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pped moment @ Phi Phi
꼬끼오-!
수탉 우는 소리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오전 6시30분.
이 시간에 일어나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_-a
부스스한 몰골로 방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완소 해먹이 나를 반겨준다.
곧장 그리로 가서 누워 얼마간 잠을 더 잤다.
아아...기분좋아. 여기서 확 그냥 눌러앉아 살았으면 좋겠다.
잠시 후 타월과 칫솔 등을 챙겨 3-4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욕실로 갔다.
그리곤 아무 생각없이 샤워기를 틀었다.
허억-!
물이 너무 차다...ㅠ_ㅜ
황급히 옷을 줏어입고 샤워는 포기하고 세수만 했다.
아...이런식이면 곤란한데....-_-;;
그나저나 오늘은 뭘 하지...?
피피섬에 뭐가 있더라...?
가이드북을 뒤져보니 스노클링, 스쿠버다이빙, 관광; 뭐 그런 내용들이 있다.
수영을 못하는 관계로 수중 레저는 꿈도 꾸지 못하고...
뭐...몽키 비치에 원숭이나 보러 갈까?
주섬주섬 짐을 챙겨 산에서 내려왔다 (일명 하산. ㅋ)
-굿 모닝!
직원들이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한다.
-응. 굿모닝. 저기 그런데...여기 정말 핫샤워 안되는거야? ㅠ_ㅜ
물이 너무 차가워서 샤워를 못했어...;;
-하하...미안한데 여기까지 발전기가 못 들어와서 어쩔수가 없어.
그냥 눈 딱 감고 3-4초만 견뎌봐. 그럼 괜찮아 질거야.
-으응...I'll try....ㅠ_ㅜ
(나중에 그의 말대로 3-4초를 견뎌봤더니 정말 괜찮아졌다. ㅎㅎ
그리고 이른아침 말고 한낮에 샤워를 하면 물이 따뜻해져서 훨씬 좋다)
-아침 뭐 먹을래?
-음...아이스 커피랑 아메리칸 브랙퍼스트.
-계란은 프라이, 아님 스크램블?
-프라이.
-오케이. 금방 갖다줄께.
피피에서 처음 맞는 아침.
따뜻한 햇살 아래 바다를 바라보며 기분좋게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는데 매니저 몽이 물었다.
-오늘 뭐 할거야?
-음...글쎄. 별다른 계획 없는데? 몽키비치랑 뱀부 아일랜드나 가보려고.
몽키비치 어떻게 가야돼?
-투어보트 예약했어?
-아니.
-흐음...보통 투어보트 타고 가는데...
(넌 그런것도 안 알아보고 뭐했냐고 말하고 싶은걸 참는거 같다)
매사에 꼼꼼한 성격인 몽은 피피섬에 있는 동안 매번
내 어이없을 정도의 태평함에 경악하며 괜히 자기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냥 갈 수는 없어?
-글쎄...다들 투어보트 타고 가니까...난 잘 모르겠어. 피피돈 가서 물어봐.
-그러지 뭐. 피피돈은 어떻게 가야돼? -_-;
-여기서 롱테일보트 타고가도 되고 저기 산길로 10분정도 걸어가도 돼.
돈 아까우니까 그냥 걸어가. 얼마 안걸려.
-음...귀찮으니까 그냥 배 타고 갈래. 배는 어디서 타야돼? -_-;
-기다려봐. 내가 불러줄께.
이거 수상콜택시 서비스냐. ㅋ
잠시 후. 배가 도착했고 바이킹 직원 중 한명이 자기도 볼일 보러 가야된다며
함께 배에 올랐다.
바로 이 사람. 미케씨다.
(사실 미*케 이런식의 세 글자 이름인데 도무지 기억이 안난다. 고유명사 치매증-_-;
암튼 편의상 미케씨로 부르겠다.
뭐, 미케씨도 매번 나를 '레나'라고 불렀으니 쌤쌤이다. 흥)
독특한 외모와 강한 포스로 뭇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미케씨.
피피섬에 머무는 동안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매번 부르기 전에 먼저 나타나
성심성의껏 나를 도와 준 고마운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끄라비나 푸켓 등 다른 곳으로 나가려고만 하면 일부러 배를 안 불러주거나
배 시간을 늦게 말해주는 등 상당히 비협조적인 자세로 돌변, 나를 당황케 했는데...
