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y Lim의 파키스탄 여행기 7편 라호르 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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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ky Lim의 파키스탄 여행기 7편 라호르 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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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50대 중반으로 같이 여행을 다니던 막내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부득이 혼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일정은 2007년 7월 15일 출발하여 파키스탄의 라호르 - 라왈핀디 - 탁실라 - 칠라스 - 훈자를 거쳐 카라코롬 하이웨이를 타고 7월 27일 중국으로 출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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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나의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2007년 7월 17일

 

라호르에서의 둘째날 - 라호르 뮤지엄-1

 

 

 

라호르로 돌아오는 길

 

누르자한 톰을 나와 철길을 건넜다. 그러나 아침에 너무 편하게 ‘자항기르 톰’까지 왔기 때문에 돌아가는 길을 모르겠다. 내가 계획하고 찾아왔으면 지명이라든지 방향을 기억할 텐데. 할 수 없이 아침에 칭칭을 내린 곳에서 반대방향으로 가는 칭칭을 잡아타는 방법을 사용했다. 다행히도 빈자리가 있는 칭칭을 바로 탈 수 있었다. 어디로 가든지 간에 라호르로 가는 커다란 버스(22번 버스)가 있는 곳 까지 가면 되고, 그리 먼 거리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옆에 끼어 앉은 파키스타니가 내 행색을 살피더니 뭐라고 말을 건다.

 

“너 00 에 가는 것 맞지?”

“그래 나 거기 가는 것 맞아.”

“알았어! 거기 가면 내가 내리라고 알려 줄게”

 

그곳이 어디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파키스타니가 내 행색을 보고 말을 걸었다면 내가 라호르시내 어느 곳으로 간다고 짐작했을 것이다. 그곳이 어딘지 몰라도 외국인이 많이 가는 곳 일거다. 외국인이 많이 있다면 좀 더 안전할 것 같아서 였다.

 

칭칭은 아까 내가 22번 버스에서 내려 칭칭을 갈아탄 곳까지 금세 도착했다. 내릴까? 잠시 눈치를 보았는데 옆의 파키스타니는 전혀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좀 더 있기로 했다. 그랬더니 칭칭은 2-3차선의 넓이는 되나 차선은 그려져 있지 않은 파키스탄의 큰 도로로 들어간다. 거기에는 도로를 굴러다닐 수 있는 것은 모두 나와 다니는데 먼지 매연이 끔찍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는 칭칭의 뒤쪽에 앉았다. 뒤쪽에서 따라오는 차들이 속도가 느린 칭칭을 마구 밀어 붙인다. 그러면 칭칭은 도로 한쪽으로 밀려나지 않으려고 오기와 깡다구로 버틴다. 만약 도로 한쪽으로 밀려나면 그곳은 도로의 포장이 끝난 곳으로 웅덩이와 구덩이 쓰레기와 온갖 방해물들이 길을 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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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호르로 돌아오는 칭칭에서, 파키스탄 시외버스는 요란스럽게 치장되고 여러 가지 소리를 내며 달리는데 그 사이로 다른 칭칭들이 무섭게 달려든다. 도로의 공포를 한껏 느끼게 해 준다.





요란하고 화려하게 치장한 버스가 달려들 때는 쇠사슬이 부딪치는 철거덕 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린다. 게다가 크랙션소리 또한 나의 청각신경을 거의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제일 무서운 것은 뚝뚝-오토릭샤이다. 칭칭이나 오토릭샤나 내 눈에는 그게 그것일 정도로 무서운 탈것이다. 그러나 오토릭샤의 경쟁자가 칭칭인지 정말 무섭게 몰아붙인다. 얼마나 무서운지 오토릭샤의 앞바퀴가 내 발을 깔아 뭉갤까봐 피해야 할 정도로 달려들었다. 정말 머나먼 땅 파키스탄에서 칭칭 한번 탔다가 개죽음 당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보니 앞쪽의 사람이 내리는지 칭칭이 잠시 선다. 그때 보니 낯익은 장소다. 바로 어제 코리아나 민박집 사람들과 같이 왔던 파키스탄 미나르 공원 앞이 아닌가? 얼른 여기서 내리겠다고 신호를 했다. 옆에 있던 파키스타니가 거기는 조금 더 가야 한다고 만류했지만 나는 생각이 바뀌어 ‘파키스탄 미나르를 봐야 겠다’고 둘러대고 내렸다.

 

우선 땅을 밟으니 칭칭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잠시 이 황량한 장소에서 탈출해야 한다. 길을 건너서 릭샤를 잡았다. 그러나 누구나 다 알 것 같던 ‘라호르 뮤지엄(Lahore Museum)’을 안다는 사람을 만나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몇 명의 릭샤꾼을 잡고, “말 로드(Mall road)에 있는 '라호르 뮤지엄 가자.”고 해도 그곳이 어딘지 모르는 눈치를 보인다. 진짜일까? 아니면 뼁끼인가?

