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3 - 타만 네가라, ‘정글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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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3 - 타만 네가라, ‘정글의 소리’

danaia 0 804
말레이시아 3 - 타만 네가라, ‘정글의 소리’ (2006년 7월 12-13일 이야기, 16일 씀)

 
 (1) 정글로 가는 길

 말레이의 정글로 가기로 한다.
야생 동물들을 보고 싶었고, 그네들의 야생의 소리를 들어 보고 싶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정글의 공원 타만 네가라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업체를 이용하는 것과 둘째는 대중교통으로 가는 길이다.

 업체를 이용하게 되면(업체는 대개의 숙소에서 연결을 해준다)
쿠알라룸푸르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쿠알라 템벨링으로 이동하게 되며(26링켓)
쿠알라 템벨링에서 정글의 베이스 기지인 쿠알라 타한까지 보트를 타고 가게 된다(25링켓).

 대중 교통으로 가는 길은
쿠알라룸푸르의 티티왕사 터미널에서 제란투트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야하며(11링켓)
제란투트에서 쿠알라 타한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6링켓).
후자가 경제적이긴 하지만 비수기인 경우에는 제란투르로 바로 가는 버스가 없어 테메로를 경유해야 하며,
제란투트와 쿠알라 타한을 연결하는 버스의 상태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어서 다소 고생이 된다.

 그러나 나는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다.

 
 (2) 분분(은닉 관찰소)으로 가는 길

 쿠알라룸푸르에서 쿠알라 타한으로 가는데 하루 종일 걸렸다.
첫날은 일찍 잠자리에 들고, 둘째 날 숲 속 트레킹을 했다.
나무의 종류가 우리나라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뿐,
이곳이 정글로 불리는 이유가 뭔지 발견하지 못한 소득 없는 트레킹이었다.
고온다습한 기후 때문에 땀만 어지간히 흘렸다.
다음 날이면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는데 고생해서 이곳에 온 보람이 없자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래서 결정한 게 분분에서 밤을 보내는 일이었다.

 분분은 야생동물을 관찰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관찰소이다.
야생동물을 보자니 당연히 베이스캠프에서 다소 떨어진 숲 속에 위치해 있다.
가이드북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야생동물을 혹 보지 못할지라도 아름다운 곤충들의 하모니를 들을 수 있답니다’

 해질 무렵 관리소에 가서 분분 이용권(5링켓)을 샀다.
내가 가기로 작정한 분분은 베이스켐프에서 3.2km 떨어진 타빙분분이었다.
관리소 직원은 혼자 가는 거냐고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가는 길을 아냐고 묻는다. 나는 또 고개를 끄덕이지만 사실은 잘 모른다. 지도 한 장만 달랑 들고 있을 뿐이다.
직원이 말한다. 최근에 호랑이가 나온 적이 있다고.
과연 직원의 등 뒤에는 분분에서 촬영된 호랑이의 사진이 걸려있다.
나는 웃으며 말한다. 나 호랑이 고기 좋아한다고, 호랑이가 나오면 맛있게 구워 먹겠다고......
직원은 전문 가이드를 고용해 같이 가라고 권한다. 그러나 나는 정중히 거절하고 밖으로 나온다.

