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처음 오신 부모님 혹서기훈련하고 귀국한 이야기 - 끝
여자처자 이케저케 끝났던 뭔가 하기는 했는데 정신이 없었던 어제가 지나고, 다시 아침은 밝았다.
오늘은 부모님이 방콕에서 보내시는 마지막 날이자 공항에 가셔야 하는 날이다.
아쉬우면서도, 또 뭔가 살짝 홀가분하다.
어젯밤은 내 침대를 양보하고 바닥에 요가매트를 깔고 비치타올을 덮고 잤기 때문에 이제 드디어 한 달만에 내 침대에 누울 수 있다는 게 기대되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혼자 나와서 산 지가 거의 반 년이 다 되어가다 보니 이제는 킹사이즈 침대를 가로질러 뒹굴며 자는 것이 익숙해져서 누군가와 같이 자는 게 오히려 어색해졌다.
역시나 오늘도 내가 제일 늦게 일어난 터라 부모님은 이미 냉장고에서 물 꺼내 드시고, 내 노트북을 열어서 인터넷 뉴스도 보시면서 내가 일어나길 기다리셨다.
분명히 배가 고프셨을텐데 곡기가 될 만한 것들은 드시지 않은 걸 보니까 뭔가 밥을 해야겠다는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한 달 동안 남에게 세 내어줬다가 들어온 집에는 딱히 먹을만한 것이 없어서, 결국 귀중한 짜왕 마지막 한 봉지와 설 연휴 때 놀러왔던 친구가 떡국을 끓여주겠다며 사왔다 남은 떡을 불려서 1.5인분의 요기거리를 만들어 냈다.
심지어 물도 거의 모자란 상태라 할 수 없이 수돗물로 면이랑 떡을 삶았는데 뭐 이제는 석회랑 친해질 때도 되었다 싶다.
당이나 조금 충전하고 나가서 맛있는 걸 먹자고 말씀드리고는 나갈 준비를 한다.
오늘만큼은 나도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여행자 느낌을 내고 싶어서 오랜만에 튜브톱의 맥시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역시 오늘도 태양이 가장 뜨거운 시간에 집을 나가게 된다.
일층의 보안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몇발짝 나와서 가는데 갑자기 발이 앞으로 훅- 나간다.
뭔가 했더니 4년 동안 잘 신어오던, 운남 여행에서 똑같이 쪼리가 끊어졌을 때 중국 친구가 사줬던 쪼리가 끊어져버렸다.
그래, 중국산이 4년을 버텼으면 잘 한거다 싶으면서도 그 때가 생각나 버리기가 아쉽다.
나만 혼자 집으로 돌아와 나가서 신발을 꼭 산다 하는 마음가짐으로 운동화를 신는다.
원래 티켓을 끊기 전의 계획은 토요일 저녁에 공항에 가는 것이었지만 황금연휴라 그런지 임시공휴일 지정 전인데도 불구하고 일요일 새벽 출발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말을 방콕에서 보내는 건 딱 하루 첫 날 일요일 뿐이어서 그 때는 매끌렁과 암파와 시장을 갔다 온 상황이라 결국 짜뚜짝은 구경을 못 하게 되었다.
어쨌든 태국 갔다 왔다는 걸 티 내려면 기념품을 사 가야 하는데, 금요일 낮에 그나마 마땅한 곳은 마분콩 뿐이었다.
MRT를 타고 스쿰빗에 내려서 다시 BTS를 타고 싸얌으로 간다.
택시를 탈 수도 있었지만 '다양한 교통수단 체험'의 목적을 가지고 꽉꽉 막힌 길을 내려다 보며 갈 수 있는 지하철을 선택했다.
물론 대구 3호선도 하늘 위로 다니는 것은 같지만 외국에 나와서 신기한 건물들 사이로 다닌다는 것은 더 재미있는 경험이니까.
요 며칠 동안 두 분이 봤던 방콕은 지하철도 없고 70년대 버스가 다니는 동네였다면, 오늘은 최첨단의 방콕을, 방콕 시내 구경을 하는 날이기 때문에 조금은 놀라신 눈치였다.
싸얌에 내려서 걸어가야 되는데 내가 길을 잃어버렸다.
서울 사람이라고 맨날 홍대나 이태원에 가는 게 아니듯이, 싸얌은 처음 태국에 여행 왔을 때 시내 구경이랍시고 한 번 나와본 게 다였다.
일단은 덥기도 하고 밥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파라곤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부모님은 파라곤이나 센터 같은 현대적 건물을 안 좋아하셨다.
나도 물론 그렇지만 다른 나라에 가면 그 나라만의 특징적인 것을 보는 걸 목표로 하는데 싸얌어쩌고 시리즈는 우리 눈에는 그냥 영등포 타임스퀘어 그 정도일뿐...
