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거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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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나무 거북이

네버스탑맘 14 650


4.

  여행의 참맛은 호텔에서 늦잠을 늘어지게 자는 일이다. 느릿느릿 일어나 노상카페에 앉아 브런치를 즐기며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는 일은 여행의 묘미다물론 사람을 관찰하는 대신 아끼는 책을 읽어도 좋고 밀렸던 일기를 써도 괜찮다.

 ​오늘은 잇달아 달려와 부딪혀 무너지는 파도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날은 흐렸지만 멍석말이로 달려드는 파도소리에 가슴이 시원하다. 파도는 바닥에 들러붙은 자신을 일으켜 세우느라 그렇게 요란한 소리를 낸다는 걸 처음 알았다.

 도시의 새벽은 빠르게 달리는 차들의 타이어가 도로를 질주하며 으르렁 거리는 소리로 시작되지만 바다의 새벽은 단연코 파도소리다. 추처럼 천공에 매달린 지구에 물 한 방울 쏟아지지 않고 출렁이며 숨쉬는 파도를 떠올리는 것만도 나그네의 심회를 달랜다.

 

 식빵과 딸기잼, 앵커버터, 계란 후라이, 커피가 전부인 소박한 아침이다. 아이는 식빵 표면을 떼어내 새들에게 나눠준다. 바닷가라 으레 갈매기만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참새도 많다. 이 섬의 참새는 유난히 더 작고 참했다. 아이가 식빵을 잘게 부스러뜨려 바닥에 떨어뜨려준다. 그러자 일제히 날아와 빵을 쪼아 먹는다. 아이는 자기 몫의 아침마저 새들에게 나눠주려 한다. 눈썹에 힘을 주니 바로 싱긋 웃으며 식빵을 자신의 입에 넣는다.

 

 레스토랑의 누렁이는 이제 아이의 친구가 되어 벌러덩벌러덩 잘도 눕는다. 아이 말로는 당신에게 항복한다는 뜻이란다. 트로피칼 리조트에서 서빙을 보는 남자는 중년이다. 보통 나이 어린 아가씨들이 주문을 받는데 이곳은 정반대다. 카운터에 아가씨가 앉아 있고 서빙은 중년의 남자가 본다. 얼핏 봐도 어딘가 모자라 보였다. 순박함이 장점이 되기보다 함부로 험한 일을 시켜도 될 것 같은 분위기는 우리 동네 용현동 손세차장 아저씨와도 닮았다. 추운 날 젊은 주인은 계산을 하고, 나이 든 종업원은 차가운 물세차를 하면서도 얼마나 정직한지 차안에 떨어진 500원짜리 동전들을 운전석에 가지런히 올려놓는다.

 

 레스토랑에 근무하기에는 조금 나이가 많아 보이지만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주문만큼은 정확하게 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일은 내가 전문이지하는 모습이다.

스파게티를 먹고 싶어 하는 아이가 가격표를 보며 믿을 수 없이 싼 가격에 놀라 플레인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러더니 이내 음식을 갖고 왔는데, 정말이지 한 접시의 흰색 스파게티 면발만 갖고나왔다.

 

 아이와 난 웃음을 참지 못했고, 그는 계속 의아한 듯 우리를 쳐다보았다. 만약 그가 센스있는 종업원이었다면 분명 소스가 없는 면이라고 설명했을 터이나, 그는 정직하게 주문받는 일에만 집중하니 벌어진 일이다. 우린 다시 소스를 더 시키고 사태를 마무리시켰으나, 지금도 아이는 플레인 스파게티의 추억을 떠올리며 깔깔 웃는다.

 

 아무런 일정도 잡지 않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다가 이탈리아에서 온 아주머니를 만났다. 친구의 가족까지 함께 왔는데 영어를 하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어서 자신이 가이드가 되어 그들을 인솔한다고 했다. 화덕피자가 맛있는 집, 생선구이가 신선한 가게 등을 알려준다. 한번 얼굴이 익자 이곳저곳에서 계속 마주친다. 미소를 주고받으면 가족들은 누구냐고 묻고 덩달아 통성명을 한다. 디스코 머리를 짱짱하게 땋아 내린 사춘기 소녀는 여행이 흥미 없는지 엄마, 아빠 옆에서 퉁명스럽게 서있다. 초등학생인 우리 아들도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 저렇게 되겠지..그렇게 나이를 먹겠지 싶어지자 그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쓸쓸해졌다.

