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태국,캄보디아 배낭여행 18일- 앙코르왓의 기적들
5. 4일째(1월 10일): 앙코르돔, 바이욘, 바퓨온, 코끼리테라스, Thomamon, 따프롬, 반티아이끄레이, 앙코르왓(앙코르의 기적들)
티엔이라는 오토바이 기사에게 하루 6불을 주기로 하고 4일간 내가 원하는 곳에 데려다 주기로 계약을 했다. 아침 7시에 오라고 해서 같이 앙코르왓으로 간다. 7킬로미터 거리이니 자전거로 혼자 차분히 다닐 수도 있었는데 어제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냥 오토바이를 타기로 했다.
현재 돈이 없어 장가를 못 간다는 녀석은 또 대학에 가서 가이드 수업을 받고 싶은데 돈이 모자란다는 THEN, 그는 장래 희망이 앙코르왓 가이드라고 한다. 그 직업은 상당한 돈을 벌 수 있다고 한다. 2년 정도 공부했다고 하는데 영어도 상당히 잘한다. 20년 공부한 나보다 잘한다. 부끄러울 지경이다. 물론 회화 위주로 했겠지만 어려운 단어도 쉽게 그 뜻을 알아차리는 것을 보면 상당한 실력이다. 부모님은 연로하셔서 일을 못하고 집에 그냥 계신다고 해서 얼마나 되는가 물어 보았더니 아버지 58, 어머니 55세라고 한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지금 72세인데 농사를 20마지 가량 짓고 계신다고 하니 놀라워 한다. 그는 하루 6달러를 받고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가 넘도록 아니 손님이 원하면 8시까지라도 같이 다니면서도 일이 없어 요즘 빈둥거리다가 이번 달에는 내가 처음 손님이라고 한다. 하루 6,300원 정도를 번다. 오토바이가 100만원 짜리라고 하니 기름을 손수 넣고, 오토바이 감가상각비를 제하고 나면 얼마짜리 장사가 되는지 그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40달러를 주고 3일 관람권을 샀다. 첫째 날은 앙코르돔과 앙코르왓, 둘째 날은 반테이스레이, 셋째 날은 롤레이, 그리고 넷째 날은 이곳 앙코르 유적이 아닌 톤레샾호수의 수상가옥을 구경하러 가기로 했다.
앙코르왓에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내가 그 동안 책과 사진에서 그 유명세에 대해서 보고 듣고 한 놀라움과 호기심을 실제 찾은 이 앙코르 유적은 나를 만족시켜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부터 들었다.
너무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데, 나는 겪었던 지난 여행에서 수많은 기대와 실망 등을 겪어 본 터라 이런 생각이 들었던가 보다. 어떻든 자, 가자. 그 어려움을 겪고 찾아 온 앙코르 아닌가.
처음 들른 앙코르 돔 입구에서 선 불상들, 오른쪽엔 악귀와 왼쪽에 선한 부처의 상이 들어서는 관광객들을 맞이했다. 그저 그렇게 놀랄 만하지 못했다. 앙코르돔이란 커다란 도시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곳은 세 차례에 걸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는데, 현재의 모습은 12세기 후반기부터 13세기 전반 가장 그 세력이 왕성했던 자야바르만 7세(1181-1201)세 때 건립되었는데 특히 바이욘 사원은 이곳을 수미산으로 삼아 미얀마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워진 요새라고 한다.
아, 바이욘의 오묘한 부조와 거대한 탑, 불상의 모습들을 보고부터 나는 조금씩 흥분하기 시작했다. 바이욘 사원으로 들어가는 성벽에는 입체적으로 가득히 부조가 되어 있었다. 대체로 그 벽의 부조는 자야바르만 왕조 당시의 타민족과의 전쟁과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담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 점은 앙코르왓의 벽화가 힌두교 신화의 내용을 부조로 한 것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 벽화 위로 당시에는 모두 지붕이 있었는데 무너져 현재는 벽만 남아 있고 복원이 거의 안된 것이라고 한다.