 

겨우 흥정을 해서 라호르 뮤지엄으로 갔다. 그런데 릭샤 운전수가 길 건너편에 세워준다. 그것도 뮤지엄을 조금못간 곳에서, 한발자국도 걷기가 싫었고, 일단 운임흥정을 한 상태에서 뮤지엄 건물을 보지 못하고 릭샤에서 내리면, 사실 여기가 라호르 뮤지엄 앞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안돼 라호르 뮤지엄 정문앞에 세워달란 말이야. 난 너를 믿을 수가 없어.”

 

계속 못 내리겠다고 버티면서 라호르 뮤지엄을 외쳤다. 그랬더니 릭샤 운전수가 길을 건너가 차를 세운다. 마침 그곳에 경찰이 있었다.

 

“폴리스 맨, 라호르 뮤지엄이 어디 있냐? 이 릭샤 운전수가 라호르 뮤지엄을 가기로 하고 여기서 내리라 한다.”

 

사정 이야기를 들은 경찰은 릭샤 운전수 편을 든다.

 

“뮤지엄은 바로 요기다 가깝다. 뮤지엄 앞에 세우자면 한참 돌아가야 하니까 여기다 내려 준 거다. 조금 걸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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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호르 뮤지엄. 붉은색의 돔을 얻은 아담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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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호르 뮤지엄 길건너에 있는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펀잡대학’ 많은 외국인이 이 건물을 라호르 뮤지엄으로 착각한다.





할 수없이 릭샤를 내려 차비를 계산해 주고 걸어갔다. 진짜 걸으니까 얼마 되지 않았다. 11시 50분에 박물관 앞에 도착했다. 박물관에 들어가기 전 물이 필요할 것 같았다. 박물관 밖으로 나가 한참 걸어도 물 파는 사람이 없다. 할 수없이 길거리표 쥬스를 한잔 들이키고 일단 갈증을 달랬다. 그리고 다시 박물관으로 돌아오니 바로 그 옆에 물 파는 작은 가게가 있지 않은가!

 

라호르 박물관은 붉은 벽돌로 된 영국 빅토리아 양식의 2층 건물로서 고풍스러운 모습의 건물이다. 그러나 파키스탄 박물관 중 가장 오래되고 큰 규모라는 유명세만큼 큰 건물이 아니라서 관광객은 ‘이것이 정말 라호르 박물관이 맞는가?’라고 한번 의심을 한다. 그리고 길 건너편에 있는 웅장하고 큰 건물을 ‘저것이 라호르 박물관이 아닌가?’하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펀잡대학교 건물이다.

 

라호르 뮤지엄은 영국 식민지 시절인 1864년에 지어졌다 한다. 1층과 2층에 모두 8개의 전시실이 있다. 간다라시대의 불교 예술품, 이슬람 예술품, 힌두교, 쿠샨, 무굴제국, 시크교 등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시기별로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생활필수품과 무기, 의복, 장신구와 보석류 등도 잘 정돈되어 있는 꼭 봐 두어야 하는 박물관으로 소개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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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호르 박물관의 간판 유물 ‘고행하는 부처상’ 혈관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앙상한 가슴과, 움푹 들어간 눈, 그러나 그 속에 형형(炯炯)히 빛나는 안광(眼光). 고행중인 ‘싯달다’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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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고행상은 우리가 자주 접하지 못하던 형식이라 낮설지만 이미 파키스탄 지역에는 이러한 붓다의 고행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꽤 있었다.





라호르 박물관의 명성은 ‘고행(苦行)하는 부처상’으로 유명하다.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받아 간다라 지역에서 조성된 간다라 미술의 정수(精髓)로 상징되는 바짝 마른 그래서 뼈와 가죽만 남은 위에 불거져나온 핏줄이 하나하나 서있는 부처상이다. 2-4세기경에 제작되었으며 페샤와르 근처 시크릿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러 라호르 박물관으로 온다.

