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y Lim의 파키스탄 여행기 15편 졸리안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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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ky Lim의 파키스탄 여행기 15편 졸리안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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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50대 중반으로 같이 여행을 다니던 막내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부득이 혼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일정은 2007년 7월 15일 출발하여 파키스탄의 라호르 - 라왈핀디 - 탁실라 - 칠라스 - 훈자를 거쳐 카라코롬 하이웨이를 타고 7월 27일 중국으로 출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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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나의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2007년 7월 21일

  라왈핀디에서의 세째날 - 혜초스님도 다녀간 탁실라의 졸리안 유적





‘어디부터 갈까?’하는 녀석에게, 탁실라 유적을 다 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니 중요한 것 몇 가지를 추려서 소개하는데, 꼭 가야할 곳은 ‘쿠나라 스투파’니 그곳은 빼지 말라고 했다. 그랬더니 녀석 갑자기 목소리가 커진다.

 

“쿠나라 스투파 걱정 말아라. 당신 정말 나를 잘 선택했다. 쿠나라 스투파를 아는 녀석은 몇 안 된다. 아까 그녀석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쿠나라 스투파 데려갈 수 있다. 걱정 말아라.”

 

녀석! 유적 지도를 보면 다 아는데 뭐 그렇게 혼자서 안다고 호들갑을 떠는지. 지금 세상 정보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네가 아니라도 나 혼자라도 지도를 보고 찾아갈 수 있다. 이미 ‘구굴어스’를 통해 탁실라 유적의 위치사진을 다 보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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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안유적에서 처음 만나는 탑(塔). 테라코타로 만들어 수많은 감실군상을 붙였는데 그 오랜 세월을 견딘것이 놀랍다.






첫 번째로 간 곳은 유적지 지도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졸리안(,jaulian-이것을 졸리안이라고 읽어 기행문이나 가이드북에 써 놓았다. 파키스타니의 발음을 듣고 들어도 잘 모르겠다. 우리식으로 읽는다면, ‘자울리안’이 더 맞지 않을까?) ‘졸리안’은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가 샛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간 뒤에 있다. 도로변에는 파키스타니의 삶이 그대로 묻어있어 그들의 삶의 수준과 방법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이 구차하다는 것은 그들 보다 나은 삶을 가지고 비교해서이고, 그들로서는 행복하고 안락한 삶일 수 있다.

 

유적으로 가는 샛길로 접어드니 인적이 없다. 간혹 관광객을 태운 릭샤가 지나갈 만도 하건마는 한 대의 릭샤도 지나치지 못한 것은 내가 매우 이른 시간에 움직이는 손님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참을 들어간 끝에 제법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는 곳에 도착했다. 큰 나무 아래 한가한 릭샤가 그늘을 차지하고 있다. 그 옆에 릭샤를 대니 릭샤안에 몸을 구부려 누워있던 릭샤꾼이 일어나 반갑게 맞이한다. ‘너 한건 올렸구나, 축하한다. 오늘은 공치지 않았으니.’ 뭐 이런 소리를 주고받겠지.

 

문을 열기 시작하는 매점에서 음료수를 주문하고 잠시 숨을 돌렸다. 왜 그런지 무엇이 그렇게 바빴는지 아침에 ‘파퓰러 인’을 나와서부터 잠시도 쉬지 못한 것 같다. 아니 사실은 그렇게 바쁘게 움직인 것은 아닌데 이제는 내 몸이 지쳐가는 중인지 조금만 움직여도 체력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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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코타 답에 부조된 석가고행상. 라호르 뮤지엄의 사실적인 모습도 있지만 졸리안 유적에는 이런 고행상이 여럿 눈에 뜨이는 것으로 보아 희귀한 모습은 아닌 듯






사실 파퓰러 인에서 나와 탁실라 삼거리에 내려서부터 릭샤꾼들과 신경전 벌이면서 싸우느라 마음의 안정도 없었고, 천천히 생각하고 행동할 여유도 없었다. 박물관에 들어와서도 다른 사람들 오기 전에 사진을 찍으려고 얼마나 바삐 움직였는가? 더군다나 성능이 떨어지는 카메라를 달래가며 혹시 모를 실수를 예방하기 위해 한 작품을 두 번씩 찍었으니 얼마나 바쁘게 움직였는가. 게다가 박물관을 나와서는 릭샤꾼들 싸움에 끼어서 쉬지도 못하고 바로 릭샤를 타고 출발하게 되었으니 숨 가쁜 일정이었다.

