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오래 전 여행의 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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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오래 전 여행의 이야기(2)

봄길 4 849
옛날을 회고할 때 잔잔한 미소만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축복된 사람일까요. 그렇지만 사람은 때때로 자신을 위해서만 아니라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때문에 아픔을 느낄 수 있음을 어찌 아니라 하겠습니까?
어저께 40여년전 일을 기억하며... 먼저 세상을 떠난 형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기억에서 지우려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굶주림에 아파하던 유년 시절의 고통이 저의 뇌리를 파고듭니다. 어쩌면 한번도 사는 것이 재미있다 느껴보지 못했음직한 형의 세상에서의 날들을 슬퍼합니다.
5학년때 아버지가 세상을 떴고 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관계가 있는지 모르지만 그때부터 우리는 세끼를 쌀밥을 먹으며 살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고 하던 말을 어린 제 귀에 들려주곤 하였습니다. 그때문에 과거를 기억하는게 자주 부끄럽고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벌거숭이 산들을 가로질러 열차는 가다서다 제 갈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영문도 모른 채 이름 모를 역에서 한없이 서서 멈추기를 계속합니다. 투덜대는 사람들, 결국은 모두 지쳐 주저앉고맙니다.
저는 그나마 출발역인 부산진역에서 탄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출발 때부터 자리에 앉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객차의 좌석은 지금보다 비할데없이 좁고 노후합니다. 거기에 사람들은 한 줄에 세명이 끼여앉아 불편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저는 부산 사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경부선 보급편은 거의 발디딜 틈이 없이 꽉 차 있었습니다.(보통, 보급, 특급으로 구분했습니다) 아버지는 화장실을 갈 때마다 좌석에 짐을 둔채 제게 당부를 합니다. 누가 앉으려 하면 우리 아빠 있어요. 라고 말해. 앉지 못하게 말이다.
정말 실컷 기차를 타보았습니다. 몸과는 달리 마음은 하나도 피곤한 줄을 모릅니다. 오히려 같은 돈을 내고 기차를 오래 타면 좋을 텐데 왜 사람들은 짜증을 낼까 궁금하기만 했습니다.
아마도 10시간은 넘어 간것 같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각에 영동역에 닿았습니다. 아버지는 걸음을 재촉합니다. 빨리 가지 않으면 보은행버스 막차를 탈 수 없다고 합니다. 또 시발택시를 탔습니다. 엄청난 호강을 하는 것입니다.
이 택시 이름이 어릴 때 늘 궁금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도 시발은 욕이라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거의 20대가 되기까지 이와 같은 욕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시발일까? 택시운전사들이 욕을 잘해서 그렇다는 말도 했습니다.
여섯살 위의 누이가 경남여중을 들어갔습니다. 그제서야 그 말이 욕이 아니라 civil taxi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에 경남여중은 명문이었습니다. 가문에 처음으로 중학교 물먹은 사람이 났는데 누이가 경남여중을 합격한 것입니다. 가문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ㅎㅎㅎ
버스를 타고... 참 버스도 처음 타 봤습니다. 쇠로 만든 열차며 또 버스가 저절로 빠르게 굴러가는 것이 너무 신기하였습니다. 보은은 법주사가 있는 속리산 방향입니다. 구비구비 가다가 어느 곳에서부터인가 해가 완전히 기울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논에 물이 찬 곳을 지날 때 꼭 버스가 물속으로 달리는 것같아 아빠에게 매달리던 기억이 납니다. 어두워져서야 보은에 닿았습니다. 어느 친척집에 가 잠을 잤습니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잠을 깼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형님이 되시는 어른 집에 인사를 가서 그 집에서 아침을 먹는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눈을 부비며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논두렁 길을 걸어 그 댁으로 갑니다. 왠지 아버지가 긴장을 하는 것같습니다. 그게 어린 제게 느껴집니다. 저는 그 이유를 조금 지나 제 스스로 알게 되었습니다.