부조에 새겨진 전쟁의 모습에는 중국인들이 등장하는데 당시 중국인들이 인도 무역을 개척하기 위해 실크를 생산하기 위해 산뽕나무를 북부에 심자 전쟁이 일어났다는 내용, 자야바르만 7세가 전쟁터에서 장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전쟁에서 다른 장수들은 코끼리를 타게 하고 자신은 말을 타고 전쟁에 참가하는 장면, 돼지가 수레에 끼어 있는 모습, 공부하는 장면에서 화교는 졸고 있는 장면들, 그리고 똔레삽 호수 싸움에서 고기가 너무 많아 노에 걸려 노를 젓기가 힘들 정도였다는 장면, 잘사는 집 아기 낳는 장면 등 모든 벽화에는 나름대로의 뜻이 담겨져 있다. 아이 낳는 장면은 재미있다. 시어머니 주름살까지 잘 묘사되어 있는데 딸을 기원한다고 하는데 오랜 전통이 여자의 집에 지참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해서란다. 도둑질, 노름(중국인과 크메르족), 투견과 돼지싸움 노름, 특공대(해병의 시초)가 참족과의 전투로 배에 구멍을 내는 장면, 죄인을 죽이면서 눈과 뒷목을 창으로 찌르는 무시무시한 장면도 있었다.
한 단을 올라서니 이제 실내로 들어갈 수 있다. 이곳은 나중에 아유타야가 침범해서 불상을 모두 파헤치고 천장을 훼손하였다고 해서 천장이 원래는 곱게 단장되었는데 지금은 무두 파헤져 삭막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후에 아유타야를 침범해서 현재 태국의 아유타야의 불상들 대부분이 목이 잘린 채로 있다고 하는데......
다시 한 계단을 올라 약 10여미터 높이까지 오르니 이제 그곳에는 가로세로 약 4미터 정도에 높이는 약 5-6미터 정도의 엄청난 크기의 관세음보살의 얼굴을 가진 커다란 불상들이 사면에 놓여져 있고 자그마한 부처들도 셀 수 없이 많이 세워져 있는데 모두 합하여 50개라고 한다. 자, 저 커다란 불상은 자야바르만 6세의 얼굴을 본딴 것이라는 설이 가장 많습니다. 그러면 저 불상의 모습은 웃고 있을까요, 울고 있을까요? 예, 그것은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그렇게 변한다고 합니다. 한국인 가이드의 목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려왔다.
아, 그러고 보니 한국인들이 여기 저기 보인다. 용감하게 둘이 베트남과 프놈펜을 거쳐 이곳에 왔다는 제주도에서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여선생 둘을 만났다. 그 두 분은 다음날 반테이스레이에서도 다시 만나서 코코넛을 빨면서 30여 분 이야기를 하고, 사진을 찍고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헤어졌다.
바퓨온을 한바퀴 돌았다. 지금은 수리 중이어서 밖에서 구경할 수밖에 없는데, 성곽은 무너지고 폐허로 남아있는 부분이 너무나 많아 언제쯤 복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옆쪽으로 돌아가니 집 한 채가 있고 아이들 4명이 놀고 있다. 돼지가 마당 한 가운데 놀고 있고 아이들은 강아지 한 마리를 돼지에게 던지며 깔깔거리고 있다. 부모님은 일하러 나가신 듯하고 큰 아이는 막내를 등에 업고 동생들 둘을 데리고 집에서 놀고 있는 것이다. 집 구경을 한참이나 하다가 그늘을 찾아 무너져 있는 반반한 돌기둥 위에서 살짝 한숨을 잤나, 코끼리 테라스 위를 거닐어 보고 다시 아래로 내려와 부조물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코끼리테라스에서는 코끼리가 행렬을 하고 있다. 이 위에서 옛 영화를 누리던 왕들이 주요 행사 때 행차를 했고 한다. 부조가 너무나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잘 묘사되어 있었다.