그래서 그런지 빨리 나가자고 시원하긴 한데 재미가 없다고 하셔서 바로 밥을 먹으러 간다.
집에서 면을 먹고 나왔지만 유독 파스타와 피자가 끌리던 날이라, 태국어 학원 선생님이 포스팅 해놨던 맛집을 찾아서 요리조리 길을 찾아 센터로 간다.
센터 3층에 있던 온더테이블이라는 일본식 서양요리 집이었는데 사진을 보여주며 주문을 하니 바로 알아봐주었다.
양이 많을까봐 피자 하나 파스타 하나만 시켰는데 의외로 크기가 작아서 돈까스밥을 하나 더 시켜 먹었다.
이제서야 몸에 기운이 좀 돌고 어디를 돌아다닐 만한 체력이 충전된 듯했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마분콩으로 간다.
예~전에 왔던 기억으로는 일층 어딘가에 기념품이 될만한 것들을 많이 팔았던 것 같은데 우리가 들어간 곳은 4층이었다.
거기서 또 헤매고 헤매다 겨우 일층으로 와서 쭉 돌아보니 마침 코끼리 동전지갑이 나왔다.
세 종류가 들은 파우치 세트도 같이 팔고 있던 곳이라 적당~히 깎아서 많이 사고 바로 나오려다 쿠션커버 파는 곳을 발견했다.
엄마는 이게 더 이쁠것 같다 하시며 열 장을 사면서 하나당 10밧씩 깎고는 한 장을 더 산다.
처음 마분콩을 찾으면서 스퀘어 쪽을 돌아다녔는데 그 때 아빠가 서빙고를 보시더니 이따 쇼핑하고 저기서 후식을 먹자 하셔서 글로는 표현되지 않는 장시간의 쇼핑을 마치고 서빙고로 간다.
가는 길에 연결통로에서 엄마랑 둘이 샌들도 하나씩 사고서는 250밧을 내고 나는 이제서야 신발을 갈아신는다.
서빙고에 들어갔더니 한국사람은 찾을 수가 없고 대부분 태국 젊은이들로 꽉 차있어서 조금은 이질감이 느껴졌지만 구석에 자리를 잡고 메뉴를 고른다.
작은 빙수 두 개를 시키고 싶었지만 망고 빙수는 큰 것만 된다고 해서 결국 두 개에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까지 시켰더니 양이 너무 많아졌다.
에어콘이 빵빵하게 나오는 곳에서 얼음을 씹어먹으면서 오돌오돌 떨면서도 뜨거운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몸도 안 풀리고 해서 마사지를 받으러 가자고 했지만 두 분은 남이 내 발을 만진다는 서비스에 대해서 조금 불편한 느낌을 받으셨던건지 집으로 가자고 하신다.
짐이 꽤 생긴 관계로 택시를 타고 집 근처의 빅씨에서 내린다.
여기서 여러가지를 사다보면 아마 시간은 공항에 갈 때쯤이 될 것이다.
나는 내 생활에 필요한 장을 보고 엄마는 동생이 사다 달라고 한 패션프룻 주스랑 피쉬소스같은 것들을 포함해서 타이거파스, 근육연고, 야몽 등을 사다보니 어느새 돈이 꽤 나왔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 돈으로 카트를 채운다면 아마 몇 가지 못 살거라는 생각으로 여행의 마지막에 후회없이 남은 돈을 다 쓰고!
다시 이고지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들어오면서 밥을 먹을까 했지만 상황이 애매해서 내가 나가서 밥을 사 온다고 했는데 막상 딱히 드시고 싶은건 없으신 듯 하여 아까 사왔던 나의 소중한 신라면을 세 개 꺼낸다.
방콕에서의 마지막 밥은 한국 적응용 식단 신라면이 되었고 내가 한국에 가기 전까지 두 달 동안 쓰지 않을 것 같은 짐 몇가지와 함께 캐리어를 꽉꽉 눌러 담는다.
(나중에 내가 집에 올 때 생각해보니 부모님이 가실 때 웬만한 물건을 많이 보낼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초과수하물 때문에 돈 냈는데ㅜㅜ)
(발이 너무 새카맣다...)
일층에서 택시를 잡아 타고 공항으로 간다.
이번 여행에서 뭐가 제일 좋았고 별로였는지 질문의 시간을 가졌는데 엄마는 암파와에서 보트를 타고 반딧불을 봤던 게 제일 좋다고 하셨다.
나는 친구가 놀러왔을 때도 보러 갔었지만 그냥 우와- 하고 마는 정도였는데, 아마 어릴 때 이후로 못 보던 반딧불이 반가우셨던 것 같다.
아빠는 깐짜나부리가 제일 좋으셨다고, 숙소도 제일 좋고 에라완 폭포도 너무 좋았고 영화에서만 보던 역사적 장소를 직접 눈으로 보는 것도 좋았다고 하셨다.
