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여행하는 법] 2. 호텔리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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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여행하는 법] 2. 호텔리어와 함께

피비 7 4231
2006년 6월 7일   



돈무앙 공항에 새벽 2시에 도착했다.
같이 온 일행들 모두 우루루 3층 출국장으로 갔다.



공항에 마중 나온 24살의 띠동갑 남친이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태국어로 흥정하는데
그 모습이 꼭 네이티브 스피커 같다.



방람푸에 도착, 소파에 너부러져 자고 있는 직원을 깨워 해피하우스에 첵인.
다시 오전 열시에 일어나 DDM에 첵인.



이 모든 것을 교은이와 함께 했다.



더러운 게스트하우스에서 자고, 열 시간이 넘는 장거리 여행자 버스를 타보고 싶다는 176cm 전직 호텔리어.



그 동안 빽빽하게 잘 짜여진 일정과 깨끗한 잠자리가 보장되는
팩키지 인생을 살아왔다는 그녀에겐 이번 태국 여행은 하나의 큰 모험이었다.
새벽 3시 방람푸 거리도, 각자 사연을 가진 범상치 않은 여행자들도,
오후 2시에 가면 못 먹는 십밧 라면까지도.



십밧 라면의 면만 다 건져 먹은 그녀는
마치 큰 고비를 하나 넘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전날부터 이어진 허기를 채우기엔 십밧 라면은... 그냥 십밧이었다.
에바항공 기내식에 전혀 손대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어제 밤부터 지금까지 계속 굶주린 상태였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싸얌 센터의 일식집 후지로 갔다.
그곳에서 벤토세트(210) 캘리포니아롤(220)을 배부르게 먹자니 행복한 포만감으로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그녀는 중국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끔찍하게 싫어해서
대만항공사인 에바항공의 기내식조차도 먹지 못한다고 한다.
왠지 납득이 안 간다.
먹지 못하는 것은 ‘몸’으로 바깥세상을 거부한다는 뜻인데,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싫어한다는 것인가.



아들을 잃은 노작가가 아들이 죽은 현실에서도
하얀 쌀밥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잘도 밀어 넣은 자신이
그만 역겨워져 속엣 것을 다 게워냈더니
그제야 스스로 편안함을 얻었다는 얘기가 문득 떠올랐다.



왜 중국을 싫어하냐는 내 질문에 자기를 비웃을 거라고 말하면서도
바로 얘기를 꺼내는 그녀.
적어도 그녀는 언어능력 부족을 자신의 신비한 매력인양 포장하는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녀는 솔직했고 나는 그 솔직함에 매료당했다. 



하지만 그녀가 들려준 이유는 아주 뜻밖의 것이었다.
 


유년의 어느날, 고모가 끓여준 라면을 먹던 어린 호텔리어는
무심코 티비에서 평강공주 무협 시리즈를 보았다.
아마 잘은 몰라도 시끄러운 중국어를 구사하는 중국 배우들이
피아노 줄을 몸에 감고 공중을 휭휭 날며 무공을 뽐내는 그런 얘기였지 않았을까.
그것을 보다가 갑자기 어린 소녀는 경기를 일으키며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 후, 그녀는 중국과 관련된 어떤 사소한 것만 접해도
어린 시절 자신의 몸 한 곳이 고장이 난 것 같은, 간질처럼 발작을 일으킬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고 한다. 



역시... 포비아의 근원은 트라우마인 걸까.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에니스 델마는
소년 시절에 동성애를 한다는 이유로 끔찍하게 살해  당한 흑인 시체를 목격한 적이 있다.
그 후, 그는 잭 트위스트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평생 마음을 열지 못한 채 서로를 그리워만 하다가 비극적으로 끝나고 만다.



나는 그녀에게 이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다고,
절대로 누군가가 함부로 비웃을 수 없는 이유니까 앞으로 쭉 중국을 싫어하라고,
만약 좋아하게 된다면 실망할 거라고. 진심으로 얘기해 주었다.



나의 트라우마는 무얼까...



경주 감포 해수욕장으로 온가족이 여름휴가를 갔던 여덟살.
예민하지만 무신경해서 살이 마구 찌던 내 엄마는
나를 튜브에 태우고 망망대해로 떠내려 보냈다.
동그란 구멍에 엉덩이를 끼우고 앉아 점점 낯익은 가족들로부터 멀어지는데...



가족들의 물장구 소리, 웃음소리, 해수욕 인파들의 유쾌한 소음들은 어느새 들리지 않고
내 귓전엔 기러기 소리, 멀리 뱃고동 소리, 파도를 치고 가는 바람 소리만 가득했다.



그 후, 나는 아주 오랫동안 잉크빛 남색 바다에 떨어져 혼자 튜브 위에서 떠다니는 꿈을 꾸곤 했는데...
그건 대개 악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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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이건 태국에서 만난 신종 악몽인가...

7 Comments
성굴이 2006.07.21 16:48  
  글이 범상치 않네요...
님의 글이 맘에 들어요...또 다른 매력의 글입니다...
다음편도 기대할께요^^

그나저나 여행와서 남친은 잘 달래주셨는지요...ㅋㅋㅋ
다섯별 2006.07.21 17:39  
  심각한...스릴러 풍의..글...기대되는데요.......~~
그물에걸리지않는바람 2006.07.21 21:36  
  의사세요? ㅋㅋ phobia, trauma 단어를 즐겨쓰시네요. ㅋ
새로미 2006.07.22 13:36  
  하하 재밌다...언니.글솜씨~대단하오~
마늘이 2006.07.23 17:47  
  한편의 소설을 보는 기분이네요...^^ 님의 여행기 넘 기대됩니다..
피비 2006.07.24 02:05  
  새롬~
너한테 전화왔을 때... 여행기때메 항의 전화한 줄 알고 깜짝 놀랬어.--;
웃고 넘기다니... 넌 정말 화끈하구나~
니가 얼마나 멋진 여성인지에 대해서 더 자세히 썼어야 했는데.-.,-
피비 2006.07.24 02:10  
  성굴이님~
남친이랑은 잘 지내는데 왠지 그 분위기가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습니다. 여행기 올린 거 들킬까봐 조마조마합니다.

어느날, 글이 다 사라지면 이해해주세욤. 이깟 여행기때메 채일 순 없잖아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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