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태국,캄보디아 배낭여행 18일- 다시 방콕으로
9. 8일째(1월 14일): 다시 방콕으로(버스 14시간)
4일 중에서 이틀 밤을 다른 겟하우스에서 잠을 잤다. 원래 배낭여행을 떠나면서 모든 밤을 낯선 곳에서, 같은 방에선 결코 이틀밤을 자지 않기로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서 두 군데에서 이틀 밤씩 묵은 것이다.
아침 7시 다시 방콕 행 버스를 타기로 했다. 캄보디아에서 5일간 정들었던 티엔과 헤어지고 8시 반이 되어서야 버스를 탔다. 올 때 너무나 힘들어서 마음의 각오가 새롭다. 비포장 약 3시간거리 포장길 2시간 정도를 달리니 아란이 나온다. 다시 출국 심사를 마치고 태국으로 접어든다.
저들 농가엔 꽃이 보이지 않는다. 꽃같은 장식품을 기르기엔 너무 힘들기 때문일까? 아니다 자연 그 자체가 바로 꽃보다 아름다운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리라. 무슨 꽃이 필요하랴, 시멘트와 철골로 둘러싸인 도회지의 생활에서 지친 이들에게 화초와 분재는 잠시의 위안거리로 등장한 문명의 산물은 아닐까?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서 오는 방콕 행은 지루했지만 갈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미 경험해 보았고, 몸도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차츰 여행에 적응하며 흥미의 가속을 붙이고 있는 것이리라.
캄보디아의 가난, 문명인들의 침입은 행복하게 살고 있는 가난한 이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든다. 그리고 가난은 돈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결혼이 그렇고 부정과 부패 그리고 불평등한 사회, 심지어는 매춘까지도 모두 모두 가능하게 만들고 만다. 가난 때문에 그들은 이용당하고 서러워도 말못하고 설움을 겪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가진 자들의 요구대로 시간을 맞추는 구속에서 버둥거리며 그들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살아가야 하는 삶,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고, 나 또한 오늘 그런 굴레를 벗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서글픈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캄보디아여, 빨리 가난에서 벗어나 다오, 그래서 빨리 당신들 선조들이 누렸던 옛 영화를 되찾고 세계사에 우뚝 설 수 있도록 그대들이여 분발해 다오.
안녕 캄보디아여.
역시 두 번째 14시간여의 강행군 끝에 도착한 카오산 거리는 입추의 여지가 없이 세계의 젊은이들로 가득찼다. 가장 중심이 되는 거리에는 수백, 수천 명에 이르는 이번 쓰나미로 인한 실종자들의 개인사진, 또는 가족사진이 붙어 있고 주변엔 이 사진들을 살펴보는 사람들이 무슨 구경거리를 보듯 늘어서 시선을 붙이고 있었다. 저들 실종자 모두는 약간의 시간을 달리할 뿐, 우리와 똑같은 생각과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온 사람들일텐데, 한 무리는 죽음으로 향하고 한 무리는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기대와 유흥으로 가는 그야말로 극과 극의 길의 정반대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니 나는 정말 이러고도 아무 일 없는 것인지 다시 한번 자신의 모든 것이 돌이켜졌다.
늦게 찾아간 대부분의 게스트 하우스는 이미 룸이스 풀이라고 붙여놓고 그러지 않는 곳 몇 군데는 500밧 이상 터무니없는 값을 부르고 있었다. 10시 30분 무렵부터 무려 30군데를 찾아다니다 헛걸음을 하다 일찍이 책에서 보아 둔 에플 케스트하우스라는 한적한 곳에 위치한 곳을 찾아가니 너무 늦은 시간이라 이미 문이 닫혀 있다. 염치불구하고 벨을 울렸다. 영 아닌 표정으로 왜 그러느냐고 묻는다. 아니 나그네가 여관에 왔으면 뻔한 것이지, 사정하는 표정을 했다. 다행히 150밧부터 값부터 말한다. 노프러브럼 no problem-아마 가장 많이 사용한 말일걸-3층으로 안내해 주는데 불빛이 깜박거리고 욕실도 없고, 다른 곳 옮겨 달라고 했더니 이번엔 욕실이 달린 아래층을 준다. 지금껏 머문 곳 중에서 최고인 듯하다. 매일 하는 일, 속옷을 빨고 샤워를 하고 나니 12시 20분이다. 내일은 치앙마이로 가보고 싶은데, 열차를 탈 수 있을까.
