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을 떠나며
8.
우리가 머무는 티볼리 호텔은 카오산로드에서 벗어난 곳에 있다. 이 호텔과의 인연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치민에 2년 동안 근무하고 귀국할 때의 일이다. 월세를 아낄 요량으로 두 달 먼저 식구들과 귀국한 뒤, 혼자서 열흘 동안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호치민에 오려고 표를 찾던 중이었다.
호치민에 스톱 오버로 열흘 머물고 , 방콕에 2박3일 갔다가 돌아오는 비행기 표가 눈이 번쩍할 정도로 가격이 저렴했다. 게다가 호텔까지 무료로 머물게 해주는 횡재를 만났다. 그때 인연이 닿은 호텔이 티볼리다.
배낭을 지고 겨우 찾아 온 내게 프론트의 직원은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내온 것도 황감한데, 체크인해보니 호텔 룸 탁자에 과일바구니가 얌전히 올려져있어 더 감동했다. 부대시설도 남달랐다. 작지만 옥상엔 수영장도 있고, 호텔조식도 깔끔했다.
무엇보다 좋은 건 호텔 앞 맛사지가 환상적이란 거였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테라피스트가 일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모시는 신상에 두 손 모아 기도를 하던 모습을. 그 경건함에 어쩐지 심신이 부드럽게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자기 일에 긍지를 갖고 최선을 다해 임하는 모습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신뢰를 선사한다. 그래서 이번에도 티볼리호텔을 고집했다.
하지만 다시 찾은 티볼리는 전과 달랐다. 중국 단체 투어 객들이 로비를 장악하고 있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수다스럽고 민망할 정도로 예의에 벗어났다. 프론트의 직원들도 손님에게 심드렁하게 대한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라고 부르던 정지용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았다. 이곳이 물론 고향은 아니지만 그 때 내가 느낀 그 감각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 풍화되듯 더 이상 그때의 감각이 아니란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아무리 좋았던 곳들도 두 번 세 번 찾다보면 시큰둥해진다는 걸 왜 몰랐을까.
하지만 겨울옷이 든 짐 가방을 맡아주고 투어객들이 썰물처럼 나간 뒤 짬이 나면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여주는 스텝들이 있어서 계속 머물게 되었다.
이곳의 최대 단점은 택시기사들도 찾기 힘들 정도로 후미진 곳에 있다는 점이다. 택시비가 비싼 편은 아니지만, 여행 중에는 자꾸 지갑단속을 본능적으로 하게 된다. 특히 방콕에서 가장 크다던 시암 오션월드에 다녀올 때 악명 높은 트래픽으로 웃돈을 요구하는 기사들의 태도에 놀라 오토바이를 흥정해서 돌아왔던 우리로서는 차비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훨남퐁 중앙역에서 호텔로 짐을 가져다 놓게 되면, 오며 가며 드는 돈이 만만치 않아서 결국 그 큰 배낭을 지고 황금사원에 들렀다. 왜 그때는 역사에 짐 맡기는 생각을 못했을까? 정보에 무지한 엄마를 만나 등골이 빠지는 작은 아이를 생각하면 아직도 미안하다.
매표소인가? 사무실인가?에 짐을 맡기고 맨발로 사원에 올랐다. 콘크리트에 칠해놓은 페인트 색이 투박하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는 모습도 보인다. 그래서 또 친근하다.
사원의 계단을 오르다보면 숨이 차서 도저히 숨을 몰아쉬지 않으면 안 될 순간을 맞이한다.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옷 속으로 들락날락거리며 나를 달랜다. 한국에 있었다면 이 겨울에 언감생심 만나보지 못할 청청한 나뭇잎과 담홍색 꽃송이, 그리고 맑게 흐르는 물, 소박해서 더 정겹다.
윤기나는 검은 종이 죽 매달려있고, 커다란 징도 걸려있다. 맨 위 꼭대기엔 황금색 종탑이 거대하다. 맨발로 사원을 다녀야하는 번거로움이 꺼려졌으나 아이는 신이 나서 먼저 올라가버린다.
둘이 다니는 여행은 서로를 깊이 밀착시킨다는 장점도 있지만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를 차단하는 단점도 있다. 아이는 내 곁에만 있느라 자신만의 여행을 적극적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측은했다.
한 달 간 태국과 라오스를 쏘다닌 증거로 기미가 잔뜩 올라온 얼굴을 한 채 태국 시내를 바라보았다. 뚜벅뚜벅 잘도 걸어, 여기까지 왔다. 방콕에는 방콕만의 특별한 햇살이 있고, 말할 것도 없이 코 따오는 꼬 따오만의 남다른 고요가 있다. 아유타야는 어떤가? 부처님은 주황색 어깨띠를 매고 노란 덮개로 엉덩이를 가리며 길게 눕거나 편안히 앉아 계시다. 그리고 다사롭게 미소 짓는다.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발바닥을 문지르고 복전을 올리고 향불을 피우는 사람들도 내치지 않으신다.
아유타야에서 미뤄둔 노을을 골든 마운트에서 본다. 그곳에서 보았다면 더 운치 있었겠지만, 정해진 시간을 나눠 써야 하는 나그네로서는 이곳도 나쁘지 않다. 높은 곳은 눈만 시원한 게 아니다. 지상에서 개미처럼 지내느라 미처 맛보지 못한 한가로움의 바람도 폐부까지 시원하게 분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난다. 당분간은 다시 오기 어려울 것이다. 어느 곳에서는 시간을 맞추느라 뛰었고, 또 어느 곳에서는 느릿느릿 시간을 늘이느라 멈춰 있었다. 돌아보니 둘 다 반드시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 틈새를 비집고 다른 시간으로 들어갔다면 지금의 문양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장엄하게 해가 떨어진다. 방콕의 빌딩도 아무렇게나 잇 대은 낡은 지붕도 왕궁도 사원도 물을 많이 탄 먹물처럼 투명하게 검다. 이제 조금 있으면 불빛이 어둠을 내몰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은 해가 남긴 어둠의 시간이다.
화평과 안식..무탈하게 여행을 마무리하도록 가피를 베풀어주신 부처님께 머리를 조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