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pped moment @ Phi Phi
멀리서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보자 내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겉으론 태연한 척, 그를 못 본척 하며 그대로 해먹에 누워있었다.
이윽고, 그가 내 옆으로 왔다.
그리고는 그 역시 짐짓 태연한 척하며 물었다.
-레오나, 안 자고 뭐해?
-흐음...너 기다렸지...? 파티는 재밌었어?
-그냥 그랬어. 재미 없어서 빨리 왔어.
그는 발코니 한켠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너...오늘이 마지막 날이지?
-응...마지막 날이야...
- .....
- .....
-한국 돌아가면 제일 먼저 뭐 할거야?
-글쎄...일단 한국음식 먹고싶어. 김치랑 비빔밥이랑 뭐 그런것들.
-서울엔 뭐가 젤 유명해?
-음....음....Many cars...many buildings....crowded people...;;
(뭔가 태국에 없는 걸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태국에 없는 걸 꼽을 수가 없었다)
-흐응...그게 다야?
-음...딱히 뭐라 설명을 못하겠네. 겉으로만 보면 그래.
그런데 속속들이 보면 재밌는 것들이 많아.
-서울에 한 번 가보고 싶어.
-그래. 서울에 오면 연락해. 이번엔 내가 가이드 해줄께.
-응. 그럴께.
- .....
- .....
-넌 꿈이 뭐야?
-여기 사장님한테 노하우를 배워서 나만의 가게를 갖는 것. 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쓰는 것.
내 글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됐으면 좋겠어.
-헤에...멋있다.
-멋있기는. 갈 길이 멀어. 그러기위해선 해야 할 게 너무 많아.
우선 나부터 제대로 된 인간이 돼야지.
내가 떳떳해야 남들 앞에서 부끄럼 없이 내 얘길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음...이것도 해야되고 저것도 해야되고....
-워워워...레오나, Take it easy...;
너 여기 처음 왔을 때부터 쭉 지켜봤는데...넌 절대로 긴장을 풀지 않더라.
조금만 건드려도 스프링처럼 확 튀어오를 것처럼 말야. 제발 릴렉스해...
-어어...? 아닌데...? 나 여기서 진짜 릴렉스 했는데...?
-아니야. 널 더 풀어줄 필요가 있어.
- .....
에릭도 같은 말을 했었다.
어느 여름날,
아마 함께 나들이를 갔다 온 날이었을거다.
저녁을 먹기 전에 잠깐 그의 집에 물건을 가지러 들렀는데
그가 갑자기 내 발에 키스를 하려고 했다.
나는 기겁을 하며 무슨 짓이냐고 소리쳤다.
하루종일 맨발에 샌들을 신고 돌아다니다가 씻지도 않은 상태인데
아마 땀과 먼지범벅에 분명 발냄새도 날 거란 말이다.
그는 그런 나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
-당신은 너무 완벽주의자 같아. 항상 전투자세를 갖추고 있고. 제발 릴렉스해.
너 지금 진흙밭에서 맨발로 걷다 왔어? 아니잖아? 그럼 뭐 어때? 괜찮아. 난 정말 괜찮으니까.
-난 지금 충분히 편한데 뭘 더 릴렉스 하며 게다가 완벽주의자라니.
내가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인지 너도 알지 않아?
-이것 봐. 지금도 전투자세잖아. 그냥 좀. 너를 놔줘.
내 테라피스트도 똑같은 말을 했다.
-당신은 완벽주의자 성향이 있어요.
아마 어릴 때부터 주위의 지나친 기대와 관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생겼을 거에요.
그냥 가끔은 자신을 풀어주세요. 뭘 그리 힘들게 살아요? 그냥 편하게 살아요.
-아...아니 저 진짜 편하게 사는데...ㅠ
-간호사, 여기 이 분 약 좀~!
(이건 농담. ㅎㅎ)
어쨋든.
가까이서 나를 오래 지켜본 에릭이나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테라피스트야
내 이런 속 성격을 알고 얘기할 수 있다 치지만
나를 안 지 고작 4-5일 밖에 안 되는 퀘군 역시 똑같은 말을 하는 걸 듣고는 조금 놀랐다.
아아...
나름 릴렉스 한다고 했는데 남들 눈에는 티가 나는구나...하고.
그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그런 나를 보고 있었다.
나른하고 몽롱한 상태로 밤 바람을 느끼고 있는데 그가 일어서서 나를 껴안고 볼에 입을 맞췄다.
-잘자, 친구.
나도 그의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래. 너두 굿나잇. 고마워. 전부 다.
그와 나는 그 상태로 한동안 서로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이윽고 그가 내 몸에 두르고 있던 팔을 풀었다.
-나 갈께.
그가 돌아서려는데...갑자기 그를 잡고싶어졌다.
'가지 마...'
돌아서는 그의 손을 잡으며 눈으로 말했다.
그는 한 발짝 떼려다가 다시 내게 돌아섰다.
그리고는 양 손으로 내 볼을 감싸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No, Leona...I have a girlfriend. and I'm honest.
-아...정말...?
-응. 그땐 농담한거고 방콕에 여자친구 있어.
-그렇구나...미안해. 몰랐어.
-아니야. 아니야. 진짜 괜찮아. 사실 아까 니가 날 불러줘서 기분 좋았어. 정말로.
-아니야...내가 정말 바보같은 짓을 했어. 미안해.
-에이...정말 괜찮대도. 그래도 우리...아직 좋은 친구 맞지?
-응....그런데 너 그거 알어?
-??
-You lost your chance.
그는 아무 말 없이 다시 한 번 나를 껴안았다. 이번엔 좀 더 힘을 줘서. 좀 더 오래.
그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미친듯이 뛰고 있는 그의 심장은 내게 말했다.
'나도 조금은 아쉬워...'
그리고 그는 돌아섰다.
돌아서는 그에게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재빨리 외쳤다.
-비밀 지켜~!
그는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만들며 윙크를 했고
나는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봤다.
아...세상에 이런 남자도 있긴 있구나...
그리고 방콕에 있다는 그 여자...누군진 모르지만 당신, 땡잡은거야. ㅎㅎ
그렇게 그를 보낸 후 나는 침대로 가서 누웠다.
쏴아아아......
촤르륵.......
파도가 마치 내 귓가에서 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린다.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 역시 내 귓가를 스친다.
저 멀리 반경 10km 밖에 있는 롱테일보트의 엔진소리도
고양이가 쌔근대는 소리 마저도.
마치 내 방안에서 나는 것처럼 너무 생생하게 들린다.
나는 편안히 눈을 감고 그 소리를 즐기다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피피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고 있었다.
PS. 사실 까놓고 말하면 내가 먼저 들이댔다가 거절당한 창피한 얘긴데...
이상하게 나는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웃음이 나온다.
만약 그 날 무슨 일이 생겼더라면...그건 그 나름대로 좋은 기억이 될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두고두고 가슴 속에 담아두고 꺼내 볼 만한 추억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피피를 떠올릴 때마다 심장에 나비가 앉은 듯 파르르 떨린다.
갖지 못해서 아쉽고, 갖지 못했기에 더 아름다운 추억 때문에.
-이것은 나의 연애 이야기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