 

릭샤꾼하고 음료수를 마시며 서투른 영어로 이야기를 하니 첫마디가 ‘아까 그놈은 아주 위험한 놈이다.’라고 하는데 표정이 ‘당신 그놈 따라 갔으면 큰일 날 뻔 했다.’한다. 물론 나도 그런 놈은 나쁜 놈 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다. 터무니없이 싼 가격으로 관광객을 유인한 후 폭행을 하던지 여의치 않으면 소지품을 가지고 도망갈 놈이다. - 특히 파키스탄이라면 - 아! 왜 이럴까 파키스탄은 이슬람 국가로서 무슬림의 윤리에 ‘여행자를 성심껏 도와주어라’ 하는 것이 있어 이방인에게 매우 친절하고 잘 도와준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나는 파키스타니들은 ‘못 믿을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으니, 내가 잘못된 것인가? 변해가는 일부 파키스타니를 탓해야 하는가? - 특히 여럿이 같이하는 여행이라면 숫적으로 유리할 텐데, 나 같은 소수의 여행자라면 어떤 경우에서라도 불리하다. 물론 내가 피치 못하게 그런 릭샤꾼을 만났다면 또 다른 준비를 차렸을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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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샤운전수,





릭샤꾼은 이 동네 사람으로 태어나서부터 이 고장을 떠나본 적이 없다고 한다. 결혼도 해서 아이도 있다고 한다. 더 돈을 모아서 택시를 사려고 한다는데, 나이가 몇 살인가 물어 보고 나는 그만 기절해 죽는 줄 알았다.

 

파키스타니 특유의 검은 피부색에 다부진 것 같지만 크지 않은 몸에 약간은 우수(憂愁)가 깃들은 듯 한 눈을 가진 대머리의 사나이를 나는 40-50대로 보았다. 솔직히 나보다 나이가 많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외국인의 나이란 참 알아맞히기 힘들다. 그래도 그렇지 스물아홉이라니(29)! 세상에나, 가족의 모든 힘들고 괴로운 짐을 혼자 지고 살았던가 보다.

 

이번에는 릭샤꾼이 내 나이를 알아듣고는 까무러쳐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쉰여섯(56)이라고 하자 자기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서로의 나이를 알고는 세상에는 엄청난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앉아 쉬려니까 매점 주인이 물건을 내놓기 시작한다. 이것저것 주섬주섬 내놓으면서 기념품을 사라고 한다. 내가 웃으면서 거절하니 기념품의 수준이 낮아서 그런 것으로 빨리 알아차린다. 그리고는 ‘당신은 뭔가 아는 사람 같다. 내가 어렵게 구입한 오리지널을 보여 주겠다.’며 정말 은밀한 곳에서 대강 그러나 소중하게 포장한 - 대체로 신문지를 여러 겹 겹쳐서 싸놓으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 중요한 물건을 보여준다. 그것은 흙도 묻어있고, 세월의 흔적이 이곳저곳에 덕지덕지 뭍어있는 조그만 불상이다. 불상의 모양, 상태, 그리고 주인의 태도 등으로 보아 ‘혹시 내가 이곳에서 뜻하지 않게 대박을 건지는 게 아닌가?’라고 행운의 여신을 떠올리게 할 만한 물건이다.

