 흘렀다. 사람들이 보시하는 음식으로 생명을 유지하며 떠돌던 이 두 사람의 걸음은 어느덧 수도의 왕궁성벽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쿠나라는 이른 새벽, 성벽에 기대어 비파를 뜯으며 노래를 불렀다.

 아직 잠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아쇼카에게 문득 귀에 익은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들어왔던 목소리다! 마치 내 사랑하는 아들 쿠나라 목소리 같구나! 탁실라의 내 아들은 잘 있을까!”

 아쇼카는 신하를 불러 노래꾼을 불러오도록 했다.

 불려온 노래꾼을 본 그는 마른하늘에 벼락을 맞은 듯 전율했다. 저토록 험하고 더럽기 짝이 없는 거지꼴을 하고 있는 거지 두 사람은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 쿠나라와 며느리가 아닌가!

 더구나 그렇게 아름다운 두 눈은 사라지고 장님이라니!

 이것이 도대체 꿈인가, 생시인가. 인도전역을 통치하는 마우리아 왕이 사랑하는 아들, 그것도 왕위를 이어받을 첫째 아들이 어찌 저렇게 되었다더냐!

 부자는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은 왕은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어린 왕비 티샤라크시타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라 명했다. 우선 똑같이 두 눈을 뽑아내고 손톱 발톱을 모조리 뽑은 후에 온몸을 찢으라 외쳤다.

 그러나 그 명령을 제일 먼저 막아선 것은 이미 소경이 된 아들 쿠나라였다.

 그는 자신이 장님이 된 후 소중함을 더 많이 얻었음을 이야기했다.

 “어머니가 나의 눈을 빼앗아 갔으나 대신 저는 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마음의 눈이 생겨 세상을 더 잘 보게 되었으니 부디 어머니를 용서해 주십시오.”

 

 여기까지 거의 역사적 진실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여기에 전설이 덧붙여진다. 본래 드라마틱한 사연 뒤에는 미화가 일어난다.

 왕자가 어머니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나니 해가 뜨면서 두 눈이 돌아왔다는 이야기, 왕자가 ‘이것이 생김으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을 없애면 저것이 소멸한다’는 십이연기(十二緣起)를 설하고 이에 감동 받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이 눈물로 왕자의 눈을 씻으니 두 눈이 돋아나왔다, 등등 다양한 후일담이 나타났다.

 쿠나라 탑은 이런 이야기를 바탕으로 쿠나라의 눈을 제거한 탁실라에 세워졌다.

 

이것이 임현담씨의 책에 기록된 ‘쿠나라 스투파’의 내력이다. 나도 사실 ‘쿠나라’이야기를 임현담씨의 책에서 읽었다. 그러면서 불교의 전륜성왕으로서, 곳곳에 다르마라지카를 세운 아쇼카왕이 사랑하는 아들의 슬픈 사연의 바탕위에 세운 ‘쿠나라 스투파’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또 이 탑을 보고 싶은 것은 많은 장님들이 찾아와 소원을 빌고 눈을 뜨고 돌아갔다는 심청전 같은 이야기를 믿어서도 아니다. 단지 모든 것을 버리는 무소유(無所有)의 실천으로 마음의 짐이 아니라 ‘원한(怨恨)’까지 버린 극단의 무소유를 실천한 ‘쿠나라’의 실체를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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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쿠나라 스투파. 크기가 카메라 한 필름에 담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부터 바로 탑(塔)인지, 아니면 기단부인지, 세밀한 부조(浮彫)는 찾아볼 수 없다.





‘쿠나라 스투파’는 아쇼카왕의 작품답게 엄청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다. 최초의 높이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남아있는 1층의 규모만 봐도 한 변의 길이가 약 20미터가량 된다. 현재 남아있는 석재는 3층 정도다. 너무 커서 탑의 규모를 일별하기 어려울 정도며, 탑을 한 바퀴 도는데도 시간이 걸릴 정도다.

 

탑의 전면에 해당하는 부분에 계단이 마련되어있어 그곳을 통하여 탑으로 올라갈 수 있다. 탑의 윗부분은 모양을 짐작할 수 없게 파손되어 있다. 그래도 이 탑을 발굴 조사한 사람들은 탑의 규모나 형태를 알 수 있게 기록으로 남겼을 텐데, 내가 지식과 정보가 모자라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탑을 관찰한 결과를 써보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순전한 나의 추측일 뿐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내 지식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이 탑은 세워져 있는 위치부터가 절묘한 감이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쇼카왕이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여 세운 ‘다르마라지카’가 있다. 내가 직접 걸어가 확인하지 못했으니 얼마만한 거리가 떨어져 있는지 확인해 줄 수는 없고, 눈에 빤히 보이는 것도 아니니 짐작할 수도 없지만 ‘가이드 북’등에 소개하기를

 

“다르마라지카에서 파키스탄의 시골길을 걸어 시르캅 까지 30분이 걸린다. 시간이 충분한 여행자라면 한번 도전해 볼만 하고 그 값어치도 있다.”