 

 오후가 되자 바다는 잔잔해진다. 발길은 자석에 끌리듯 어느새 바다 속이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도  수심이 종아리를 넘지 않는다. 낮동안 태양빛에 데워진 물은 온천수처럼 따스하다. 바다 한 가운데서 석양을 마주하며 영화 속 주인공이나 된 것처럼 낭만을 누렸다.

 

 ​자잘한 돌멩이 하나 없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넓은 바다에 호젓하니 발을 담그는 맛은 이 짧은 순간을 또 누릴 수 있다면 기꺼이 다시 이곳에 오리란 마음으로 바뀌었다.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있거라'라 해도 그렇다. 주인공의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은 90퍼센트가 넘는 지난한 전쟁의 묘사 후에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야간열차에서 잠못이루고, 페리 안에서 멀미를 하고, 막상 도착해서도 한 양동이의 물로  화장실의 볼 일을 해결해야 하는 열악한 리조트에도 묵묵히 참을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길 잃을 용기를 내어 산 하나를 넘듯, 강 하나를 건너듯 선선히 떠나면서 넓혀진 나의 지경!!

  이제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 다시 방콕을 향한다 트로피칼 리조트의 바깥주인은 여행사를 겸해서 하고 있다. 어제의 보트 트립도 그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그는 이 섬이 왜 코 타오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이란 뜻이고 타오거북이란 뜻이라며 소장가치가 분명한, 정교하게 다듬어진 나무 거북이를 선물로 주신다. 기껏해야 삼일 밤 묵은 것이 전부인 외국인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시는 모습에 우리보다 형편이 나쁜 나라라고 무조건 받으려고만 할 거란 나의 얕은 선입견이 일순간에 무너졌다.

 

 베풂은 가진 것에 비례하지 않고 마음에 달려있단 당연한 진리를 깨달으며, 이곳을 떠날 채비를 하였다.

14 Comments
cafelao 2017.01.13 07:40  
작가분이시군요.
정제된 단어들
정확한 맞춤법
태사랑에서 또 한분의 작가분의 여행기를 읽게 되다니...
1편부터 몽땅 읽었어요.
책으로 출판된다면 태사랑에도 광고하셔요.
한권 가게 놓고 싶어서요.
네버스탑맘 2017.01.13 14:53  
보약 먹은 듯 기운 차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드려요~~
네버스탑맘 2017.01.14 11:53  
그런데 작가는 아니예요...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작가지망생이요.ㅎㅎ
네버스탑맘 2017.03.17 03:45  
드디어 그 겨울의 한달이란 제목으로 책이 28일에 나와요~~♡
타이거지 2017.01.13 08:13  
멍석말이라...
같은 현상을 보고..다른 시각의 수준차이..
싸이리비치에 누워 멍때리다..오늘 술안주는 뭘로 때리나..
그날따라..파도가 좀 있었던듯..저 밀려오는 파도로 뽀삐야를 만드는거야..
뽀삐야텃 당첨!! ㅡ.ㅡ''
네버스탑맘 2017.01.13 14:54  
ㅎㅎㅎㅎ이기호의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다에서, 또띠야를 해먹으려는
취준생의 비애가 나와요^^ 그때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또띠야를 하려고 했다니
아버지께서 웬 뽀삐를 해먹어??그러던데.ㅎㅎㅎ재밌어요!!
돌이킬수없어요 2017.01.14 11:10  
작가분이라고 하시네요~~
모 저도 그런생각 하긴 햇어요^^
네버스탑맘 2017.01.14 11:52  
작가라니..너무 황송한 칭찬이세요..방학마다 아이들 데리고 다니며 여행하는 평범한 1인입니다.
베스트랄로피테쿠스 2017.01.15 21:32  
저 이번에 꼬따오 섬에 다이빙하러가는데 ㅎㅎ 정말 기대되네요 ^^
네버스탑맘 2017.01.25 19:14  
잘 다녀오셨어요?? 코 따오..또 가라면 난 또 거기에 갈까??잘 모르겠어요.ㅎㅎ
한서리 2017.01.19 03:49  
이야~ 사진이랑 글이 너무 좋네요 힐링하고 갈꼐용ㅇ홍홍홍
네버스탑맘 2017.01.25 19:23  
사진이 좋다니^^ 우리 아들이 좋아하겠어요~~초등5학년이 찍은 사진인데.ㅎㅎ
ydndud 2017.01.24 20:39  
사진 너무 좋네요 손으로 가려져 생긴 비네팅도 사진 분위기랑 잘 어울립니다.
네버스탑맘 2017.01.25 19:24  
아이에게 꼭 전달할게요^^ 용기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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