 

나는 이제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매점 주인이 물건을 꺼내기 시작했으니 주위에서 눈치만 보던 떠돌이 장사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할 것이다. 웃으면서 신문지 꾸러미를 도로 들여미니 모름지기 장사를 하려면 이 매점 주인같이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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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사방을 장식하고 있는 조각상. 감실에 좌선중인 붓다와 좡우에 있는 것은 천왕(天王)인듯. 옷 주름의 흐름이 간다라식의 특징을 보여주고있다





“당신은 정말 전문가구나! 그렇다면 당신이 좀 봐 주었으면 하는 물건이 있다. 찾아낸 지 얼마 되지 않는 것인데, 다른 곳에 보관하고 있다. 내가 연락해서 가져다 놀 테니까 줄리안 구경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 잠깐 들려 평가를 해 다오. 내가 차(tea)를 준비해 놓겠다.”

“그래 내려오는 길에 보자.”

 

물론 이것도 모조품이거나 아무 가치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산 것이 중요한 진품이라면, 공항에서 압류당할 것이고, 공항을 무사히 통과한다면 그것은 아무 가치도 없는 모조품이다. 그러니 어떤 이유에서라도 물건을 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아직도 여정이 짱짱하게 남아있어 짐을 1그람이라도 줄여야 한다.

 

줄리안 유적은 산을 조금 올라가야 한다. 산등성이를 중심으로 만들진 유적으로 ‘줄리안 스투파’와 그 주변의 강원(講院) 유적이다. 그 옛날 이곳에 몇 천 명이 거주하는 강원 - 이것을 무엇이라고 풀어야 할까? 이곳을 제대로 발굴하기 시작해서 이름을 붙이고 발굴보고서를 내기 시작한 사람들은 거의다가 서양인이다. 그들은 그들의 정서에 맞게 이름을 붙였는데 그것은 발굴의 성과에 따라 이름을 붙인 곳도 있고, 발굴해 가는 도중 편의상 붙인 곳도 있다. 이 강원(講院)이란 이름은 서양인들이 기독교의 수도원(修道院)을 생각하고 지은 이름이다. 이곳에서 많은 새내기 스님들이 모여 도를 닦으며 교리를 공부하고, 나이 많은 스님들은 이제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 서방정토에 갈 때를 준비하며, 오고가는 스님들과 신도들이 잠시 묵었다 갈 수 있는 곳. 성격상 이런 곳인데 여기를 뭐라고 불러야 옳을까? 그냥 강원(講院)이라고 부를까? 아니면 수도원(修道院)이라고 부를까? 사실 그럴 것 없이 이런 곳이 바로 ‘절집’인 것이다. 우리의 옛 ‘절’은 바로 이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산길은 가파르나 지그재그로 계단을 내어서 경사도는 심하지 않다. 오르는 중간에 수로를 만나게 되는데 많은 물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을 보아 이 부근에 아주 중요한 물 공급원이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오름길 중간,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에 의지해서 두세 사람이 서 있다가 입장료를 받는다. 무료하게 앉아있던 20대의 파키스타니가 릭샤꾼에게 말을 붙이면서 슬쩍 따라와 붙는다. 인터넷 정보에서 익히 보아온 가이드다. 많은 정보에 ‘이들은 원하지 않아도 졸졸 쫓아오며 몇 마디 거들고 나중에 가이드비를 요구하거나 또는 눈치를 본다’고 했다. 나도 예외 없이 이들의 표적이 되는 것은 당연하겠지, 과연 어떻게 할까 순간적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인터넷 정보의 충고대로 확실하게 가이드가 필요 없음을 고지(告知)할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사람들처럼 우물쭈물 처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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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곡선을 따라 흐르는 옷, 간다라 불상의 특징을 잘 가지고있는 두 부처님상은 아쉽게도 머리가 없다. 줄리안 유적의 불상중 머리부분이 파괴된 것이 많다.





“너 왜 쫓아오니?”

“나는 가이드다. 가이드가 없으면 구경하기 힘들다. 유물들은 철장 안에 있다. 열쇄가 있어야 한다.”