 

라고 안내되어있다. 앞에 ‘시르캅 유적’이 빤히 보이니 여기에서 ‘아쇼카왕의 탑’ 까지는 2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닐까 생각된다. 단지 ‘아쇼카왕의 탑’이 있음직 한 방향으로 큰 산이 앞을 막고 있으니 그 모양은 볼 수 없지만 아마 저 산 너머 어디엔가 탑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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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나라 스투파, 사각형의 기단위에 지금은 약간 뒤쪽으로 치우쳐진 위치에 원형 스투파의 흔적이 남아있다.





‘쿠나라 스투파’가 있는 곳을 지금은 ‘쿠나라 힐’이라고 부른다. 앞으로 보이는 북쪽 방향에는 시르캅 유적이 펼쳐져 있고 서쪽으로는 탁실라 시내가 산안개 속에 잠겨있다. 높이는 20-30미터밖에 안되지만 부근에서는 북남서 방향이 모두 훤하게 보이는 시원한 장소다. 아마 ‘아쇼카’는 아들을 위한 탑을 아들이 다스리던 땅이 모두 보이는 장소에 세우기 위해 무척 신경을 쓴 것 같다.

 

쿠나라 언덕에 단(壇)을 쌓고, 그 단은 아마 처음에는 5층 정도 되었을 것 같다. 그 단위에 탑을 세웠을 것 같다. 그 탑의 모양은 ‘아쇼카’ 시대에 쌓여진 거대한 탑의 원형인 ‘다르마라지카’를 닮았을 것이다. 이것이 초기 탑의 원형이었고, 초기 탑은 아마 ‘시바링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지도 모르니 그런 모양의 탑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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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나라 스투파의 기단석, 마모된 정도로 보아서는 초기의 기단석 같아 보인다.





그래서 세워진 ‘쿠나라 탑’의 모양은 5층의 높직한 방형기단(方形基壇)위에 시바링가모양의 탑이 쌓여있는 형태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사람들은 계단을 통해 기단을 올라가 탑에 가까이 갈 수 있고 예배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내가 1층으로 보고 있는 이것은 탑신의 일부가 아니라 기단(基壇)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런 추측이 부합(符合)되지 않는 것은 ‘쿠나라 탑’ 위에 남아있는 돌무더기가 탑의 중심부에 남아있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나도 모르겠다. 과거의 흔적위에 새로운 돌을 가져다 복원하는 과정에서 대탑의 흔적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었는지 모른다.

 

쿠나라 언덕만도 전망 좋은 시원한 위치다. 시르캅 유적에서부터 쿠나라 언덕을 오르기까지 흘린 땀을 한번에 보상해 주는 위치건만, 탑위에 올라서니 그 몇 미터의 차이가 또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일망무제 가릴 것이 없어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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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나라 스투파 옆의 강원유적





탑의 왼쪽(서쪽)으로는 또 다른 유적의 흔적이 있다. 커다란 승원의 모습이다. 유구(遺構)의 흔적으로는 방형(方形)의 커다란 마당을 가운데 두고, 승방이 빙 둘러 세워져 있는 사각형의 승원(僧院)이다. 그런데 방과 방 사이의 담이 상식과는 거리가 멀게 두꺼워서 군사적 요새(要塞)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생긴 모양은 전형적인 당시의 승원의 모습인데다, 방의 모퉁이 같은 곳에는 등잔(燈盞)을 넣었던 것 같은 벽감(壁龕)도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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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나라 스투파 옆의 강원유적. 벽의 두께 등으로 보아 마치 요새(要塞)를 방불케 하지만, 전형적인 강원유적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강원(講院)이라면 큰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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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유적에 남아있는 벽감. 등잔을 넣었던 곳인듯 윗 부분은 검은색으로 오염되어 있다.





또한 마당의 가운데 원형으로 무너진 돌무지가 놓여있다. 이 돌무지가 어떠한 것을 상징하는지, 아니면 발굴 중에 나온 돌들을 마당 가운데 쌓아 놓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마당이 운동장(運動場)이 아니라 연못이었다는 기록을 보았으니 또 다른 의구심에 파묻힐 수밖에 없다.

 

아마 우리 식으로 생각한다면, ‘아쇼카’는 ‘쿠나라 스투파’를 세우고, 그 옆에 승원을 세웠을 것이다. 그래야 맞을 테니까. 세월이 흐르며 스투파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며 승원의 규모도 커졌을 것이다. 그러기에 쿠나라 언덕을 오르는 길 군데군데에 언젠가 사용했었을지 모르는 다듬어진 석재가 흩어져 있음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왔으니 돌아가자. 이제 그렇게 보고 싶었던 ‘쿠나라 스투파’를 보았으니, 모든 것을 남겨두고 돌아가자, 만약 아직도 내가 가지고온 것에 미련이 있어 주섬주섬 챙긴다면, 더운 날씨에 먼 길을 걸어 시르캅 유적을 지나 릭샤까지 가기도 힘든 길이 될 것이다.

 


*다음은 다르마라지 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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