따프롬(조상 브라만)은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쁘리아칸을 지었던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모시는 절로 1186년에 건립했다고 한다. 외벽은 동서 1킬로미터 남북 600미터에 이르지만, 안쪽의 사원은 사방 24미터로 작다 하지만 예전에는 승려가 5천명, 압싸라가 615명 그 외에도 1만명 이상의 사람들의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들의 가옥은 목조로 지어졌기 때문에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내부는 마치 영화에나 나올 듯한 폐허로 발견된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기 위해 일부러 복구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성벽이 무너지고 하늘을 찌를 듯한 10여 미터도 넘는 나무가 다시 그 위를 덮쳐서 수백 년을 자란 듯 이제 나무가 먼저인지 성벽이 먼저인지 모를 정도로 그대로 하나의 아름다운 유적을 이루고 있었다.
반티아이끄레이(작은 방들의 성)를 방문하고 오후엔 드디어 앙코르왓으로 갔다. 앙코르왓, 사원의 도시란 뜻을 지닌 종교적인 건축물로는 가장 방대한 넓이에(넓이 8ha라고 한다)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앙코르왓은 수많은 앙코르 유적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 중 대표적인 사원으로 불리고 있다.
아, 앙코르왓, 왜 사람들이 그렇게 찬사를 늘어놓는지, 왜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해 그렇게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을 쉽사리 했는지 짐작이 되었다. 더 이상 말을 못하게 만드는 웅장하고도 섬세한 모든 것을 갖춘 앙코르왓. 중앙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은 수미산(聖山)을 나타내고 주위의 탑 5개는 메루의 다섯 봉우리를 상징한다고 한다. 원래 이 지대는 3미터만 땅을 파도 샘물이 나오고 지하수가 흐른다는 무른 땅인데 어떻게 저 엄청난 무게를 간직한 탑이 천년이 다 되어가도록 아무런 변형이 되지 않고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며 지탱하고 있는지 그야말로 불가사의 중의 불가사의라고 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빼어난 석조 건축술, 즉 그 엄청난 하중을 분산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여 중앙의 탑과 바로 그 높은 곳 네 군데 연못에 담긴 물 무게를 이것과 이어져 있는 사원 전체의 건물에 고루 퍼지게 하는 기법을 이용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벽과 작은 석조물 하나하나에까지 그 무게가 고루 전달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껏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저 놀라움 그것이었다.
힌두교 사원인 앙코르 왓에는 거의 모든 벽면에 부조가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이 부조물은 앙코르 예술품 중 최고의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부조물은 인도의 고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히두교의 창세신화인 유해교반(우유의 바다 휘젓기) 등으로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유해교반으로 우리가 들어서는 뒷 벽면 중앙에 커다란 거북이가 만다라 산을 등에 지고 비슈뉴가 그 위에 올라 서 있는 모습으로 전체의 부조는 약 50미터도 넘어 보이는 긴 벽화이다. 이 양옆으로 머리 쪽에는 88명의 신이, 꼬리 쪽에는 92명의 아수라가 뱀을 안고 1,000년 동안 줄다리기를 했다는 전설을 표현하였다. 이 교반으로 바다는 뭍이 되고 선녀 압싸라와 신의 아내 락슈미가 생겨났으며 마지막으로 불사의 명약 암리타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다섯 탑이 놓여진 맨 위층까지는 꽤 높고 가파라서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위험하기까지 한데도 대부분의 관광객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한국인 목소리가 가장 많이 들린다. 여행객 중 절반은 한국인일 것으로 짐작이 된다. 결코 부끄럽지 않다. 우리의 국력의 상징 아닌가. 동양인은 가끔 보이는 일본인 몇과-한 때 일본인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중국인이 어쩌다 보일 뿐 다른 나라 사람들은 거의 발견하기 힘들었다.
앙코르왓을 구경하고 어둑할 무렵 시엠리업 시내를 혼자 걷다가 중국집에 들러 복음밥 비슷한 음식을 먹었다. 그런 대로 가장 먹을만했다. 하루 내내 걷기만 해서 너무 피곤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 그런데 나는 다시 놀랐다. 옆방에서는 어제 그 캐나다 녀석이 자리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잠을 청하고 있고 이야기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니, 이야기 상대는 이제 어제의 그 프랑스 여자가 아니라 전혀 생소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여자 역시 다른 곳으로 옮길 분위기가 아니고 같이 자려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거기서 서양 녀석들의 사고방식에 혐오증이 생겼다. 밤마다 여자를 바꾸는 놈, 혼자 여행을 하는 녀석들의 특징인지는 몰라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하며 잠으로 빠져 들었다.