실은 그 의중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굳이 아는척 하기 싫어서 내색 안했다.
그는 외모와는 달리 상당히 Shy한 성격이라
괜히 시키지도 않았는데 옆에 와서 주스잔을 슥 내밀고 간다던가
앉으려고 할 때 의자를 빼 주는가 하면
-너 오늘 섹시해보여.
-너 지금 행복해? 니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
라고 말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티 안나게 티를 냈다.
피피섬에 있는 동안은 여러가지 일들이 내 머리속에 가득차서 그런 그를 무심히 넘겼는데
지나고나서 생각해보니 그래도 가장 고마운건 미케씨다.
아마 다시 만났을 때 가장 반가울 사람도 미케씨일 것 같다.
배를 타고 3분 후. 피피돈에 도착했다.
-레나, 오늘 뭐 할거야?
미케씨가 또 같은 질문을 한다.
-글쎄. 잘 모르겠어. 일단 몽키비치 가려고.
-그래? 잠깐 나 따라와봐. 내가 여기 안내 해줄께.
음...기념품을 사려면 여기서 사면 되고...식당은 이쪽에 많은데...
그 중에서도 여기가 맛있고...사람들이 좋아하더라고. 그리고 여기는...
미케씨는 내게 피피돈 가이드를 해준 뒤 친구 만나서 여기 계속 있을거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그리로 오란 말을 남기고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미케씨를 보낸 후 우선 내일 끄라비로 갈 배 티켓을 예약하고
수박 쉐이크를 마시며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잡화점에서 튜브 파는 걸 발견! +_+
수영은 못하지만 바다에서 놀고싶은 내게 꼭 필요한 아이템이다..ㅠ
(원래 한국에서 사가려고 했는데 아동용 튜브 밖에 안 팔아서 그냥 왔었다;;)
마침 그 옆에 스노클 장비도 팔고 있길래 같이 구입. 튜브 320밧. 장비 420밧.
음...그나저나 몽키비치는 어떻게 가는거지? -_-;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는데 그늘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한 남자가 말을 건다.
-Hey, u r pretty (이건 태국 유행어냐...-_-;)
-Thanks. I know.
짧게 대꾸한 뒤 혹시나 해서 물었다. 몽키비치 가려면 어떻게 해야돼?
몽키비치 가려고? 너 혼자? 남자는 눈을 반짝 빛내며 되물었고 그렇다고 했더니 따라오란다.
알고봤더니 이 사람, 롱테일보트 뱃사공? 소유자? 암튼 그런거였다.
자기가 몽키비치, 뱀부 아일랜드 등등 피피섬 가이드 해줄테니 자기 배를 타란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처음에 700밧을 불렀다.
너무 비싸다고 했더니 원래 사람들 모아서 같이 가면 싼데 혼자라서 비싸게 느껴지는 거라고 했다.
나 돈 없으니까 좀 싸게 해달라고 했더니 대뜸 300밧에 가주겠단다(암튼 태국의 고무줄 요금;)
그러자고 하고 배를 탔다.
그렇게 가게 된 몽키비치.
(숨은 원숭이를 찾아보세요~ㅎㅎ)
남자가 원숭이한테 안 물리게 조심하라고 하도 당부하길래 원숭이가 바글거릴 줄 알았는데
딱 두마리 봤다.
서양 남자애들이 바나나를 들고 원숭이를 약올리자
원숭이는 꽥꽥 고약한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어 남자애들 손에 있는 바나나를 낚아 채갔다.
더 이상 볼 것도 없고 해서 바로 그 옆에 있는 동굴 같은델 갔다.
딱 봐도 포토존으로 보이는 곳에서 사진을 찍고나니 역시 할 일이 없다.
뱃사공이 우선 여기서 스노클링을 하란다.
나 오늘 첨 해보는거랬더니 자기가 도와주겠단다.
아까 샀던 튜브와 장비를 주섬주섬 꺼냈다.
튜브에 공기를 넣어서 올걸;; 아무리 불어도 커지지 않는다. -_-;
남자가 그걸 지켜보더니 자기가 하겠다고 가져간다.
