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첫 방문 2016. 5.24~5.31 (3)
칸차나부리 정류장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 숙소인 굿 타임 리조트에 4시 반쯤 도착했습니다. 체크인을 하면서 내일 에라완 투어를 예약했습니다. 1명당 1440밧. 수영장 뷰인 1층 객실이 마음에 들었어요. 화장실이 엄청 넓어서 미끄러질까봐 발수건을 아예 화장실 바닥에 깔아 두었지요. 객실에서 조금 쉰 후 일단 밖으로 나왔습니다.
여행자 거리가 지척이네요. 내친김에 ‘콰이강의 다리’까지 걸어갑니다. 오래 전 보았던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서 휘파람 곡 ost를 떠울리며 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 걸었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콰이강의 다리’는 우리 슬픈 역사의 일부분이었어요.
나이 값 못하는 엄마 때문에 아들이 고생했습니다. 드디어 도착해서 다리를 건너보고 풍경을 눈여겨봤습니다. 나름 핫 스팟,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관광여행이 발달한 나라, 태국 사람들의 영민함이 돋보이는 장소였어요. 우리나라에도 승일교라는 한국의 ‘콰이강의 다리’가 철원 어딘가에 있답니다. 고석정은 가봤지만 승일교는 저도 잘 모릅니다만 물량위주의 식상한 지역 축제 말고 스토리가 있는 여행 상품이 많아지길 기대해 봅니다.
그 곳 미니 시장에서 옥수수를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구운 옥수수를 샀습니다. 유유히 흐르는 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잠깐 머물다가 해 저무는 노을 길을 되돌아 왔습니다. 돌아올 땐 조금 지루했어요. 저녁 해결을 위해 식당 물색하다 야시장이 그 근처에 있다는 ‘과학 사진과 여행’ 별마살님의 글이 기억나서 주변을 헤맸습니다. 마침내 제법 큰 규모의 야시장을 찾아서 히잡 쓴 쿡에게 로띠를 사고 닭고기와 돼지고기가 든 밥 종류 음식 두 개와 과일을 더 사서 숙소 도착. 도중에 세븐 일레븐에서 병맥주 하나와 생수를 샀습니다. 맥주가 너무 시원하고 맛있어서 한 병으로 서운. 내일 에라완을 위해 절제하고 숙면 모드로.
실제 '콰이강의 다리' 건설에는 일본군만이 아닌 조선인 군속들이 참여했고, 심지어 그 가운데는 자신의 이름과 국적을 찾지 못한 채 일본군 전범으로 처리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경우도 있었다. 최근 작가 정동주씨가 발표한 소설 '콰이강의 다리'(한길사)는 불과 반세기전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걸어간 기구한 운명을 밝히고 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1년부터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미얀마를 점령해 나갔다. 그러나 1942년 이후 연합군의 반격으로 해상보급로가 위협받기 시작하자 육로를 통한 보급품 공급작전을 구상한다. 밀림과 계곡을 관통해 태국의 논프라독과 미얀마의 탄비자야를 잇는 비밀철도 건설이었다
일본군 대본영은 1942년 4월부터 5월까지, 조선 전역에 걸쳐 영어를 할 줄 아는 청년들을 색출해 내는 특별 징용령을 내렸다. 각 군마다 3~6명씩 강제 배정해 전국에서 3000여명을 긁어모았다. 모집 명분은 '군속'으로, 월급과 계약기간 2년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해당자가 스스로 지원한 것처럼 통지서를 발급했다.
이들 3000명은 그해 6월 부산 노구치부대에서 2개월간 특별훈련을 받았다. 이 중 300명의 친일 유력인사 자제들은 한국에 남고, 나머지 2700명은 3000톤급 '광산호'를 타고 동남아 전선으로 이동했다.
2700명 가운데서도 영어를 가장 잘하는 것으로 조사된 300명은 사전분류돼 가장 난공사 지역인 콰이강다리 공사현장, 즉 제4포로수용소와 인근 포로수용소에 배치돼 연합군 포로들을 담당했다. 맡은 일은 통역, 서무보조, 경계근무(포로감시), 취사 등이었다. 그들은 모두 창씨개명한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 이름으로 불렸고, 서류에도 일본국적으로 표기됐다.
일본군의 패전후 대부분의 군속들은 귀국선을 탔다. 하지만 콰이강의 다리 공사장에 있던 군속들은 모두 전범혐의자로 체포돼 방콕형무소에 수감됐다. 이 다리 공사가 워낙 많은 희생자를 낸 곳이어서, 연합군 포로들의 적개심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1947년 8월7일 영국 외무성이 발표한 콰이강 철도공사 중 사망자 내역은 연합군 2만명. ------
1999 동아닷컴 김영신 기자 글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