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y Lim의 파키스탄 여행기 16편 파필란과 잔디알 템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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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ky Lim의 파키스탄 여행기 16편 파필란과 잔디알 템플

Lucky 0 2106

나는 50대 중반으로 같이 여행을 다니던 막내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부득이 혼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일정은 2007년 7월 15일 출발하여 파키스탄의 라호르 - 라왈핀디 - 탁실라 - 칠라스 - 훈자를 거쳐 카라코롬 하이웨이를 타고 7월 27일 중국으로 출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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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나의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2007년 7월 21일

 

라왈핀디에서의 세째날 - 혜초스님도 다녀간 탁실라의 파필란 유적과 잔디알 템플

 

 

파필란 유적

 

‘졸리안’을 내려오며 은근히 아까의 매점 주인을 의식하고 조금 걱정을 했다. 무엇을 사라고 붙잡아 놓고 구경을 하라하면 난감(難堪)할 것 같았다. 특히 아까 새로운 물건을 준비해 놓겠다고 까지 했었으니까. 그런데 무엇이 바쁜지 보이지 않는다. 잠깐 어디에 갔는지, 아니면 정말 물건을 가지러 갔는지. 릭샤꾼을 재촉해서 도망치듯 졸리안 주차장을 빠져 나왔다.

 

아까 올라온 길을 되짚어 내려가는데, 문득 길가에 ‘파필란(pipplan)’이란 입간판이 보인다. 무엇인가 물어보니 불교유적인데 파손이 많이 되어서 특별하게 볼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큰 도로에서 멀지 않다고 하기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입구는 비포장이나 자동차 한대가 편안하게 갈 수 있는 넓이로 길은 잘 닦여져 있다. 간밤에 비가 왔는지 도랑물이 넘쳐흘렀다. 조심스레 뚝뚝을 몰아 유네스코 문화유산임을 알리는 입간판 앞에 섰는데 정말 특별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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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필란 유적의 무너진 석탑 유구. 흔적으로만 보면 파필란도 꽤 큰 사원유적이다.





앞쪽으로 서너 개의 석탑의 유구(遺構)가 파손된 채로 수습되어 있고, 뒤쪽으로는 승려들의 공간이었던 승원(절집)이 남아있다. 그러나 의외로 승원의 규모가 큰 것으로 보아, 현재 눈에 보이는 유적은 실제 유적의 일부분만 발굴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승원 안쪽으로 아주 커다란 회전(回轉)바퀴 같은 것이 뒹굴고 있는데, 내 눈으로는 ‘연자방아’의 한 부분으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만약 내 생각이 맞는다면 이 승원(僧院)에 머무르던 승려의 수가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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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물의 정체가 무엇일까? 연자방아 같기도 한데 아닌것 같기도 하고.





헐어진 담 사이로 해서 안쪽으로 들어가니 몇 개의 구획이 나누어 져 있는데, 대강의 구조도 짐작할 수 없어 무턱대고 여기저기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한군데 방에 이르니 방 안에 부서진 석탑이 한기 서 있었다. 처음에 몇 층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둥근 몸체에 3층 정도 되지 않았을까 짐작을 한다. 그 보다 높다면 실내에 위치하기가 어려웠을 테니. 탑을 이루던 조각들은 모두 없어지고, 돌을 쌓아올린 뼈대가 앙상하게 보이는데, 그래도 군데군데 회(灰)칠을 했던 흔적이 남아 희게 비친다. 그러나 누가 그랬을까? 이 으슥한 방안은 화장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정말 ‘파필란’의 유일한 볼거리인 것 같아 자세하게 관찰해 보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릭샤꾼이 ‘덴져러스~’한 곳이라며 따라와 조심하라고 일러준다. 릭샤를 타고 다시 탁실라 뮤지엄 방향으로 내려가는데 중간에 갈림길이 있는 곳에 제법 사람도 있고, 오가는 자동차들도 있다. 가게 앞에 릭샤를 세우고 무언가 요기할 것이 없을까 하고 들어갔다. 상점이라고 해야 그 수준을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의 노점상 수준을 따라가려해도 한참은 걸릴 것이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도무지 집을 만한 것이 없다. 인터넷 누구의 기행문에서는 가게가 오밀조밀 어쩌고저쩌고 사진까지 찍었다고 하는데, 내 눈높이가 아직도 높은 것인가? 할 수 없이 음료수 한 병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까 졸리안에서 점심을 먹었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의 기행문에서도 ‘졸리안에서 밖에는 먹을 곳이 없다. 그러나 졸리안은 비싸다. 음식을 싸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라고 충고하고 있다. 그러나 졸리안에서 매점 주인의 물건사라는 것이 귀찮아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바람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더니 배가 고프다. 어디까지 참으며 가야할까?