특히 숙소가 좋다고 하셨는데 방콕이랑 아유타야에서 잡은 숙소는 리조트 형태가 아니고 그냥 건물 하나 띡 있는 스타일여서 그런지 깐짜나부리의 수영장이 있고 강에 면한, 자연친화적인 그 곳과는 많이 비교가 됐나보다.
다음에 오시면 시내에 있는 루프탑 수영장에다 조식도 백 가지는 나오는 그런 숙소로 한 번 모셔야지 싶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여행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공항이다.
공항에 오면 항상 기분이 이상하다.
내가 떠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돌아가는 누군가를 보내주려 올 때도 그냥 공항에 오면 기분이 이상하다.
그리고 오늘은 왠지, 괜히 더 이상하다.
체크인을 하고 났더니 한 시간 정도가 남아서 3층에 있는 커피숍에 갔다.
저녁이 부실해서 그런가 빵을 드시고 싶다 하셔서 차에 빵에 커피에 수다까지 더해서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
지금부터 두 달 뒤에나 보게 될 두 분이라 그런지 씁쓸하기도 하고 누가 왔다 가면 항상 이틀 정도는 평소보다 더 외로워지는 기분이 들어서 조금 아쉽기도 했다.
또 하필 오늘 엄마가 발을 두 번이나 삐어서 약간 절룩거리게 되셨는데 그것도 마음에 걸리고 괜히 마지막까지 무리해서 다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이제는 들어가야 할 때가 되었다.
나도 이제는 슬슬 공항철도가 끊길 때가 되어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두 분을 바래다 드리고 집으로 왔다.
와서 바로 잠이 들고는 그 다음날 일찍 일어났더니 도착해서 집으로 가고 있다는 카톡이 와 있었다.
잘 가셨다니 다행이고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이다.
이제 다시 내가 걱정거리가 되었다.
아마 내가 한국에 가기 전까지는 매일 기도하시고 걱정하시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기우였던 것이다.
오자마자 쿠션커버 더 사오라고 사진을 보내신다.
예 알겠습니다 사다드립죠 하고는 역시 이래야 우리 부모님이지 하는 생각이 든다.
- 에필로그 -
부모님 오셨는데 이렇게 놀다 가셨어요- 나름 적당히 잘 쓰고 가신듯?
이라는 생각으로 그냥 한 번 올려봤던 여행기였는데,
나름의 관심도 받고 기다렸다고까지 해 주시는 분들도 있어서 즐거웠어요.
중간에 갈피를 못 잡고 횡설수설하는 날도 있었지만요ㅋㅋㅋ
물론 매주 올리려던 계획은 게으름과 귀국 준비로 인해서 무산돼서 뭔가 책임을 다 하지 못한 꼴이지만,
지구력이 부족한 저같은 사람에게는 어떤 하나를 시작하고 또 끝을 보는게 쉬운 일은 아니네요.
이번 여행은 제 개인적으로는 성장이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또 부모님을 '모시고' 다녀 온 여행이 아닌 새로 여행친구를 만난 느낌이었어요.
보통 부모님을 떠올리면 모셔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일이 잦은데 이번에 제대로 느꼈어요.
나에게는 부모님이지만 그 분들도 주체적인 분들이고 다만 나보다 나이가 들었고 자식이 있다는 게 다를뿐이죠.
아직 하고 싶은게 많은 분들이고 할 수 있는게 많은데 '부모'라는 이름으로 가둬놓고 생각하기에는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셨어요.
(아 물론 저희 부모님은 하고 싶은거 웬만큼 다 하고 사셔요 저에게도 그렇게 가르쳐 주신 분들이구요)
덕분에 제가 너무 많은 걸 배운 계기가 되었어요.
여러모로 감사드려요 부모님도, 우리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많은 분들도요.
아직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가지 못 했던 분들이라면 꼭 한 번은 가보시길 추천해요.
저는 혼자 다니는 걸 좋아해서 그냥 표가 손에 잡히는 대로, 시간이 나는 대로 다녔지만 이제는 시간을 맞춰서, 시간을 내서 더 다녀보려 해요.
다음 목적지는 겨울방학에 치앙마이를 포함한 북부 지역이에요.
다들 시간이 나야할텐데 하는 조바심도 있지만 이번처럼 티켓부터 질러버리면 되겠죠!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께도 감사해요 너무 재밌는 댓글들도 많았구요.
아 그렇다고 이제 활동을 그만 한다거나 하는건 아니구요 (나만 아쉽나)
카메라에 많은 사진들이 남아있어요 남부라던가 방콕 시내라던가 그냥 태국에서의 사소한 일상 같은거요.
도움이 되는 정보로 많이 가져올게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태사랑 까페에 올렸던 글 복사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