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pped moment @ Phuket Town
2008년 1월 1일.
새해 첫날 아침.
꽤 오래 잤는데도 온 몸이 욱신거린다.
등 뒤가 서늘해 뒤를 돌아봤더니 침대 시트가 땀에 흠뻑 젖어있다.
간밤에 이상한 꿈을 꿨다.
장소는 어느 기숙사 건물.
건물 안에 들어섰는데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뛰쳐 나오고 있었다.
발 밑을 보니 딱정벌레, 바퀴벌레, 지네, 그리마 같은 것들이 바닥을 새카맣게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수십마리가 내 다리에 달라붙어서 기어오르고 있었다.
꺄악-! 비명소리를 지르며 다리를 있는 힘껏 털었다.
그러나 아무리해도 벌레들은 딱 달라붙어서 안떨어졌고
나는 그 끔찍한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일단 아무 방에나 들어갔다.
그 방에는 하얀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의 어떤 덩치 좋은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군지는 모른다. 마치 카메라가 얼굴만 자르고 촬영한 것처럼 몸통만 보였다)
나는 겁에 질린 눈으로 부들부들 떨며 그를 바라보았고
그 와중에도 벌레들은 내 온몸을 타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남자는 그저 한 팔로 나를 감싸안고 몸에 붙어있는 벌레들을 손으로 쳐서 떼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벌레들은 아무리 쳐내도 떨어지지 않았다. 밤 새도록. 잠에서 깰 때까지.
그러니 피곤할 수밖에.
새해 첫날 첫 꿈이 이런거라니. 대체 뭘 의미하는걸까.
침대에서 빠져나와 곧바로 랩탑 전원을 켜고 꿈해몽 사이트를 뒤졌다.
벌레와 관련된 꿈 중에 비슷한 내용이 있긴 했으나 딱 맞아떨어지는 내용이 아니다.
예를들면 상황은 같은데 벌레 종류가 다르거나 벌레들이 결국 떨어져나갔다거나.
(나는 끝끝내 못 떼어냈다)
꿈해몽은 늘 이런식이다. 내가 찾는 답은 항상 없다. 기분이 뒤숭숭했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한 병 꺼내 마시면서
그냥 벌레에 대한 나의 내면의 공포가 꿈으로 나타났겠거니 여기기로 했다.
(태국여행 전에 가장 걱정했던게 벌레에 대한 공포였다.
크고 날아다니는 바퀴가 호텔에도 나타난다고 들었기에.
그러나 여행내내 바퀴는 딱 한마리 봤다. 카오산 골목에 죽어있는 것)
후우-!
가볍게 한숨을 쉬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간밤에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쳤다.
촤르륵...촤르륵...미친듯이 춤추고...촤르륵...바이크 배기구에 화상입고...
촤르륵...뚝!
어떤 지점에서 영상이 딱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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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대폰 화면
-Happy New Year (010-8***-****. 1/1 12:20 am)
-Happy New Year! (010-8***-****. 1/1 1:15 am)
# 클럽 안
/Leona: (혼잣말로) 응? 누구지? 왜 문자를 두 번 보냈지? 흐음...
/Miwoo: Leona, 지금 카운트다운 시작해. 일루와.
/Leona: 와, 드디어 카운트다운 하는거야? 신난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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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지금까지 그 메시지에 대한 걸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번호가 낯이 익다. 휴대폰을 다시 확인해봤다.
두 달전에 삭제해버린 그의 번호였다. 메시지는 한시간 간격으로 두개.
혹시 중복문자인가 싶어서 봤더니 하나는 느낌표가 있고 하나는 없다.
아아...머리가 또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우리...다시는 안 보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날 밤, 그렇게 울고불고하다가 마지막 인사까지 하고 헤어졌잖아.
그게 벌써 두달 전 일인데. 왜그래, 갑자기. 새해 인사가 그렇게 하고싶었어?
부탁인데...나한테 그런거 하지마. 널 떠올리게 하는짓...하지마...
그의 망령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병에 반쯤 남아있던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신 뒤 차가운 물에 샤워를 했다.
정신 번쩍 들게.
오늘은 푸켓으로 가는 날.
떠나기 전에 미우에게 전화해 작별인사를 했다.
잠시 푸켓으로 마실갔다 올테니 열흘 있다가 보자고. ㅎㅎ
한국의 김포공항 꼴이 되어버린 돈므앙 공항으로 갔다.
찝찝한 기분을 한 방에 날려버린 눈부신 햇살. 습하지 않고 딱 좋은 날씨.
나, 드디어 바다 보는거야? 그런거야? ㅎㅎ
푸켓행 비행기를 타러 가는길에 너무 신나서 폴짝폴짝 뛰고싶은 걸 이를 악물고 참았다. ㅎㅎ
이륙한지 10분여 만에 기내식이 배급됐다.
솔직히 기내식은 입에 안맞아서 잘 안먹는다.
이번에도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보고는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했다.
왠지 밋밋한 맛일 것 같아서 소금, 후추를 약간 뿌리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어~머나!
그냥 텁텁한 닭가슴살인줄 알았는데 고기 사이에 모짜렐라 치즈가 들어있다.
시들시들해 보이는 채소를 먹어봤다.
채소는 시든 게 아니라 적절히 잘 배합된 촛물에 살짝 절인 것이었다.
디저트로 나온 브라우니도 너무 달지않고 포슬포슬한게 딱 좋았다.
처음으로 기내식을 남기지 않고 끝까지 먹었다.
보아하니 상자에 프린트 된 저 분이 주방장님이신가본데...