4일 중에서 이틀 밤을 다른 겟하우스에서 잠을 잤다. 원래 배낭여행을 떠나면서 모든 밤을 낯선 곳에서, 같은 방에선 결코 이틀밤을 자지 않기로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서 두 군데에서 이틀 밤씩 묵은 것이다.
아침 7시 다시 방콕 행 버스를 타기로 했다. 캄보디아에서 5일간 정들었던 티엔과 헤어지고 8시 반이 되어서야 버스를 탔다. 올 때 너무나 힘들어서 마음의 각오가 새롭다. 비포장 약 3시간거리 포장길 2시간 정도를 달리니 아란이 나온다. 다시 출국 심사를 마치고 태국으로 접어든다.
저들 농가엔 꽃이 보이지 않는다. 꽃같은 장식품을 기르기엔 너무 힘들기 때문일까? 아니다 자연 그 자체가 바로 꽃보다 아름다운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리라. 무슨 꽃이 필요하랴, 시멘트와 철골로 둘러싸인 도회지의 생활에서 지친 이들에게 화초와 분재는 잠시의 위안거리로 등장한 문명의 산물은 아닐까?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서 오는 방콕 행은 지루했지만 갈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미 경험해 보았고, 몸도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차츰 여행에 적응하며 흥미의 가속을 붙이고 있는 것이리라.
캄보디아의 가난, 문명인들의 침입은 행복하게 살고 있는 가난한 이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든다. 그리고 가난은 돈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결혼이 그렇고 부정과 부패 그리고 불평등한 사회, 심지어는 매춘까지도 모두 모두 가능하게 만들고 만다. 가난 때문에 그들은 이용당하고 서러워도 말못하고 설움을 겪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가진 자들의 요구대로 시간을 맞추는 구속에서 버둥거리며 그들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살아가야 하는 삶,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고, 나 또한 오늘 그런 굴레를 벗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서글픈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캄보디아여, 빨리 가난에서 벗어나 다오, 그래서 빨리 당신들 선조들이 누렸던 옛 영화를 되찾고 세계사에 우뚝 설 수 있도록 그대들이여 분발해 다오.
안녕 캄보디아여.
역시 두 번째 14시간여의 강행군 끝에 도착한 카오산 거리는 입추의 여지가 없이 세계의 젊은이들로 가득찼다. 가장 중심이 되는 거리에는 수백, 수천 명에 이르는 이번 쓰나미로 인한 실종자들의 개인사진, 또는 가족사진이 붙어 있고 주변엔 이 사진들을 살펴보는 사람들이 무슨 구경거리를 보듯 늘어서 시선을 붙이고 있었다. 저들 실종자 모두는 약간의 시간을 달리할 뿐, 우리와 똑같은 생각과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온 사람들일텐데, 한 무리는 죽음으로 향하고 한 무리는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기대와 유흥으로 가는 그야말로 극과 극의 길의 정반대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니 나는 정말 이러고도 아무 일 없는 것인지 다시 한번 자신의 모든 것이 돌이켜졌다.
늦게 찾아간 대부분의 게스트 하우스는 이미 룸이스 풀이라고 붙여놓고 그러지 않는 곳 몇 군데는 500밧 이상 터무니없는 값을 부르고 있었다. 10시 30분 무렵부터 무려 30군데를 찾아다니다 헛걸음을 하다 일찍이 책에서 보아 둔 에플 케스트하우스라는 한적한 곳에 위치한 곳을 찾아가니 너무 늦은 시간이라 이미 문이 닫혀 있다. 염치불구하고 벨을 울렸다. 영 아닌 표정으로 왜 그러느냐고 묻는다. 아니 나그네가 여관에 왔으면 뻔한 것이지, 사정하는 표정을 했다. 다행히 150밧부터 값부터 말한다. 노프러브럼 no problem-아마 가장 많이 사용한 말일걸-3층으로 안내해 주는데 불빛이 깜박거리고 욕실도 없고, 다른 곳 옮겨 달라고 했더니 이번엔 욕실이 달린 아래층을 준다. 지금껏 머문 곳 중에서 최고인 듯하다. 매일 하는 일, 속옷을 빨고 샤워를 하고 나니 12시 20분이다. 내일은 치앙마이로 가보고 싶은데, 열차를 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