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여행하는 법] 3. 1분에 82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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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여행하는 법] 3. 1분에 820원

피비 8 3854
2006년 6월 8일



그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1분에 820원. 수신자 부담 통화.



어제... 싸얌에서 호텔리어와 나는 눈깔 사탕만한 다이아가 박힌 흰색 조리를 커플로 맞춰 신었다.
오후 3시. 태국의 자외선은 거의 살인적이어서
우리는 빅씨에서 쇼핑을 한 후
밀크플러스에서 우유를 시켜놓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했다.



DDM으로 돌아온 호텔리어와 나는 2층에서 마사지를 받았다.
나의 마사지사는 스무 살 꽃소년이었는데 끝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아챘다. 마사지실이 굉장히 어두웠기 때문에.
마사지 중간에 축축해진 그의 손길을 좀 더 느끼지 못한 것이 아쉽다. 



늦은 밤, 홍익인간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있던 24살을 냅다 집어 와 쩌허이로 향했다.
그곳에서 뿌빳퐁커리와 해물볶음밥, 마늘새우볶음을 시켜 하이네켄과 함께 술파티를 벌였다.



어젯밤 술자리는 유쾌했다.
호텔리어 26살과 띠동갑 남친 24살은 모두 거침없는 성격들이다.
나는 경조사를 굉장히 중요시 여겨
친구 큰아버지 장례식장까지 찾아가 밤을 새고 오는 26살과
예쁜 샌들이 사고 싶지만 띠동갑 남친이 고무로 된 한달 여행이면 밑창이 다 닳아 버리기에 딱 좋은 25밧짜리 조리를 사줄 거라며
귀엽게 투덜대는 24살의 모습들이 좋았다.



태국 도착한 지 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한국 음식을 찾기 시작한 26살도
쩌허이의 음식은 맛있다고 하였다.
뚝뚝을 잡아 카오산까지 뚝뚝료도 계산해 준 쩌허이 주인에게
감동 받았음은 또한 물론이다.



숙소로 돌아온 호텔리어는 아쉽다며 식당에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고
나는 슬그머니 카운터로 가 전화를 건다.



1분에 820원. 수신자 부담 통화.



지금은 DDM 도미토리 침대.
오늘은 몸이 노곤해서 아침부터 꼼짝도 못했다.
오전에 잠깐 홍익여행사에 치앙마이행 기차를 예약하러 갔는데
북부 쪽 비피해로 선로 공사 중이라 15일까지는 기차 운행이 중단된다는 말을 듣고
일단 그냥 돌아왔다.



호텔리어는 어젯밤 새벽 늦게까지 DDM 친구들과 맥주를 마셨다고 한다.
함께 있었던 꽃소년 마사지사에게 내가 잘생겼다고 말한 것을 전해주었단다. 



그녀는 탐마삿 대학을 혼자 찾아가본다며 나갔다. 기특하다.   



지금은 다시 파아팃 거리의 Coffee & More에서 레귤러커피 60밧짜리 시켜놓고
2시간째 시원한 에어컨 바람 맞으며 쉬고 있다. 
이곳은 데이트를 즐기는 럭셔리 현지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커피숍으로
카오산에 오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다.
지금은 국왕 60주년 행사 노란색 기념티를 입은 아줌마 아저씨들로 바글거린다.



자, 여기서 잠깐 생각을 정리해 보자.



양 옆으로 키 큰 나무들이 쭉 늘어서 있고
머리 위 나뭇잎들 사이로 햇빛이 반짝거리며 스며드는
숲 속 길을 두 사람이 걷고 있다.
마주 잡은 손으로 서로의 마음이 전해진다.
얼굴은 순하고 표정은 수줍다.
그렇게 완벽하게 서로를 사랑하는 그 순간에... 여자가 뒤를 돌아본다. 



멀어져 가는 풍경, 혼자서 몰래 딴 세상을 본 것 같은 알 수 없는 죄책감, 그리고 향수...



그 사람이 날 사랑해도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다.
내가 그를 무조건 사랑해도 그가 날 봐주지 않는다면 행복할 수 없다.
그가 날 사랑하고 나 역시 그를 사랑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그런 마음 때문에 두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 봐야 할 그 순간에
꼭 엉뚱한 곳을 쳐다보고 만다.



그래서 난 여기, 그는 저기에 있다.



사랑을 해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그건 상대방을 더 사랑할 수 있는 ‘포스’ 같은 거다.
‘더’ 사랑 받고 싶은 욕심 같은 거다. 



영화 러브레터의 와타나베 히로코는 남자친구가 묻혀 버린 산 속 산장에서 술을 마시며
죽은 그에게 무언가 더 원하는 게 있다고, ‘더’ 사랑받고 싶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여기에 있는 건데... 근데 나 채일지도 모르겠다.



항상 알 수 없는 말만 지껄이며,
사물의 이면을 본다며 늘 일면은 놓치고 마는,
밤에 좀 일찍 자라는 그 간단한 부탁도 들어주지 못하는... 


 
열시라면, 그는 회사 퇴근 후 사원 아파트 그의 방에서 요가를 하거나
일본어 초급을 공부하거나
웃찾사 상플 같은 오락프로를 박대리 등과 함께 시청 중일 것이다.



내 예상대로라면 퉁명을 가장한 다정한 목소리로
핀잔을 가장한 염려를 해줘야 한다.



혼자 가니까 너무 좋죠? 맛있는 거 챙겨 먹어요... 등...



현실은 줄기차게 울리는 신호음뿐.
그래도 뭐 괜찮다.
만약 차인다면 또 한번 배낭을 싸면 된다.
‘트래블팩 3종 세트’는 이 때문에 내가 구입한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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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열시. 그는 평상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 전화를 안 받은 이유는 내가 새벽 두시 넘어서 전화했기 때문이다.
여기가 자정이면 거긴 열시가 아니라 새벽 두시다.
그의 무응답의 수십 가지 이유를 생각해냈지만 정작 시차를 착각하고 마는 나의 어리석음.
난 이미 밝혔지만 이면엔 강하고 일면엔 약한 사람이다. 


8 Comments
이효균 2006.07.22 00:28  
  필력이 대단하싶니다 마치 한편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군요 ^^
JLo 2006.07.22 11:10  
  알게 모르게 카오산 정보가 많이 담겨 있네요^^
피비 2006.07.22 19:04  
  JLo님... 리플은 감동스러운데... 울집에서 같은 IP로 리플을 남기시면 곤란하오.--+
서기 2006.07.23 16:15  
  JLo님도 이면에 강하신 듯 ^^
JLo 2006.07.23 21:01  
  서기님 하하하하~
피비 2006.07.24 02:25  
  JLo님~ 오늘로 5박 6일째오. 언제 집에 돌아갈 거유? 낼 당장 6호선 끝자락 당신 집으로 가서 당당히 다른 IP로 내게 응답해주시오! 버럭!
아리잠 2006.08.08 16:56  
  사물의 이면을 본다며 늘 일면은 놓치고 마는 .....
current99 2006.09.03 12:50  
  하하하하 잼있어요
글솜씨가 감칠맛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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