아..아니. 괜찮은데. 거기 입 대면...-_-;;
후욱, 후욱. 헉헉헉...
후욱, 후욱. 헉헉헉...
어찌나 열심히 불었는지 왠만큼 빨개선 티도 안 날 것 같은 얼굴이 정말 시뻘겋게 변했다.
남자는 한참을 헥헥대고 있다가 물 한병을 벌컥벌컥 마신 뒤
웃통을 벗어던지고 나와 함께 바다로 뛰어들었다.
풍덩-!
(첫번째 사진은 앞에 달러지폐만 갖다 놓으면 너바나 앨범자켓 같겠다는...ㅋ)
/나: Wow! Looks delicious!
/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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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전-부산 해운대
/옛날 남친: 자기야, 우리 아쿠아리움 갈까?
/나: 횟집가면 공짜로 볼 수 있는데 뭐하러.
/옛날 남친: 야...그래도 거기 있는 물고기랑은 다르잖아.
/나: 내 눈엔 다 똑같은 횟감으로밖에 안 보여. 회나 먹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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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난 털복숭이 짐승들은 좋아하지만 물고기에 대한 애정도는 대충 이런 수준이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수십마리의 먹음직스런 생선들이...(꿀꺽) 헤엄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이쁘긴 이뻤다. ㅋ
(스노클링 후. 난생처음 바다속을 본 나는 흥분상태. 하악하악)
먹음직스런 생선들을 보고나니 급 배가고파졌다.
뱀부 아일랜드는 나중에 가기로 하고 그냥 숙소로 돌아가자고 남자에게 말했다.
그러나 남자는 왜 벌써 가려고 하냐며 스노클링 좀 더 하다 가잔다.
자기가 스노클링 가르쳐주겠다고.
(이미 어떻게하는 줄 알겠는데 뭘 가르친다는건지...-_-;)
그러더니 대뜸 내 손을 잡고 여기저기 바다속을 끌고다닌다.
튜브 있어서 괜찮으니까 그 손 놓으래도 끝까지 놓지 않고...
게다가 잡으면 그냥 잡지 왜 깍지 끼는건데-_-;
이래저래 피곤해져서 남자를 겨우 설득해 숙소로 돌아갔다.
튜브와 스노클 장비를 팽개쳐놓고 일단 밥 먹으러 고고~!
꿀맛같았던 튜나 샌드위치와 파인애플 쥬스.
수영 후엔 뭘 먹어도 살찌지만 뭘 먹어도 맛있다는...ㅋ
오후 3시.
섹스 온더비치와 함께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침 절묘하게도 이 구절을 읽고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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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부스러기가 섞여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쳤다.
나의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뭐라 형용키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외따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휩쓸었다.
그 쾌감은 사랑의 작용과 같은 투로, 귀중한 정수(精髓)로 나를 채우고,
그 즉시 나로 하여금 삶의 무상을 아랑곳하지 않게 하고,
삶의 재앙을 무해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삶의 짧음을 착각으로 느끼게 하였다.
음료는 내 몸속에서 진실을 눈뜨게 했다.
그리하여 나는 자신에게 다시 묻기 시작한다.
도대체 그 미지의 상태는 무엇이었나,
아무런 논리적인 표시를 가져다 주지 않았지만, 그 명백한 행복감과 실존감으로
다른 온갖 잡념을 소멸시켰던 그 미지의 상태는 무엇이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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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의 그것처럼 마들렌과 에프터눈 티는 아니었지만
피피에서 마신 섹스온더비치 역시 나로 하여금 명백한 행복감과 실존감으로
다른 온갖 잡념을 소멸시켰다.
방갈로로 돌아가 해먹에 누워 책을 마저 읽었다.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그저 하는 일이라고는 밥먹고 수영하고 음악듣고 책 읽고...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났다.
동시에 내가 잘한 게 뭐 있다고 이런 사치를 누리고 있는건지,
이 행복이 과연 내 것이 맞는건지 살짝 겁이 나기도 했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그냥 여기서...
시간이 멈췄으면...정말 좋겠다.....
-이것은 나의 또 다른 연애 이야기다
-다음편을 기대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