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여행하는 법] 7. 치앙마이의 어느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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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여행하는 법] 7. 치앙마이의 어느 하루

피비 5 3887
2006년 6월 13일



월드컵 토고전이 있는 날.
동거녀는 아침에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것에 대해 기뻐했다.
지루한 하루가 조금 짧아졌다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5리터짜리 빈 물통을 들고 일밧 짜리 동전 몇 개를 챙겨 나간다.
콘도 건물 1층에 비치된 벤딩 머신에서 물을 뜨러 가는 것이다.



1밧을 넣으면 물 1리터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나는 동거녀가 먼저 그 일을 해치울까봐 항상 경계한다.



안타깝게도 이 벤딩 머신 외엔 치앙마이에서 날 사로잡는 일은 별로 없었다. 
 


치앙마이는 이름이 주는 어감으로 내가 상상한 곳과는 너무 다르다.
치앙마이... 왠지 코끼리가 숲길을 거니는 듯한 멋진 지명 아닌가.
하지만 코끼리는커녕 오토바이만 수두룩하고
숲길은 개뿔 더러운 물이 고인 해자라는 요상한 게 있다.



나는 물 좋고 공기 좋은 시골을 기대하고 왔는데
이곳은 운치 있는 대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 삼일 동안, 나는 매일 깟쑤언깨우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센탄백화점과 연결되어 있는 이 쇼핑몰은
미로처럼 복잡해서 나처럼 더듬이가 없는 사람들은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매일 가도 지겹지 않다.



아침 겸 점심으로 푸드코트를 이용하거나, 
시즐러 샐러드 바를 가거나, 
Pizza Company에서 피자를 시켜 나눠 먹으면...
비로소 깟쑤언깨우에서의 하루가 시작된다.



쇼핑몰을 둘러보다가 맘에 드는 물건은 주저 없이 산다.
이곳은 방콕에 비해 물가가 확실히 싸다.



타이 신발 브랜드 앳다(adda) 샌들을 하나 구입해 신고,
모토로라 구형 핸드폰을 사서 짜오프라야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생겼으니 비싼 로밍을 절대 해오지 말라고 알려주었다.
일단, 태국에 오면 비싸게 넘길 생각이었다.ㅋ



이렇게 쇼핑을 하다 슬슬 발이 아파오면,
유지방 함유율이 높아 거꾸로 들어도 쏟아지지 않는 ‘dairy queen’ 아이스크림 하나 물고
6층 영화관으로 올라간다.
영화 관람료는 불과 70밧. 싸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영화가 아닌 안마의자이다.
십밧을 넣으면 3분 동안 목과 등을 마사지해 주는 기특한 기계.



저녁은 주로 콘도 맞은편 거리에 있는 중국 음식점과
타이 음식 전문, 레몬트리를 번갈아 가며 갔다.



중국음식점에서 만둣국과 짜장면을 먹었는데,
만둣국은 소고기가 덩어리째 들어 있었고 짜장면은 연한 갈색이었는데 고소하니 맛있었다.



언제나 사람이 많은 레몬트리는 거의 모든 타이 음식들이 깔끔하니 맛이 있다.
팟타이는 30밧 정도로 저렴하다. 



동거녀와 양산을 나눠 쓰고 집을 나서는 나는
이제 누가 봐도 여행자가 아닌 교민이다.
아직 타페문 근처도 못 가봤다.



살짝 위기감이 밀려온다.
치앙마이에 왔는데 적어도 타페 거리는 한번 걸어봐야 되지 않겠는가.
타페라는 멋진 이름에 또 한번 속을지언정.



하지만 햇빛이 너무 뜨겁다.
우리는 교민답게 그냥 깟쑤언깨우 맞은편에 있는 도서관으로 갔다. 



지금 난 치앙마이 도서관에서 치앙마이 지역 신문을 읽고 있다.
동거녀는 40밧을 주고 이곳 연간이용권을 끊었다고 한다.
일주일 동안 책도 3권 빌릴 수 있단다. 



