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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스탑맘 6 531

 

 

2.

  페리엔 사람들이 꼭꼭 들어찼다. 일단 자리를 잡으면 일어나기 어렵다. 통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좁아서 아무리 노력해도 거길 빠져나가려면 반드시 다른 승객의 발을 밟아야만 한다. 선상으로 올라갔다가 기미가 잔뜩 낄 게 두려워 두 시간 반 동안 눈 딱 감고 가자며 아래 칸에 자리를 잡은 게 화근이었다.

 

 파도가 무섭게 치고 배는 그에 따라 춤을 추듯 출렁였다. 아이는 끝내 레스토랑에서 먹은 음식을 돌라놓았다. 네덜란드 남자가 왜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고 했는지 알게 된 순간이다. 아이가 게워놓은 검은 봉지를 치우며 끝내 나도 구토하고 말았다.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물밀 듯 연거푸 밀고 들어오면서 우리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기분이었다.

 ​아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극성맞은 엄마를 따라 불편한 잠자리와 거친 밥을 먹으면서도 불평 한 번 쏟지 않은 아이가 인내심을 잃고 울먹인다.

 

 앞날을 알았다면 강행하지 않았을 여정이다.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배를 타고 다시 나올 일이 까마득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한 번도 이런 정도의 배 멀미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기진맥진하면서 배낭을 지고 따오 섬에 당도하자 설상가상 이젠 숙소가 또 걱정이었다.

  ​네덜란드 남자는 오픈카를 타고 돈을 나눠 내자며 제안한다. 그쪽은 세 명이고 우리 두 명일뿐만 아니라, 그가 묵는 숙소에 빈방이 없는데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차에 올라탔다.

 ​

  그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포터가 기다렸다는 듯 그의 짐을 실어 나르고, 우린 우두커니 서서 주인의 처분만 기다렸다. 어쩐지 네덜란드 남자가 야속했다. 자신의 택시비를 나누려고 우릴 이용했는가? 싶어졌다. 게다가 오토바이를 타다가 다쳤는지 어떤 서양 젊은이는 다리가 쓸리고 얼굴까지 깨진 채 멍하니 있어 우릴 더욱 아연실색하게 했다. 이곳은 앞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줄까? 우린 이곳에서 무엇을 할까? 무사히 섬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연이어 질문이 솟았다. 다행이도, 갑자기 방을 뺀 투숙객이 있어서 우린 무사히 짐을 풀 수 있었다.

  습하고 좁은 방이었으나, 당장 오늘 밤 묵을 방을 구한 것이 반가워 아이와 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서둘러 보트 트립을 예약하고 동네를 이리저리 구경하면서 원숭이를 개처럼 묶어놓고 기르는 현지인의 집 앞에서 한참을 노닥였다. 편의점, ATM, 로컬식당을 확인한 뒤, 자전거 두 대를 빌려 썬셋 포인트로 올라갔다. 스쿠터로 올라가면 편하겠지만 얼굴을 다친 여행객의 얼굴이 떠올라 조금 힘들더라도 자전거를 택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임대해준 자전거의 상태는 웬만한 다리 근력으로는 비탈길을 올라갈 수가 없었다. 내가 먼저 올라가 자전거를 세워두고, 다시 아이에게로 내려가 뒤에서 밀어주거나 자전거를 들어 올려가며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힘들게 썬셋 포인트로 향했다. 온 몸에 땀이 흥건하다. 그럼에도 아이와 자전거를 타는 이 시간이 귀하다.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나 자전거 되리/한평생 왼쪽과 오른쪽 어느 한쪽으로

기우뚱거리지 않고/말랑말랑한 맨발로 땅을 만져보겠어

구부러진 길은 반듯하게 펴고, 반듯한 길은/구부리기도 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모퉁이, 움푹 파인 구덩이, /모난 돌멩이들

내 두 바퀴에 담아 기억해야지 (안도현-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

 

  때마침 노을이 진다. 물고기 비늘 같은 물결에 햇빛이 반사할 때마다 물은 살아있는 듯 몸을 비틀며 반짝인다. 작은 배 하나가 바다를 가로지른다. 맥주 한 캔을 앞에 두고 수첩을 꺼내, 내 떠나온 나라를 그려본다. 만약 한국에 있었다면 망월사 가파른 길을 오르며 입시가 가까워진 큰애를 위해 무릎이 깨져라 108배를 하고 있을 거란 생각도 해 본다.

 

 어디서 또 개를 만나 정신을 뺏긴 아이를 보며, 오늘 우리가 뉘일 방이 있고, 내일 아침 떠날 보트 트립이 기다리고 있고, 건강한 컨디션으로 이곳에서 노을을 보고 있으니 마치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근 듯 노곤하고 평화로웠다. 돌아오는 길에 망고도 두 개 샀다. 칼집이 부드럽게 들어가는 잘 익은 노란 망고에서 진득한 단물이 배어나왔다. 죽을 것만 같았던 배 멀미와 오도 가도 못할 것 같던 낯 선 길, 여기저기 다쳐서 돌아다니던 관광객의 멍한 얼굴, 우리를 이용할 것만 같은 이국인들에 대한 공포도 이제 한 고비 또 넘었다.

  오늘 이 고비를 넘겼다고 내일도 잘 풀릴 리 없다. ‘고통은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말처럼 다른 고비를 만나면 마치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 또 몸부림이 쳐질 게다. 다만 이러한 고통의 반복이 삶이란 걸, 이런 무늬 무늬가 모여 삶의 문양을 만든다는 걸 알아차릴 뿐이다.

6 Comments
타이거지 2017.01.13 07:39  
고백하건데...
이유없이..길가는 사람 뒷통수에 대고 욕을 한적이 두번 있어요...
매싸롱에서...따오에서.망고베이는 어딘가?..찰럭반까오는 어디메뇨..샤크베이에
상어는 노닐고 있는가...땡볕에 땀이 삐질삐질~주르륵..숨차 걷고 있는데..
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자전거..."야!!!  너..너..미친거 아니니?" 지송합니다ㅡ.ㅡ''
네버스탑맘 2017.01.13 14:56  
우리였을까요?^^ 그 자전거??ㅎㅎ
타이거지 2017.01.13 07:44  
선택하신 언어..참 이뻐요.
매듭도 그러했고..문양도 그러하고..
열 받지 말고..왕왕대지 말고..백팔배 벗 삼으면,
내 삶의 문양도 좋을텐데...
아..쒸..나..실타.
네버스탑맘 2017.01.13 14:57  
제가 답답할 때면 백팔배 하는 걸 어찌아시고..ㅎㅎ
돌이킬수없어요 2017.01.14 10:51  
여행기 라고 하기엔 단어의 선택이 넘 고급지지만..
그래도 상상할수 잇어서 좋아요~
다음편 넘어갑니다^^
네버스탑맘 2017.01.14 12:05  
공들여쓰는 한편 술술 읽히도록 써야하는데, 제 생각에 갇혀 글을 갈팡질팡 써서 너무 부끄러워요. 상상하실 수 있다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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