 

그러나 파키스탄 땅이 어떤 곳인가? 세계 4대 문명의 발생지인 인더스강 유역이 아닌가? 라호르 뮤지엄에는 모헨조다로나 하라파 유적에서 발굴된 인류문명 초기의 유물에서부터 알렉산더대왕의 침공시절 유물, 그리고 우리가 ‘간다라 예술’이라고 하는 불상들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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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없는 부처상 AD2. 신체의 곡선을 따라 흘러내린 옷깃, 간다라 예술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연대가 매우 올라가는 유물들은 거의 많은 부분들이 ‘토우’ 종류였다. 이것으로는 당시 생활 중 종교적인 부분만 짐작해 볼 수 있는 정도였다. 특징적인 것은 ‘흰색 황소’의 모습인데, 붉은색 칠이 묻어있는 것 등으로 유추해 보아 시바신앙의 대상인 ‘난디’의 모습이 아닌가 했다. 그렇다면 ‘아리안’족과 함께 들어온 것으로 생각되는 힌두교의 3신중 시바는 토착민으로 생각되는 ‘드리비다족’의 신이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많은 곳에서 시바는 드라비다족의 신화 속에서 ‘루트라’라는 신의 ‘아리안족’식 변형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대가 올라가면서 마제석기-갈아 만든 돌-등과 토기 등이 전시되어있는데 문명 초기의 토기는 없는지 물레를 사용해서 만든 토기들이 있다. 그 중에 ‘구멍을 낸 토기’라는 것이 몇 개 전시되어 있다. 토기의 지름은 그리 넓지 않아 10여 센티미터 정도 되는데 길이는 짧은 것에서부터 긴 것까지 다양하다. 이것이 무엇일까? 설명은 없이 이름만 쓰여 있는데 추측에 용수(strainer)가 아닌가 생각했다. 꼭하니 자신 있게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은 싸리나무나 대나무로 만든 용수(strainer)는 본적이 있지만 이렇게 토기로 만든 것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정성스레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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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호르 박물관의 전시품, 이것은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게다가 이것은 시대가 훨씬 후대에 ‘체스판’과 함께 멋진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그 뒤에 무엇인가 같이 놓여있는데, 박물관에서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인데 집에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면서 그것이 그물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물과 함께 있는 용수라? 그렇다면 생선을 발효시켜 ‘젖국’을 만들었을 때 그것을 걸러내는 도구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됐다.

 

만약 내 가설이 맞는다면 ‘파키스탄’사람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생선발효젖국 - 우리나라의 새우젓이나 까나리젓 같은 것 - 을 먹었다는 것이 된다. 우리만이 발효식품의 원조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뒤로 생활용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눈에 띄는 것으로는 인도 델리민속박물관에서 보았던 예쁜 샌들이 여기에도 전시되어 있었다.

 

홀에 걸려있는 옛날 영토를 회상하는 지도에는 간다라(GANDHARA)라고 쓰여 있고 지금의 인도와 네팔의 일부, 그리고 지금은 인도의 영토 속에 들어가 있는 파키스탄과의 국경지역을 라자스탄(RAJASTAN)이라고 따로 표기해 놓고 계속해서 그 옆으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지금은 중국이된 위그르지역까지 포함시켜 놓고 있었다.

 

“아- 영광이여 그 옛날의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또 신기한 것은 지금 갠지스강 하구지역에 있은 ‘방글라데시’영토의 일부는 제외하였고, ‘실론’까지 작은 글씨로 써 놓고서도 정작 ‘인도’라는 글자는 없었다. 감정싸움은….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 화려하게 꾸민 틀 속에 잘 정리된 불족석(佛足石)이 있다. 불족석(佛足石)은 부처님의 발자국을 상징하는 것으로,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약 500년 동안 불상(佛像)을 만들지 않던 시대에 신앙(信仰)의 대상이 되던 물건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것은 불교의 불족석(佛足石)이 아니라 자인교(JAIN)의 족석(足石)이다. 어쩐지 자인교구나 라고 생각하고 보니 네 쌍의 발자국이 돌아가며 새겨졌고, 그 사이에 자인교의 빗자루가 놓여 있다. 그러나 불교건 자인교건 정말 깨끗하고 아름답게 만든 수작(秀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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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玉)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자인교의 신상(神像). 아름다운 모습이나 19세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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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 듯 불족석인가 했던 자인교 교조 사리아트마람지의 족석, 불교와 자인교는 그 유물에 있어서 혼동을 일으킬만한 요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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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인교와 불교의 신상을 쉽게 구분할 수 있는 요령, 자인교의 신상은 모두 손과 발의 모습이 사진과 같다.

 

간다라식 불상들은 유럽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에, 움푹 들어간 눈과 솟아오른 코는 서양인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기 때문이다. 아주 낯선 파란 눈의 서양인이 승복(僧服)을 입고 있는 모양이다. 어느 것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상(神像)의 모습과 혼동을 일으킬 정도다. 아니 이 불상중의 하나를 슬그머니 그리스 신상들 사이에 가져다 놓아도 될 것이고, 반대로 이들 사이에 그리스 신상을 하나 가져다 세워놓는다고 해도 전혀 티 날 것이 없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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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헨조다로 유적에서 발굴된 토우들.