길을 나서자 집마당에서부터 생경한 경험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 아버지께 인사를 깍듯이 합니다. 제가 더 놀란 것은 중학생 나이나 된 그 집 아들들이 제게 아저씨라 하며 높임말을 하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부산에서는 피껍데기 취급을 받던 아버지와 제가 그렇게 존대를 받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향이 좋아지려 했습니다.
길을 나서자 그 놀라움은 더해집니다. 보는 사람들- 머리가 허연 노인들까지 아버지와 저에게 인사를 합니다.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저를 보고 도련님, 도련님 하며 예를 바칩니다. 그리고 20살이 넘은 듯한 자식들을 때리면서 도련님께 인사를 드리지 않는다고 꾸중을 합니다.
아버지께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곳은 우리 가문이 사는 동네인데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예전부터 머슴을 살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고향에는 2대 독자인 친척들이 모여사는데 아버지보다 더 어른이 지금 찾아가는 아저씨 한 분 뿐이라고 말합니다.
너무 조심이 됐습니다. 그다지 반가운 모습들이 아닌 듯합니다. 아버지와 그 아저씨는 6촌간입니다. 머리가 벗겨지고 안광이 강렬한 아주 단단해 뵈는 분이었습니다. 두분 사이에 무슨 기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침 상이 나왔습니다. 두 분의 겸상인데 저를 끼워주었습니다. 설날이 지나고 그리 오래 되지 않아 그런지 상이 제법 차려진 것입니다. 제가 눈치를 한참이나 보고 있는데 배에서는 꼬르록 소리가 그치지 않습니다. 뭣때문인지 두분이 식사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수저를 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제일 먼저 굴비머리에 젓가락을 가져갔습니다. 너무 먹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젓가락이 굴비머리에 닿는 순간 제 눈앞에 별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뇌성이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저씨가 어른이 손대지 않았는데 음식에 손을 댄다고 긴 장죽(담뱃대)으로 제 머리를 때린 것입니다. 나서 처음 맞아봤습니다. 애를 어떻게 가르쳤냐 하면서 야단입니다. 버르장머리가 있니 없니 하면서... 아버지는 애가 고향에 와서 신이나서 그러는 걸 꼭 때려야하오.
결국 아침을 거르고 그 집을 빠져 나왔습니다. 먹고싶은데 히잉. 그 길로 5리나 떨어져 있는 버드네 아주머니 집으로 갑니다. 배는 고프고 심심도 한데... 가다가 갑자기 아버지가 나를 가만히 있으라 합니다. 그러고는 나무 가지를 꺽더니 갑자기 길바닥을 막 찍어대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니 왠 쥐새끼같은 것을 건져올립니다. 두더쥐랍니다. 왜 잡았어요???
아버지는 6살 손위 누이가 어두운 방에서 책을 볼 때마다 '여자가 공부는 무슨 공부냐, 국민학교 졸업해서 돈벌러가면 되지.'하며 늘 꾸짖었는데 그 때문에 누이는 자주 울곤 했습니다. 그 누이가 눈이 나빴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두더쥐가 눈이 나쁜데 약이 된다고 하더군요.

대강 제가 기억하는 처음 여행의 기억입니다. 제게는 정말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4 Comments
네페르티 2005.05.14 11:53  
  참따뜻합니다
Miles 2005.05.14 13:48  
  지나간 우리네 어린시절 한편의 영화를 보는듯 징~합니다[[그렁그렁]]
곰돌이 2005.05.14 14:42  
  ㅎㅎㅎ 고향에 가면 재밌지요..나보다 나이 많은 조카도 있고... 외가에 가면 나보다 어린 외삼촌도 있고....
아버님께서, 그와중에도 따님을 위해서 두더지를....
이 미나 2005.05.15 00:01  
  1차경제개발경제..5개년계획.
스피커에.."새벽종이 울렸네~"외쳐서,길거리를
쓸어도..엄마없는 배고픔의 시절이었죠.
아버지 손잡고 가던 고향길 추억이 되살아 납니다.
봄길님..항시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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