티엔이라는 오토바이 기사에게 하루 6불을 주기로 하고 4일간 내가 원하는 곳에 데려다 주기로 계약을 했다. 아침 7시에 오라고 해서 같이 앙코르왓으로 간다. 7킬로미터 거리이니 자전거로 혼자 차분히 다닐 수도 있었는데 어제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냥 오토바이를 타기로 했다.
현재 돈이 없어 장가를 못 간다는 녀석은 또 대학에 가서 가이드 수업을 받고 싶은데 돈이 모자란다는 THEN, 그는 장래 희망이 앙코르왓 가이드라고 한다. 그 직업은 상당한 돈을 벌 수 있다고 한다. 2년 정도 공부했다고 하는데 영어도 상당히 잘한다. 20년 공부한 나보다 잘한다. 부끄러울 지경이다. 물론 회화 위주로 했겠지만 어려운 단어도 쉽게 그 뜻을 알아차리는 것을 보면 상당한 실력이다. 부모님은 연로하셔서 일을 못하고 집에 그냥 계신다고 해서 얼마나 되는가 물어 보았더니 아버지 58, 어머니 55세라고 한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지금 72세인데 농사를 20마지 가량 짓고 계신다고 하니 놀라워 한다. 그는 하루 6달러를 받고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가 넘도록 아니 손님이 원하면 8시까지라도 같이 다니면서도 일이 없어 요즘 빈둥거리다가 이번 달에는 내가 처음 손님이라고 한다. 하루 6,300원 정도를 번다. 오토바이가 100만원 짜리라고 하니 기름을 손수 넣고, 오토바이 감가상각비를 제하고 나면 얼마짜리 장사가 되는지 그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40달러를 주고 3일 관람권을 샀다. 첫째 날은 앙코르돔과 앙코르왓, 둘째 날은 반테이스레이, 셋째 날은 롤레이, 그리고 넷째 날은 이곳 앙코르 유적이 아닌 톤레샾호수의 수상가옥을 구경하러 가기로 했다.
앙코르왓에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내가 그 동안 책과 사진에서 그 유명세에 대해서 보고 듣고 한 놀라움과 호기심을 실제 찾은 이 앙코르 유적은 나를 만족시켜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부터 들었다.
너무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데, 나는 겪었던 지난 여행에서 수많은 기대와 실망 등을 겪어 본 터라 이런 생각이 들었던가 보다. 어떻든 자, 가자. 그 어려움을 겪고 찾아 온 앙코르 아닌가.
처음 들른 앙코르 돔 입구에서 선 불상들, 오른쪽엔 악귀와 왼쪽에 선한 부처의 상이 들어서는 관광객들을 맞이했다. 그저 그렇게 놀랄 만하지 못했다. 앙코르돔이란 커다란 도시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곳은 세 차례에 걸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는데, 현재의 모습은 12세기 후반기부터 13세기 전반 가장 그 세력이 왕성했던 자야바르만 7세(1181-1201)세 때 건립되었는데 특히 바이욘 사원은 이곳을 수미산으로 삼아 미얀마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워진 요새라고 한다.
아, 바이욘의 오묘한 부조와 거대한 탑, 불상의 모습들을 보고부터 나는 조금씩 흥분하기 시작했다. 바이욘 사원으로 들어가는 성벽에는 입체적으로 가득히 부조가 되어 있었다. 대체로 그 벽의 부조는 자야바르만 왕조 당시의 타민족과의 전쟁과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담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 점은 앙코르왓의 벽화가 힌두교 신화의 내용을 부조로 한 것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 벽화 위로 당시에는 모두 지붕이 있었는데 무너져 현재는 벽만 남아 있고 복원이 거의 안된 것이라고 한다.