지역 신문에는 재미있는 기사들이 많이 있다.



신문 공지란에 뜬 태국 여자 사진.
더 이상 치앙마이 발레 교습소에서 일하지 않으니
이 여자가 저지르는 일에 대해 자신들은 더 이상 책임지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유럽 남자와 동거 중인 태국 여자가 학대를 견디다 못해
유럽 남자를 칼로 찔러 죽인 사건.



치앙마이의 팬더 추앙추앙과 린후이가 아기를 가지지 못하면
딴 나라에서 정자를 수입해 인공수정을 하게 된다는 기사.
내년까지 이 두 펜더가 힘을 잘 써야 된다는.



주위를 둘러보니 타이 꼬마들이 참 많았다.
저마다 책 한권씩 꺼내 와 의자에 앉아 읽고 있는데,
그 중 보이스카웃 옷을 입은 한 남자아이가
아랫입술을 이빨로 질겅질겅 씹으며 책을 읽고 있었다. 



영미 소설가, 존 업다이크는 자신의 딸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음악에 몰두해 있을 때의 모습을 보고
진한 감동을 받았으며, 
깨물고 씹는 행위는 이 세상을 능동적으로 사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세상이 나를 삼키는 게 아니라, 내가 세계를 씹어서 내 안으로 넣어 그것을 소화시키는 것.



그 꼬마가 아랫입술을 끊임없이 씹으면서 도달한 곳은
삼차원적인 인식으로는 거리를 잴 수 없는,
어쩌면 지금처럼 순수하게 몰두하고 열중하지 않으면
다시는 갈 수 없는 세계일 거다.



더운 오후, 치앙마이 도서관에서,
이마에 송송 땀이 맺힌 채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남자아이의 얼굴...



이것은 치앙마이에서 본 가장 예쁜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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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의 2 : 1 승리 후
동거녀는 베란다로 나가 ‘꺄악!!!!’ 소리를 질렀다.
긴 생머리의 아담한 그녀가
귀여운 성격이 아니라 무뚝뚝한 성격이라는 것도 의외였지만
이 역시도 예상 밖이었다.
낯가림이 심하다는 사람치곤 너무 대범한 행동이다.



두 번을 더 베란다로 나가 소리를 지르더니
결국 타이 경비원에게 주의를 들었다.

5 Comments
솜누스 2006.07.23 01:49  
  하하.......천천히 호흡하며 함께 거니는 느낌입니다......^^
삼천포 2006.07.23 12:46  
  저두 기대하고 치앙마이 갔는데,님 표현대로 운치있는
대도시더군요...단지...(겨우 이틀 묵은 주제에..평가씩이나..흐흐..)제대로 된 평가는 님처럼 오래오래 느리게
느껴 보고 나서 다음번에..ㅋ
그래도 담에 또 가고 싶은 느낌이었습니다....
정말가냐 2006.07.23 14:41  
  치앙마이...일주일씩 두 번 갔었습니다. 첫번째 치앙마이에서 처음 겪은 장대비(사흘동안내리 내렸습니다)와 맛있는 스파게티집이 너무 좋아 다시 찾아 갔었는데..두번째는 GH와 타페문 근처에서 항상 나를 맞아주는 바퀴벌레와 트레킹업소의 이상한 바가지 때문에 싫어져 버린 곳입니다.  그래도 좋은 기억이 많았던곳....님글때문데 다시 생각이 나는 군요..ㅎㅎㅎ
필리핀 2006.07.23 14:57  
  치앙마이 동거녀...
올 초에 끄라비 여행 중 만난 분 같은데,
태사랑 아이디가 가물가물하네요...

치앙마이에서 장기 체류할 때
해자를 따라 조깅하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너만좋아해 2015.09.01 16:31  
치앙마이는 태국 여행갔을때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에요~
태국 현지에서 살고있는 한국분을 우연히 만나서 이곳저곳 가기도 했고
뭔가 느린듯한 인상을 주어서 빡빡했던 일정중에 찾아온 휴식같은 곳이었던 것 같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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