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지법

홈 > 여행기/사진 > 여행기
여행기

축지법

네버스탑맘 14 601


6.

  춤폰에서는 기차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쩔쩔매다가 어느 가게에 짐을 맡겨줄 수 있냐고 물으니 주인은 선선히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끊어진 샌들, 가방 끈 등을 수선해주는 가게였다.

 ​ 옆에는 꼬마아이가 연필을 들고 학습지를 풀고 있다. 부모가 일을 하고 자식이 공부를 하는 모습, 그리고 중고생이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는 그 당연한 일상이 여행지에서는 무척이나 기특하고 대견해보인다. 우리 아이도 한국에 있었다면 겨울방학특강을 들으며 애 좀 먹고 있었을 텐데 극성맞은 엄마를 만나 한 달이나 여행길에 올라서 또래하고 놀지도 못하고 무거운 배낭을 지고 돌아다니니 마음 한편 내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감사하다는 말을 거듭하고, 공부하는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시장 길로 들어가 과일과 찐 옥수수를 좀 사고 동네를 구경했다. 태국의 아이들이 공터에서 축구를 한다. ‘붉은 악마티셔츠를 입고 있다. 지난번 비엔티엔의 야시장에서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온종일 퍼져 나오고 검은 썬그라스를 쓴 사진이 프린팅된 면티가 가게마다 걸려 있어 반가웠는데, 이곳에서도 한국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소년들을 뒤로 하고 마을을 걸어보았다. 조용한 주택가다. 넘겨다 본 마당엔 어른, 아이, 아기 순으로 양말을 가지런히 널어놓았다. 주부의 살림솜씨가 얌전해보였다.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를 보는 것만도 유랑하는 여행객에겐 정착의 유혹처럼 코끝이 찡하다. 눈을 들어 2층 건물을 보았다. 촌스럽게 주황빛이 도는 페인트를 칠한 콘크리트 건물이다. 베란다와 창문턱엔 화초를 잔뜩 길러 우리 집이 제일 화초가 많지? 하며 자랑하는 듯 가꿔놓았다.

 

  그렇게 동네구경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이에게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줬다. 자장면이 흔하지 않아서 운동회나 졸업식때만 먹었단 이야기부터 할머니께 거짓말을 했다가 들통이 나서 혼쭐이 날 줄 알았는데, 도리어 모르는 척 넘어가셨던 이야기까지...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어느새 기차시간이 다 되었다. 맡긴 짐을 찾으면서 고맙다고 정성을 표하자 한사코 사양을 하신다. 뭐든지 돈으로 해결하려는 내게 태국사람들의 친절은 허를 찌르듯 나를 부끄럽게 만들 때가 많다.

  

  플랫폼에서는 덩치가 큰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찰밥을 야무지게 먹고 있다. 한 봉지만 먹어도 든든한데 벌써 세 봉지 째다. 입이 짧은 아들을 둔 어미로서는 그의 먹성이 부럽기만 하다. 드디어 기차에 올랐다. 한숨이 나간다. 선반 위에 배낭을 올리고 나니 이제야 휴식이 찾아온 듯 푸근한 마음이 들었다. 승차 전 양치와 세수를 했지만 한 번 더 물티슈로 닦아내고 잠을 청했다.

 

  야간열차를 타는 일은 마치 멀리서 북소리가 둥둥 울리는 것처럼 심장을 두드린다. 한바탕 꿈을 꾸고 났을 뿐인데 일어나면 시공간이 달라져 있다. 땅을 접어 걷는 축지법보다 더 놀라운 변화지만, 당연한 듯 문명의 이기를 누린다. 비행기는 어떠한가? 구름 타고 다니던 신선이 지금의 우리를 본다면 모두가 자신과 같은 능력이 있음에 깜짝 놀랄 것이다. 하지만 축지법을 쓰고 구름을 타는 것처럼 이곳저곳을 순식간에 옮겨 다닌다 해도 인력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

 ​코 따오에 들어갈 때처럼 이미 떠난 페리를 다시 불러들일 수도 없고 춤폰의 기차시간을 당길 수도 없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 자신을 설득하며 어떤 반응으로 이 시간을 보내야 할지 궁리하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의 말처럼.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빈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 우리의 반응을 선택하는 자유와 힘이 있다.

그 반응에 우리의 성장과 행복이 달렸다. -빅터 프랭클-

14 Comments
클래식s 2017.01.14 21:51  
글을 매우 잘쓰시네요. 계속 감탄 중입니다. 그런데 인터넷에 올리실때는 들여쓰기 하시고 계속 1-3 줄 단위로 줄을 띄워주셔야 눈이 안 아픕니다. 글과 관련된 이미지 한장 정도는 마지막에 올려주시면 좋고요.
 눈이 아파서 좋은 글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계속 지나치다가 안타까워서 댓글 남기고 갑니다.
 알면서도 일부러 스타일을 고수하시는 거라면 어쩔수 없고요.

https://thailove.net/bbs/board.php?bo_table=travelpic2&wr_id=64116
네버스탑맘 2017.01.14 21:54  
이렇게 하면 될까요?ㅎㅎㅎ
클래식s 2017.01.14 21:55  
네. 요새 피씨로 보는 사람보다 스마트폰으로 보는 분들도 많아서요.
네버스탑맘 2017.01.14 21:57  
감사합니다~ 한글로 먼저 작성한 다음 올리는 바람에..이런 게 능숙하지가 않아서요
클래식s 2017.01.14 21:59  
네. 알고 있습니다. 시대가 변하니 상식과 유행도 변해가나 봅니다.
 눈높이를 맞춰서 편집해주시면 더 많은 분들이 끝까지 읽고 가실거 같네요.
돌이킬수없어요 2017.01.15 11:11  
태국에서 아이들 머리..쓰다듬으면..안되는걸로.. 알고잇어요^^;;
모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이미 지나간 일이니~~
오늘도 볼게 있게 만들어주셔서 고마워요!
즐겁게 봣어요^^
네버스탑맘 2017.01.15 11:25  
4년전이라..따듯한 시선만 던졌는지, 머리를 쓰다듬었는지 정확하진 않아요. ㅎㅎ
후회없는사랑 2017.01.15 22:45  
저도 사실 밑에 글들이 따오와 관련되어있어서 읽긴했지만
자간, 행간이 너무 붙어있어 읽기가 좀 불편했었습니다.
그나마 오늘은 읽기가 좀 편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타이거지 2017.01.16 06:01  
춤폰역사에 가방보관함 있을텐데..맡겨본적 있거든요.
연착이 심해서 그런가..개찰하고 플랫폼에도 있어요..사이즈별로 가격 매기고.
썸썸아메리카노 2017.01.22 16:28  
글이 재밌어요~ 쉽게 잘 읽히네요 잘 읽고 가요^^
네버스탑맘 2017.01.31 12:55  
네~~술술 쓰진 못해도, 술술 읽히면 너무 행복해요.
씩군 2017.01.31 12:05  
글 진짜 잘 쓰시네요 부럽습니다.ㅎㅎ 잘 읽고 갑니다.
네버스탑맘 2017.01.31 12:55  
와...고맙습니다!!ㅎㅎ
pororo 2017.05.10 15:55  
올리신 몇몇 글 잘 읽었어요~ 글 솜씨가 정말 좋으신 것 같아요~ 마치 여행을 이미 다녀온 듯한 감상을 느끼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포토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