 

 

가장 멋있는 잔디알 템플(Jandial temple).

 

큰 도로에서 우회전 하여 시골길을 달리던 릭샤는 어느 언덕 아래에 선다. 언덕위에 유적이 있으니 올라가 보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고서 자기가 성큼성큼 앞서 가는데, ‘참 기특한 녀석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언덕 위 풀밭에 대여섯 명의 동네 사람들이 나와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그 사이에 가서 넙죽 앉는다. 따로 인사하거나 하는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바로 자기네 동네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안내고 설명이고 없이 딴청을 하여 혼자 유적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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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언덕위의 ‘잔디알 템플(Jandial temple)’ 유구를 발굴해 최근에 복원한 듯 앞쪽으로 계단길의 흔적이 남아있다.





‘잔디알 템플(Jandial temple)’은 이름부터가 무언가 다르다. 유적지의 이름은 누가 지었을까? 물론 과거에서부터 내려오던 명칭을 사용했겠지만 거기에도 아주 작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 작은 차이는 그 유적을 발견, 발굴, 수습, 보고의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 부분에선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아시아 유적의 많은 부분이 서양인의 손에 의해서 발굴 수습되게 됨에 따라서 그들의 입김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아주 가슴 아픈 예로 경주의 금관 중 ‘서봉총(瑞鳳冢)출토’라는 이름이 붙은 금관이 있다. 금관 장식에 상서로운 새인 봉황(鳳凰)이 있어 봉(鳳)이 들어간 것은 그렇다. 이 금관을 당시 일본을 방문하였던 ‘스웨덴 황태자 쿠스타프’보고 마지막 구덩이를 파고 금관을 들어내게 시키고는, 스웨덴의 ‘서(瑞)’라는 글자를 넣어 지은 이름이다. 아마 그 황태자가 물색없이 금관을 가져가겠다고 떼쓰지 않았는지 몰라. - 사실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쿠스타프 황태자는 이것저것 관심이 많았고, 특히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

 

그건 그렇고 왜 그들은 ‘잔디알’에만 ‘템플’이라는 명칭을 넣었을까? 다른 유적의 이름에는 그 유적의 성질(性質)을 적어 놓은 곳이 없다. ‘졸리안’ ‘파필란’ ‘모라모라두’ ‘시르캅’ 모두 달랑 이름만 써 놓다가 ‘잔디알’에 와서만 ‘템플(temple)이라고 성격(性格)까지 규정해 놓은 것은 왜일까?

 

‘잔디알’은 약 10미터 정도 될까 하는 언덕위에 있다. 언덕이라고 하지만 주변이 모두 평지이고, 산(山)이 달려온 맥(脈)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언덕은 자연의 언덕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잔디알’을 짓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토대(土臺)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원의 정면에 해당하는 방향에는 진입로가 있다. 경사진 곳에는 계단이 있고, - 이 계단을 과거 계단의 유구(遺構)를 찾아서 복원해 놓은 것이라고 믿는다면 - 계단을 올라선 곳에서 약 30미터 전방까지 마치 우리나라 왕릉(王陵)의 신도(神道)와 같이 길의 흔적을 발굴해 놓았다. 지금은 돌멩이로 경계만 나타내고 있지만, 아마도 옛날에는 이 안쪽에 박석(薄石)을 깔아 완벽한 길을 만들어 놓지 않았을까?

 

‘잔디알’의 남아있는 유적은 사원(寺院)유적이라고 하기 보다는 하나의 성채(城砦)같은 느낌이다. 사방을 뺑돌아 높다란 벽을 쌓아 현재 복원되어 있는 것만도 6미터는 넘는 것 같다. 그 뚜께 또한 1미터는 넘을 것 같았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 벽에서 4-5미터 정도 물러나 또 한 개의 담이 있으니 이중 담이었던 것이다. 왜 그런지 외부인은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것이다.