 

사실 유물은 철망을 친 안에 들어있다. 그리고 문은 열쇄로 잠가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동네사람들이 문화유적을 훔쳐다 파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관광객이 가면 문을 열어 주어야 한다. 입장료를 냈으니까. 이것 때문에 가이드를 고용할 필요는 없다. 아니 자세히 보면 이들이 가이드해주는 것은 입장료에 포함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이드를 해 주려면 자세하게 잘 해주어야 한다. 나는 책과 인터넷 정보로 ‘졸리안’유적에 대해서 많이 조사하고 왔다. 엉터리는 안 된다. 그리고 내가 몹시 피곤하니 이 가방을 들어 달라.”

 

혼자 와서 이들이 없이는 움직이기가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또 이들은 마지막에 손을 벌릴 것이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확실하게 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지고 다니던 작은 손가방과 물병을 들고 오라고 시키고 카메라만 들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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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안 유적에서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 붓다상인지 원본은 탁실라 박물관에 있고 이것은 복제품이다. 머리나 귀의 모양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수인이 단조롭다.





줄리안에 남아있는 유적들은 크게는 ‘강당유적’들과 불탑과 불상 등 ‘신앙유적’들이다. 강당유적은 졸리안 자체가 커다란 사원으로 교육과 지역사회의 중심으로 있었으니 그 면적이 매우 넓었을 것인데, 눈에 들어오는 유적은 크기를 짐작할 수 없다. 산지(山地) 유적이라서 전모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볼 수 없어서 그런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남아있는 유적의 석재들이 생각보다 많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고, 석재의 색깔만 보아가지고서는 그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역시 졸리안 유적에 정통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지만 원래의 유적과 복원한 부분을 구분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먼저 입구에서 올라가면 작은 정원이 나온다. 정원이라고 표현했지만 승원(僧院)의 공간이기 때문에 이렇게 했을 뿐 실상은 작은 마당이다. 왼쪽으로 담을 따라 가면 문이 있고 그 문이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아마 우리 사찰건축에 불이문(不二門)에 해당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앞으로는 아주 어쩡하고 흉악한 건물이 있는데 이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여기가 신앙의 공간으로 일반 신도들이 기도를 드리던 곳이다. 그곳을 언제 만들었는지 마치 닭장 같은 철망으로 빙 둘러 쳐 놓았다. 그리고 지붕을 해 놓았다. 이렇게 해 놓은 의도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비(雨)를 막아 유적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다. 그러나 그 모습이 너무 열악하다. 이 유적은 모두 ‘탁실라 유적군’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진정 유네스코가 보호하고 싶은 유산이라면 이렇게 해 두어서야 되겠는가? 파키스탄에 의존하기 보다는 유네스코가 나서서 제대로 된 보호각을 지었어야 옳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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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실라 졸리안 유적 중앙스투파. 사각형 기단에 원형 탑신이 올라가는데 전체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쉽다. 이런 모습은 시르캅에서 볼 수 있다. 빈틈없이 부조(浮彫)가 새겨져있다.





가이드는 열쇄를 꺼내 엉성하게 만든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한다. 그곳에는 내가 처음 보는 불상과 불탑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재료는 모두 진흙(테라코타), 소위 소조(塑造)의 불상과 불탑들이다. 소조(塑造)의 유물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보관되어 왔을까? ‘졸리안’이 파괴된 이후 - 졸리안 유적이 언제 파괴되었을까?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일단 짐작해 보면 무슬림 세력이 본격적으로 세를 키우던 8세기 이후에는 ‘졸리안’의 세(勢)가 그렇게 자라지는 못했을 것이고, 인도 전역이 무슬림화의 길을 걷게 되는 11세기 이후까지 졸리안이 남아 있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적어도 1000년의 세월은 방치되었을 텐데.