 관리소를 떠나 숲 속에 들어가자 곧 날이 어두워진다.
준비한 헤드 랜턴을 켜고 밤의 숲 속으로 들어간다.
밤은 빠른 속도로 밀려와 금세 세상을 암흑의 수렁으로 밀어 넣는다.
새들의 울음소리가 한층 극성스러워지다가 일시에 멈춘다.
그러고 나서 낮과는 다른 색다른 소리들이 들려온다.
암흑과 낯선 소리들 속에서 차츰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삼십분쯤 걸었을 때 길을 잃었다.
낮이었으면 쉽게 길을 찾겠지만 헤드 랜턴의 도수 낮은 불빛으로는 길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이쪽도 길 같고, 저쪽도 길 같다. 혹은 이쪽도 길이 아닌 것 같고 저쪽도 길이 아닌 것 같다.
이쪽 저쪽으로 방향을 계속 바꾼다.
산길에서 가장 위험한 게 방향 감각을 잃었을 때지만 침착해지려 애를 쓴다.
정 모르겠으면 아무데나 주저앉아 불을 피우고 밤을 지세우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내 자신을 위로한다.
한참 헤매다가 겨우 등산로를 다시 만난다.
이제는 분분으로 가는 걸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다.
뒤돌아 가봤자 다시 헤맬 것은 분명하다.
계속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잠시 뒤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쏟아진다. 재빨리 준비한 우비를 꺼내 입는다.
선택의 여지가 이제는 전혀 없게 됐다. 목적지까지 제대로 가야한다.
돌아가는 것도, 아무데서나 주저앉아 불을 피우고 밤을 지세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길을 반쯤 걸었을 때, 나무 위에서 커다란 도마뱀 한 마리가 내 어깨 위로 떨어졌다
(뭉클한 느낌에 도마뱀이라 생각할 뿐 실제로 보지는 못했다).
나는 너무 놀라 수 초간 얼어 있다가 도마뱀이 숲 속으로 재빨리 사라진 다음에야 꽥, 소리를 질렀다.
십여 미터를 더 가자 이번에는 새(혹은 박쥐) 한 마리가 갑자기 내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가
머리카락을 스치고 날아간다.
또 한 번 놀라지만 이번에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새를 향해 욕설을 퍼붓는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얼마나 무모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 지를 깨닫는다.
비가 오는 낯선 정글을, 야간에 걷고 있으며, 길도 제대로 모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혼자이다.
가장 안 좋은 산행의 조건을 모두 갖춘 셈이다.

 두려움이 자꾸만 밀려와 나는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 끝나면 또다시 두려움이 밀려올 것 같아 다른 노래를 선택할 여지도 없이 같은 노래의 후렴구를 계속 반복해 부른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호루라기 소리를 듣는다
(등산을 하는 사람 중에는 호루라기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야생동물들을 피해서, 혹은 위급한 상황에서 구조 요청을 하기 위해서 이다).
호루라기 소리가 300미터쯤 앞에서 지속적으로 들린다.
내가 노래 한 소절을 부르면 내 노래에 응답을 하듯 후루루, 하고 한 번 소리가 들리고,
또 한 소절을 부르면 또 한 번 후루루, 소리가 들린다.
다행이다. 나 말고 같은 분분을 향해 가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나처럼 혼자 산을 오르는 사람일리는 없고 아마도 경험 많은 가이드를 동반한 팀이 분명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만약 ‘help me'를 외치면 가이드는 나를 향해 달려와 줄 것이다.
내 마음에 가득하던 불안이 스르르 물러난다.

 호루라기 소리의 도움으로 나는 무사히 분분에 도착한다.
그런데......
분분에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조금 전까지 내 앞에서 분명히 호루라기 소리가 났었고 그 호루라기의 주인이 분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분분 안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이 어둠 속에 잠겨 있다.
그 때 다시 후루루, 소리를 듣는다.
분분 앞에 있는 나무 위다.
호루라기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아마도)새였던 것이다.
신비로운 일이다.
산행 내내 호루라기 소리는 나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 내 앞에서 이동해 나갔는데,
그렇다면 새가 내 앞에서 계속 날면서 분분을 향해 날 인도했단 이야기가 된다.

 God 께서 함께 하셨군, 난 그렇게 생각한다.
 

 (3) 분분에서 생긴 일

 분분은 커다란 원두막처럼 생겼다. 나무로 만들어진 침대가 네 개 있고 화장실과 (비록 부서졌지만)변기도 있다.
주변에는 평지 없이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혹 야생동물이 옆을 지나간다 해도 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어차피 야생 동물을 보는 게 내 목표는 아니었다.
내 목표는 조용히.......
도를 닦는 데 있었다.