 

‘잔디알’은 정면의 문(門) 외에는 들어갈 곳이 없다. 그리고 안쪽의 구조도 단순해서 정방형의 공간이 텅 빈 채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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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알 템플 정면에 늘어서 있는 석물들,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데 이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잔디알의 정체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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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알 템플’ 앞에있는 석물의 확대사진. 이것이 무엇이었을까? 기둥의 흔적은 아닐까?





 

아마도 중앙에 탑을 쌓았는데, 탑은 무너지고 흩어져 그 흔적을 알 수 없게 된 것인지. 은밀한 지성소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마져 사라졌는지, 도대체 무엇을 보호하기 위해 이렇게 완벽한 건물을 지었는지 짐작할 수 없다. 이 탑인지, 아니면 이 탑 위에 있었던 무엇인지, 아니면 이 탑을 모시고 있던 어떤 특별한 승려인지…….

 

뒤쪽으로 돌아가면 몇 개의 나누어진 공간이 나오는데 이곳이 승려들의 생활공간이었던 것 같다. 앞쪽에서 바로 올 수는 없고, 뒤로 돌아와야지만 입구가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앞과는 다른 별도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원의 뒤로 가니 바로 언덕이 끝난다. 확실히 이 언덕은 자연의 언덕이 아니라, ‘잔디알’을 짓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토대(土臺)가 맞는다고 하겠다.

 

다시 ‘잔디알’의 정면으로 와서 자세하게 관찰하면 아주 조금이지만 앞마당에 층(層)이 나누어 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그 높이가 아주 낮아서 특별하게 의미를 두기 어렵지만, 그곳에는 앞줄에 두 개, 뒷줄에 세 개, 도합 다섯 개의 석조물이 있다. 오랜 세월 흙속에 들어있던 것을 발굴해 놓은 듯 석조물에 연결된 유구(遺構)도 드러나 있다.

 

유구와 석조물의 위치를 자세히 관찰하면 이것은 주춧돌임을 알 수 있다. 그 위에 이상한 모양의 석물들을 올려놓아 자칫 탑이나 아니면 조각상의 대좌(臺座)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주춧돌 위에 올려놓아진 석물들은 처음 이 석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를 때 주변에서 발견되는 석물들을 대강 꿰어 맞춘 것이 불과하다.

 

부근의 입간판에는 ‘잔디알’은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파키스탄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그리스씩 신전(神殿)이다.’ ‘BC2세기경에 세워졌으며 중앙 탑의 높이는 45피트’라고 쓰여 있다.

 

‘잔디알’의 유적을 발굴하던 사람들은 여기에서 발견되는 문화의 파편들이 탁실라 특유의 것과는 다른 이질적인 것임을 알아 차렸던 것이다. 발굴을 하면 할수록 그들은 ‘그리스의 신전’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이곳의 명칭에 ‘템플(Temple)’이라는 명칭을 넣었고, 그 의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사원(寺院)’의 의미가 아니라 ‘신전(神殿)’이란 뜻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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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알 템플’ 유적 안에서 본 모습 벽체의 두께로 가늠해 건축물의 높이와 지붕의 무게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다섯 개의 주춧돌이 변형된 것은, 그 위에 올라간 것을 자세하게 관찰하면 ‘도리아식’기둥의 부재(部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드는 것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그 위에 올라가 있던 거대한 기둥을 찾아내는 것이다.

 

몇 사람의 기행문을 보는 가운데 잔디알 사원을 ‘조로아스터교의 유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잔디알’ 유적에서 확실하게 조로아스터교와의 연관성을 찾을 만한 단서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잔디알’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판에서도 ‘기원전 2세기에 세워진 그리스의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는, 파키스탄 유일의 유적이며 남아있는 높이만도 45피트에 이른다. 서기 44년 시르캅을 찾은 페르시아 왕을 영접했던 장소다.’라는 정도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페르시아 왕이 이곳을 찾은 이유를 유추해 보면 굳이 조로아스터교와의 연관을 부정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하여튼 지금 현재 조로아스터교와의 연관을 가진 단서는 찾지 못했지만 다시 방문한다면 시간을 같고 찾아볼 흥미는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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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알은 주 신전 밖으로 회랑이 있었던것 같은 이중의 구조로 되어있고. 이 회랑길을 통하여 뒤쪽 공간으로 갈 수 있다.




 

*다음은 시르캅 유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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