 

그리고 진흙으로 만든 탑에는 감실(龕室)을 파고 불상을 모셨다. 이 모든 것이 진흙으로 만든 그대로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또 낮은 온도라도 소성(燒成)작업이 있었는지도 의문이었다. 만약 화기(火氣)를 가하지 않은 그대로라면 비와 바람에 매우 취약할 텐데, 그 옛날부터 비를 피하기 위한 보호각이 있었다면 그 크기와 모양은 어떠했을까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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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의 능력이 있다는 붓다상. 배꼽 부분의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기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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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실라 뮤지엄에 소장된 치료의 능력이 있는 붓다상. 이러한 붓다상도 유행된듯 하다.





 

‘졸리안’의 신앙유적은 중심부에 단을 쌓고 그 중앙에 중심 스투파를 모셨다. 그러나 중심 스투파는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게 되어있다. 아마도 중심스투파의 대부분은 파괴된 것 같았다. 그래서 위치를 마련하고 흔적을 복원해 놓은 것에 그친 듯하다. 스투파의 둘레대로라면 지금 보호각은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중심 스투파의 둘레에는 크고 작은 스투파들이 난립(亂立)해 있는 형태로 있다. 그리고 어느 하나도 온전한 모습으로 있는 것은 없고, 모두 파손된 잔재들만 남아있다. 어느 것은 2층 정도만, 또 어느 것은 한 3~4층 정도 남아있다. 또 어느 것에는 정성스레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붓다와 보살을 안치시켰는가 하면 어느 것은 감실이 없이 덧대어져 있는 상(像)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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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투파를 받치고 있는 여러 군상들.





스투파 아래에는 스투파를 짊어지고 있는 온갖 군상들이 있다. 코끼리 사자 호랑이등 짐승에서부터 정확하게 알아 볼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 사람 모양의 악귀(惡鬼)도 있다. 이들이 어떤 이유에서 스투파를 바치고 있게 되었는지, 또 즐거이 하는 행동인지, 괴로운 행동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중에는 우리나라 한옥건축의 들보를 받치고 있는 장사의 모습을 한 형태도 보인다. 그러나 또 다른 스투파는 불상들을 빙 돌려서 장식해 놓은 것도 있다.

 

우리나라의 탑은 기초위에 장대석(長帶石)으로 탑의 범위를 정한다음 기단(基壇)을 마련하고 그 위에 탑신의 일층을 세운다. 그런데 지금 파키스탄에서 보고 있는 스투파는 그러한 것을 모두 생략하고 일층부터 세우고 있다. 이것은 탑을 만든 재료가 다르고, 또한 풍토(風土)가 다르기 때문에 그러한 것 같다. 이 스투파는 필연적으로 실내에 위치해야 하기 때문에 비와 바람으로부터 보호받을 준비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또 어느 감실에 앉아 있는 붓다상은 앙상하게 말라있다. 라호르 뮤지엄의 ‘석가고행상(釋迦苦行像)’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가이드도 그것을 ‘석가고행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렇게 신비하게 여기는 석가고행상이 여기 탁실라에서는 일상적인 석가상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중 라호르뮤지엄의 석가고행상은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표현하고 있는 수작(秀作)이지 특이한 모습의 석가상(釋迦像)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붓다상 중에는 배꼽 부분에 구멍이 있는 상(像)이 있다. 또 그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던 흔적이 까맣게 남아있다. 가이드가 나보고 그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보라고 한다. 조금은 찜찜하지만 - 혹시 가이드 비 안주면 손가락이 잘린다거나 하는 것 아닌가? - 조심스레 손가락을 넣어 보니 안쪽이 맨질맨질하다. 얼마나 많은 손가락이 들어왔었는지 느껴진다. 이것은 치료의 붓다상(healing Buddha)이라고 한다. 안내판에도 자세하게 쓰여 있다. 손가락을 넣고 간절하게 소원을 빌면 붓다의 힘으로 치료가 된다고 한다. 가이드는 그 아래에 녹아서 진흙 속으로 스며들어간 촛농 자국을 보여주며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한 힘에 참배객이 끊이지 않았고, 멀리 미얀마, 티벳, 중국, 그리고 일본에서도 찾아 왔다고 한다. - 그러나 이것이 과거의 일인지 아니면 ‘지금도’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중앙 스투파 근처의 붓다상들은 주변의 작은 스투파의 붓다상과는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우선 그 크기부터 달라질 뿐 아니라. 크기가 다르므로 두상(頭狀)의 상호도 제대로 구분할 수 있다. 그래서 탁실라 지역이 간다라 불상의 중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중간 중간에 빈자리들이 있고, 그 자라에 있던 유물은 이웃의 박물관으로 옮겨서 전시하고 있다는 팻말이 있다. 이곳을 먼저 보고 탁실라 뮤지엄을 보았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승려들이 생활하던 승원구역은 처음에 들어왔던 곳에서 앞쪽으로 보였던 출입문을 통해서 갈 수 있다. 장방형의 폐쇄된 공간으로 남북 97피트 동서 106피트의 크기에 26개의 구획된 공간(방 또는 사무실)이 있었고, 모두 흙바닥이다. - 설명서에서 - 일부는 승려들이 사용했고, 일부는 다른 용도로 사용했던 것 같다. 가운데는 정방형의 넓은 공간이 돌로 구획 지어져 있는데 마치 운동장 같이 생겼다. 즉 가운데 운동장을 중심으로 사방을 돌아가며 작은 방들이 있는 구조다. 출입문은 중앙을 향해 한개만 있다.