 

그러나 정말 간다라 사람들이 ‘싯달다 석가모니’의 얼굴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조각이란 새로운 세계를 알려준 ‘서양인(西洋人)’의 모습을 가지고 불상을 만들었을까? 이 박물관에 있는 수많은 ‘간다라식 불상’이 실제의 인도인이 아니라 유럽인을 모델로 한 것이란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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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라식 불상-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붓다의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기에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점이 있을 듯하다. 그것은 진실한 ‘싯달다 석가모니’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부족인 ‘샤키족’은 오리지널 인도 원주민의 자격을 가지고 있는 ‘드리비다족’일까? 아니면 ‘아리안 족’의 피가 섞인 모습일까? 아니면, 지금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앵글로색슨’계통의 모습일까? 어디에 석가모니의 모습이 자세하게 나와 있을까? 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석가모니의 모습은 신성화 신격화 된 모습이라서 이 논의에서는 제외되어야 한다.

 

어쩌면 내가 지금 라호르 박물관에서 보고 있는 이 모습의 불상(佛像)들이 진실한 제 모습인지도 모른다. 일본의 불상과 한국의 불상은 다르다. 판이하게 다르다고는 할 수 없어도 무엇인가 그 얼굴이 주는 느낌이 일본 불상은 우리의 얼굴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불상은 우리의 얼굴인 것이다.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삼존불을 봐도 그렇다.

 

그렇다면 불상은 ‘각각 자기의 얼굴을 조각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간다라의 불상을 보고 ‘그리스의 예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푸른 눈의 곱슬머리인 그리스인을 모델로 만들어졌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얼굴을 보고 만든 우리의 불상’만 본데서오는 우물 안 개구리식 발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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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의 신상. 시바와 파르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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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 신상 ‘하누만’ 힌두교의 신 중 하누만은 짐승으로서 신의 경지에 오른 유일한 신이다. 하누만의 왼쪽 위쪽으로 ‘브라흐마’의 신상이 보인다.




힌두교와 관계된 유물로는 여러 가지 신상이 있다. 힌두교의 삼신이 대부분이지만 그중에서도 ‘시바’와 ‘파르바티’가 같이 있는 신상(神像)이 특징적으로 많이 있다. 그리고 ‘파르바티’의 아바타인 ‘두르가’와 ‘깔리’가 있다. 인도 쪽에서는 ‘비쉬누’신과 ‘락쉬미’신 그리고 그의 아바타들도 많이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귀중한 보물중의 하나인 ‘아소카’왕의 석주위에 올라앉았던 세 마리의 사자상(獅子像)이 한 개 보관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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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쇼카왕의 석주위에 올라 있었던 세 마리의 사자상.





라호르 뮤지엄을 보고 중앙 로비로 나오니 시간이 3시가 넘었다. 박물관 하나 보는데 3시간이 조금 더 걸린 것이다. 라호르에서 크다고 하는 박물관 치고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할 수 없지만, 사실 우리의 박물관이나 서양의 박물관들이 평균이상으로 거대한 것이지 동남아나 서남아의 박물관은 그렇게 크지 않다.

 

게다가 박물관의 시설은 열악(劣惡)하다. ‘이것이 정말 인류에게 있어서 귀중한 보물이란 말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허술하게 꾸며져 있다. 영화에 나오는 서양의 도둑들이 물건을 훔치는 그런 박물관들과는 거리가 멀다. 좁고, 어둡고, 환기가 될 수 없는 건물에 에어컨은 처음부터 없었으니 지금도 있을 리가 없다. 몇 개 되지 않는 선풍기가 눅눅하고 칙칙한 공기를 뒤흔들어 놓는데 사후세계(死後世界)에 이런 곳이 있다면 박물관지옥(博物館地獄)이라고 이름을 붙여 불가마지옥 옆에 있을 거다.

 

입구 현관에 오른쪽으로 2개의 방이 수리 중으로 전시를 하고 있지 않았다. 언제 수리가 끝나서 전시가 재개될지, 이곳에 전시되어 있던 유물들은 어디에 있는지 안내판도 없었지만 탈진한 내 몸은 그것을 알아보거나 따져볼 기운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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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쇼카왕이 붓다의 사리를 분배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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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호르 뮤지엄의 중앙홀에 가장 소중하게 자리잡고 있는 사리탑. 탑의 허리 부분에 붓다의 일대기-자카타-가 조각되어 있는데 아주 뛰어난 솜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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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탑에 조각된 자카다중 붓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아내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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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카주라호 유적군에서 본 힌두교의 ‘까마-에로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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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를 조각해서 만든 소녀경배상

 

* 다음은 ‘와가보더의 해프닝 국기하기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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