부조에 새겨진 전쟁의 모습에는 중국인들이 등장하는데 당시 중국인들이 인도 무역을 개척하기 위해 실크를 생산하기 위해 산뽕나무를 북부에 심자 전쟁이 일어났다는 내용, 자야바르만 7세가 전쟁터에서 장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전쟁에서 다른 장수들은 코끼리를 타게 하고 자신은 말을 타고 전쟁에 참가하는 장면, 돼지가 수레에 끼어 있는 모습, 공부하는 장면에서 화교는 졸고 있는 장면들, 그리고 똔레삽 호수 싸움에서 고기가 너무 많아 노에 걸려 노를 젓기가 힘들 정도였다는 장면, 잘사는 집 아기 낳는 장면 등 모든 벽화에는 나름대로의 뜻이 담겨져 있다. 아이 낳는 장면은 재미있다. 시어머니 주름살까지 잘 묘사되어 있는데 딸을 기원한다고 하는데 오랜 전통이 여자의 집에 지참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해서란다. 도둑질, 노름(중국인과 크메르족), 투견과 돼지싸움 노름, 특공대(해병의 시초)가 참족과의 전투로 배에 구멍을 내는 장면, 죄인을 죽이면서 눈과 뒷목을 창으로 찌르는 무시무시한 장면도 있었다.
한 단을 올라서니 이제 실내로 들어갈 수 있다. 이곳은 나중에 아유타야가 침범해서 불상을 모두 파헤치고 천장을 훼손하였다고 해서 천장이 원래는 곱게 단장되었는데 지금은 무두 파헤져 삭막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후에 아유타야를 침범해서 현재 태국의 아유타야의 불상들 대부분이 목이 잘린 채로 있다고 하는데......
다시 한 계단을 올라 약 10여미터 높이까지 오르니 이제 그곳에는 가로세로 약 4미터 정도에 높이는 약 5-6미터 정도의 엄청난 크기의 관세음보살의 얼굴을 가진 커다란 불상들이 사면에 놓여져 있고 자그마한 부처들도 셀 수 없이 많이 세워져 있는데 모두 합하여 50개라고 한다. 자, 저 커다란 불상은 자야바르만 6세의 얼굴을 본딴 것이라는 설이 가장 많습니다. 그러면 저 불상의 모습은 웃고 있을까요, 울고 있을까요? 예, 그것은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그렇게 변한다고 합니다. 한국인 가이드의 목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려왔다.
아, 그러고 보니 한국인들이 여기 저기 보인다. 용감하게 둘이 베트남과 프놈펜을 거쳐 이곳에 왔다는 제주도에서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여선생 둘을 만났다. 그 두 분은 다음날 반테이스레이에서도 다시 만나서 코코넛을 빨면서 30여 분 이야기를 하고, 사진을 찍고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헤어졌다.
바퓨온을 한바퀴 돌았다. 지금은 수리 중이어서 밖에서 구경할 수밖에 없는데, 성곽은 무너지고 폐허로 남아있는 부분이 너무나 많아 언제쯤 복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옆쪽으로 돌아가니 집 한 채가 있고 아이들 4명이 놀고 있다. 돼지가 마당 한 가운데 놀고 있고 아이들은 강아지 한 마리를 돼지에게 던지며 깔깔거리고 있다. 부모님은 일하러 나가신 듯하고 큰 아이는 막내를 등에 업고 동생들 둘을 데리고 집에서 놀고 있는 것이다. 집 구경을 한참이나 하다가 그늘을 찾아 무너져 있는 반반한 돌기둥 위에서 살짝 한숨을 잤나, 코끼리 테라스 위를 거닐어 보고 다시 아래로 내려와 부조물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코끼리테라스에서는 코끼리가 행렬을 하고 있다. 이 위에서 옛 영화를 누리던 왕들이 주요 행사 때 행차를 했고 한다. 부조가 너무나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잘 묘사되어 있었다.
따프롬(조상 브라만)은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쁘리아칸을 지었던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모시는 절로 1186년에 건립했다고 한다. 외벽은 동서 1킬로미터 남북 600미터에 이르지만, 안쪽의 사원은 사방 24미터로 작다 하지만 예전에는 승려가 5천명, 압싸라가 615명 그 외에도 1만명 이상의 사람들의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들의 가옥은 목조로 지어졌기 때문에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내부는 마치 영화에나 나올 듯한 폐허로 발견된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기 위해 일부러 복구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성벽이 무너지고 하늘을 찌를 듯한 10여 미터도 넘는 나무가 다시 그 위를 덮쳐서 수백 년을 자란 듯 이제 나무가 먼저인지 성벽이 먼저인지 모를 정도로 그대로 하나의 아름다운 유적을 이루고 있었다.