 침상에 올라 앉아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촛불을 끄자 한 점의 빛도 없는 완벽한 흑암에 둘러싸인다.
빗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생각에 빠져든다.
내 여행의 목표에 대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예전에 윤과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렇게 한 시간을 멋진 (똥)폼을 잡고 사색하며 보낸다.
정글 여행 중 가장 즐거웠던 한 시간이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별의 별 소리가 다 들렸지만, 그때까지는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다. 

 다리가 저려 발을 바꾸는데 바닥에 물이 고여 있었다.
혹시나 해서 냄새를 맡아보니 비린내가 난다.
불을 켜보니 양 발의 십여 군데에서 피가 흐르고 있고 거머리가 발목에 붙어 있다.
거머리를 떼어 버리고 바닥을 보니 흘린 피의 양이 꽤 된다.
그러나 괜찮다. 이런 일로 즐거운 사색을 중단할 수는 없다.
피를 닦아 내고 주변의 거머리를 다 제거한 뒤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촛불도 다시 끈다.
잠시 뒤 새(혹은 박쥐) 한 마리가 내 머리를 스치고 날아간다.
나는 깜짝 놀란다.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불을 다시 켠다. 그리고 그 때 나는 듣는다.
묵직한 야생 동물의 숨소리를.

 분분 바로 앞에서 훅훅, 하는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소리의 크기로 보아 커다란 덩치를 지닌 짐승인 게 분명했다.
소리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고 계속 분분 앞에 머물러 있다.
나는 공포에 질린다.
내 피 냄새를 맡고 찾아온 육식 동물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어쩌면 호랑이일 수도 있다.
상대가 다른 육식 동물이라면 어떻게 싸워 볼 수 있겠지만 호랑이라면 싸운다는 게 무의미하다.
랜턴을 비춰 살펴보지만 보이는 건 울창한 숲 뿐, 손가락만한 소형 랜턴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리 가!’
꽥 소리를 지른다.
물론 그런다고 짐승이 다른 곳으로 가지는 않는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킨다. 소리를 지르는 게 내 공포심을 표현하는 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호랑이가 날 우습게 볼 수도 있다.
주변을 둘러본다.
분분으로 오르는 계단은 넓고 분분의 입구에는 문이 달려 있지 않기 때문에 호랑이는 쉽게 분분으로 들어올 수가 있다.
무기가 될 수 있는 걸 찾아본다.
빗자루 밖에는 없다.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낫겠다 싶어 빗자루를 침상 옆으로 옮겨 놓는다.
호랑이가 달려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시나리오를 세워 본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빗자루를 들고 침상 밑으로 후다닥 들어가는 거다.
호랑이가 침상 밑으로 머리를 들이밀면 빗자루로 정확히 눈을 가격한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호랑이가 바로 달려들지 않고 붐붐 내에서 어슬렁거리며 다가올 때의 시나리오다.
나는 재빨리 촛불의 불을 휴지에 옮겨 붙여 불을 키운 다음 성냥통을 불속에 던져 넣는다.
불이 갑자기 확 일어나 호랑이를 놀라게 만들어 호랑이를 쫓아낸다.
만약 호랑이가 놀라 도망가지 않으면 침낭에 불을 붙인 뒤 호랑이에게 던져 호랑이를 쫓아낸다.
이것도 실패하면 분분 전체를 태운다.
두 가지의 유치한 시나리오를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숙지한다.

 호랑이가 내가 잠들기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몰라 졸린 눈을 비비며 시간을 보낸다.
촛불은 두 자루, 한 시간 밖에는 버틸 수 없다.
과연 내가 살아서 숲을 나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성경의 한 구절을 떠 올려 본다.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독사에 물려도 해를 입지 않고.......’
하나님은 산을 오르는 내내 나를 도우셨다. 그러니 지금도 도우실 거라고 내 자신에게 이야기 한다.
그러나 또 다른 내가 이야기 한다.
하나님의 도우심 끝에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고 도마는 톱으로 배를 쓸려 두 동강이 나서 죽었다.
얼마 전 쓰나미 때도 하나님은 22 만 명을 순식간에 죽이셨다.
오늘이 나에겐 그 날일지도 모른다.