 

이 운동장인가 했던 구조는 안내문을 보니 연못(Water pond)이라고 되어있다. 즉 중앙에 연못을 두고 그 주변을 회랑으로 연결하고, 회랑에서 각 방으로 출입문을 만든 것이다. 이 연못은 무슨 연유에서 만든 것일까? 연못이 마치 지금의 수영장처럼 만들어진 것은 무슨 까닭일까? - 아주 연못으로 내려가는 계단도 만들어져 있다. - 그리고, 이 산상(山上)의 호수 어디에 어떤 장치를 해서 물을 마련했던 것일까? 여러 가지 수고를 끼쳐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아니면 그 당시 수도승들에게 물을 보며, 또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고요히 명상에 잠기는 뭐 그런 것이 유행하였었나?

 

이 수도원 구역의 한쪽 문을 나서면 그곳은 식당구역으로 되어있다. 식당과 부엌이 나누어져 있으며 밀가루를 빻았는지 맷돌 조각이 여러 개 있다. 또한 한쪽 벽으로는 우리의 장독 같은 토기가 땅속에 박혀 그 흔적을 보이고 있다. 특히 조리 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오수(汚水)를 처리할 수 있는 하수도 시설이 되어있는 것을 보고 나름대로 그들만의 발달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식당의 한쪽 벽 돌덩이에는 주먹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 있는데, 가이드 말이 ‘숟가락을 꼽아 두던 구멍’이라고 하는데 신빙성은 50%정도라고 할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이 식당 칸의 한쪽에 회의실(assembly)이라고 표시된 공간이 있다. 회의를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큰소리가 나오고 떠들고 시끄러운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수행의 공간에 회의실을 두지 않고 식당 칸으로 옮긴 것이 이 사람들의 합리적인 사고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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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안의 승원구역. 사진 가운데 차양이 있는 부분은 붓다상이 모셔져 있다.




 

긴 시간 ‘졸리안’을 구경했다. 가이드에게는 적당한 사례를 하였는데 특별나게 적다거나 하는 표시를 하지는 않았다. 릭샤 운전수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그를 의식해서 많이 줄 수도 없었다. 그러나 가이드는 정말 자기 유물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고마워서인지 열심히 보여주고 나름 설명해 주려고 했다. 또 어느 곳에선가 내가 사진을 찍고 일어나다 잠깐 ‘어찔 ~ ’하고 중심을 잃은 적이 있었다. 건강에 신경을 쓰며 다녔지만 체력이 떨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인데, 가이드는 나름 어디에선가 의자도 한개 구해와 앉게 해 주고, 부채질도 해 주고 같이 걱정해 주었다.

 





*다음은 파필란 유적과 잔디안 템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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