반티아이끄레이(작은 방들의 성)를 방문하고 오후엔 드디어 앙코르왓으로 갔다. 앙코르왓, 사원의 도시란 뜻을 지닌 종교적인 건축물로는 가장 방대한 넓이에(넓이 8ha라고 한다)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앙코르왓은 수많은 앙코르 유적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 중 대표적인 사원으로 불리고 있다.
아, 앙코르왓, 왜 사람들이 그렇게 찬사를 늘어놓는지, 왜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해 그렇게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을 쉽사리 했는지 짐작이 되었다. 더 이상 말을 못하게 만드는 웅장하고도 섬세한 모든 것을 갖춘 앙코르왓. 중앙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은 수미산(聖山)을 나타내고 주위의 탑 5개는 메루의 다섯 봉우리를 상징한다고 한다. 원래 이 지대는 3미터만 땅을 파도 샘물이 나오고 지하수가 흐른다는 무른 땅인데 어떻게 저 엄청난 무게를 간직한 탑이 천년이 다 되어가도록 아무런 변형이 되지 않고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며 지탱하고 있는지 그야말로 불가사의 중의 불가사의라고 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빼어난 석조 건축술, 즉 그 엄청난 하중을 분산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여 중앙의 탑과 바로 그 높은 곳 네 군데 연못에 담긴 물 무게를 이것과 이어져 있는 사원 전체의 건물에 고루 퍼지게 하는 기법을 이용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벽과 작은 석조물 하나하나에까지 그 무게가 고루 전달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껏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저 놀라움 그것이었다.
힌두교 사원인 앙코르 왓에는 거의 모든 벽면에 부조가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이 부조물은 앙코르 예술품 중 최고의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부조물은 인도의 고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히두교의 창세신화인 유해교반(우유의 바다 휘젓기) 등으로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유해교반으로 우리가 들어서는 뒷 벽면 중앙에 커다란 거북이가 만다라 산을 등에 지고 비슈뉴가 그 위에 올라 서 있는 모습으로 전체의 부조는 약 50미터도 넘어 보이는 긴 벽화이다. 이 양옆으로 머리 쪽에는 88명의 신이, 꼬리 쪽에는 92명의 아수라가 뱀을 안고 1,000년 동안 줄다리기를 했다는 전설을 표현하였다. 이 교반으로 바다는 뭍이 되고 선녀 압싸라와 신의 아내 락슈미가 생겨났으며 마지막으로 불사의 명약 암리타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다섯 탑이 놓여진 맨 위층까지는 꽤 높고 가파라서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위험하기까지 한데도 대부분의 관광객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한국인 목소리가 가장 많이 들린다. 여행객 중 절반은 한국인일 것으로 짐작이 된다. 결코 부끄럽지 않다. 우리의 국력의 상징 아닌가. 동양인은 가끔 보이는 일본인 몇과-한 때 일본인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중국인이 어쩌다 보일 뿐 다른 나라 사람들은 거의 발견하기 힘들었다.
앙코르왓을 구경하고 어둑할 무렵 시엠리업 시내를 혼자 걷다가 중국집에 들러 복음밥 비슷한 음식을 먹었다. 그런 대로 가장 먹을만했다. 하루 내내 걷기만 해서 너무 피곤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 그런데 나는 다시 놀랐다. 옆방에서는 어제 그 캐나다 녀석이 자리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잠을 청하고 있고 이야기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니, 이야기 상대는 이제 어제의 그 프랑스 여자가 아니라 전혀 생소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여자 역시 다른 곳으로 옮길 분위기가 아니고 같이 자려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거기서 서양 녀석들의 사고방식에 혐오증이 생겼다. 밤마다 여자를 바꾸는 놈, 혼자 여행을 하는 녀석들의 특징인지는 몰라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하며 잠으로 빠져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