 공포, 그리고 이런 저런 의심 속에서 밤이 깊어간다.
나는 동물 관찰소에 앉아 제발 아무 동물도 나오지 말 것을, 아무 동물도 관찰하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촛불이 꺼져 랜턴을 켠다. 이제 두 번째 시나리오는 펼칠 수가 없게 됐다.
첫 번째 시나리오만 열심히 숙지한다. 정확히 눈깔을 찔러야 하는 것이다.
새벽 한 시쯤 됐다.
불안에 떨며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호랑이를 기다린 지 네 시간이 흘렀다.
졸음이 밀려온다. 조금씩 조금씩 졸음이 더 세게 나를 잡아당긴다.
신기하게도,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졸음이 더 세다.
졸음이 사정없이 몰려 마침내 내 눈을 감기고, 세상 모든 것이 귀찮게 느껴지게 만든다.
에라이, 잡아먹으려면 잡아먹어라, 나는 중얼거리며 랜턴을 끈다.
그리고 침낭 위에 누워버린다. 

 새벽 다섯 시 반, 잠에서 깨어난다.
짐승의 숨소리는 한동안 멎어 있다가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졸음이 가시자 다시 공포가 밀려와 나는 다시 방어 태세를 갖춘다.
이제 곧 해가 뜰 테지, 해가 뜨면 나는 살은 거야.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호랑이는 해가 뜨기 직전, 긴장이 풀릴 시간을 노리고 있을 수도 있다.
여섯시가 되면 해가 뜨리라고 생각했는데 날은 밝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나라는 어찌된 건가. 한국에선 다섯 시 반이면 동이 트는데, 짜증이 난다.
그러나 짜증을 부려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여섯시 사십오 분, 드디어 사방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온갖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고, 생전 처음 들어 본 여러 가지 낯선 소리는 조금씩 사그러진다.
그리고 그 공포의 숨소리도, 마침내 어느 순간 멈춰버린다.
그러나 나는 긴장을 풀지 않는다. 긴장을 푸는 순간 내 등 뒤에서 호랑이가 달려들 수도 있다.
일곱 시 십오 분, 날은 꽤 밝아졌다. 해가 떠오르려면 아직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하지만 나는 산을 내려갈 준비를 한다.
잠시도 분분에 더 머무르고 싶지가 않다.
나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정신없이 산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4) 산을 내려와 생긴 일

 바람처럼 다리를 놀려 한 시간 만에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는데 성공한다.
저 멀리 캠프장이 보이고 사람들이 보이자 이제 정말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내 앞에 멧돼지 한 마리가 나타난다.
산속에서 만났으면 화들짝 놀랐겠지만 여기는 사람이 사는 구역이다.
똥개도 자기 집에서는 오십 프로 먹고 들어간다는데(이건 옛날 드라마에서 최일섭이 한 대사다)
내가 무서워할 리가 없다.
여유 있게 카메라를 꺼내 들고 사진을 찍는다.
조금 더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으려 하자 멧돼지는 나를 피해 숲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쳇 별 거 아니구만, 하고 종전의 공포를 그세 잊은 채, 나는 오만을 떤다.

 그러고 나서 신발 안 사정이 궁금해 등산화를 벗어 본다.
거머리가 달려들 것이 겁이나 산을 내려오는 내내 발을 툭툭 털며 걸었는데 설마 여러 마리가 붙어 있을까 싶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여러 마리(무려 다섯 마리)가 편안히 양말 위에 앉아 피를 빨고 있다.
후다닥 거머리를 떼어 낸다. 주변의 땅을 둘러본다.
이럴 수가.
수많은 거머리들이 나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다.
나는 또다시 겁에 질려 베이스캠프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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