너무 감명받아서 한 컷. (맛있는 식사,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ㅎㅎ)
그러고선 눈 몇번 깜빡이니 푸켓공항 도착.
시골 버스터미널 같은 공항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으려고 두리번거렸다.
나의 목적지는 백팩커스가 있는 푸켓타운.
'TAXI'라고 쓰여있는 간판을 보고 그리로 가서 물어봤다.
그랬더니 30-40분은 기다려야 한단다. 흐음...
망연자실해서 서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다가와서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
푸켓타운 간다고 하자 표를 끊어주며 곧 폐차 될 것 같은 봉고차로 안내한다.
봉고차 안에는 허름한 점퍼에 머리 벗겨진 이탈리아노 아저씨가 앉아있었다.
곧이어 까만 털스웨터를 입은 이탈리아노 커플이 차에 올라탔다.
그 다음 미국 아저씨, 그 다음 중국 아줌마...
더이상 앉을 자리가 없을 때까지 사람을 구겨 넣은 후 차가 출발했다.
봉고차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고...
털 스웨터 입은 이탈리아노 커플은 땀 뻘뻘흘리며 앉아있고...(그러게 공항에서 벗지)
미국 아저씨는 음악듣고 있고...
이탈리아노 아저씨는 어눌한 태국어로 기사 아저씨한테 이런저런 말을 시키고 있고...
기사 아저씨는 그 사람 말을 전혀 못 알아듣고 있고...
중국 아줌마랑 나는 섬마을에 팔려가는 사람마냥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고...
더 있었는데 다들 존재감이 없어서 기억이 안난다...;;
차는 돌아돌아 사람들을 차례로 내려줬고...내가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푸켓 백팩커스.유스호스텔은 처음 가보는거라 호기심 반, 두려움 반.
가격 참 착하다. 더블베드 팬룸이 700밧. 도미토리는 200밧인가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도미토리로 할 걸 그랬다.
혼자 독방쓰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친구도 못 사귀고 은따처럼 지냈다.
동양인이라 영어 못하는 줄 알고 아무도 말 안걸고...;
(Hey, stupid girls. 나, 너네가 내 얘기하는거 다 들었거든?
"쟤 중국에서 왔나봐" 부터 시작해서 "가슴 나보다 큰데?" 거기다가
DVD 고르고 있는데 "오, 쟤 프리즌브레이크 아나봐" 이러질 않나 원 -_-;)
숙소 풍경은 대략 이렇다.
노란 벽에 흰 문이 내 방. 도미토리는 안쪽 건물 2층에 따로 있다.
독채가 있는 건물 앞엔 작은 정원이 있었는데 나만빼고 다들 도미토리 숙박객이라 그런지
아무도 이쪽으로 오지 않아서 단독 정원처럼 사용했다. ㅎㅎ
대충 짐을 풀고 직원에게 빠통비치 가는 길을 물었다.
그런데........이게 뭐야........
빠통비치는 푸켓타운에서 멀기때문에 버스를 타야하는데
오늘은 늦어서 버스가 없다고...ㅠ_ㅜ (저녁 6시밖에 안됐는데!)
나중에 빠통비치에서 돌아올때도 버스 끊기니까 9시 전에 와야 한단다.
택시비는 숙박비랑 거의 맞먹고. (뭐냐 이게 -_-;;)
숙소 근처엔 편의점 말고 갈 데가 없어서 로빈슨 백화점쪽으로 나왔다.
배는 고픈데 식당 찾기도 귀찮고해서 그냥 맥도날드에 갔다.
피시휠레 세트를 시켰는데 케첩대신 무슨 플라스틱 뚜껑 두개를 준다.
뭔가 했더니 소스통에 가서 직접 소스를 가져다 먹는 거였다.
그런데 태국의 맥도날드엔 핫소스가 있었다. 어? 그런데 이거 왠지 낯익은 맛인데?
한참 생각하다가 알아냈다. 오감자 안에 들어있는 소스맛! ㅎㅎ
핫소스랑 케첩을 3:1 비율로 섞어서 감자를 찍어 먹으면 더 맛있다. ㅋ
밥 먹고 로빈슨 백화점에서 수영복 사고 마트 구경하다가 다시 숙소로 왔다.
(마트 구경하는게 관광지 구경보다 더 재밌다)
역시 음식천국, 소스천국 태국답다.
내가 지금 태국에 있구나...새삼 자각하게 만드는 각종 태국쌀, 누들, 라이스 페이퍼.
완소 태국과일.
그 맛있다는 망고스틴을 먹어보려 했으나...
제 철이 아닌 관계로 태국 그 어디에서도 망고스틴을 구경하지 못했다...ㅠ
마트에서 산 용과, 구아바, 옐로망고, 그린망고, 캔맥주.
구아바는 망고와 눈맞았다길래 샀다. (헉. 저질개그 죄송;)
옐로망고는 설명 필요없죠? 쫄깃하고 달짝지근하고...손에 끈적끈적하게 묻고.
그린망고는 써서 못 먹겠고.
구아바는 아삭아삭한 풋사과 맛이 났고.
용과는 어떻게 깎는지 모르겠어서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떠나는날 까먹고 안가져갔다.
원래 사람들이랑 같이 먹으려고 산거였는데 위에도 썼듯이
두명의 남자 밝히고 폐쇄적인 서양 여자애들이 거실을 장악하며
분위기를 개판으로 만들어놓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혼자 먹었다.
(다른사람들도 걔네들 때문에 짜증나서 그냥 나가더라는...-_-;)
맥주 한 잔 하며 그동안 밀린 일기를 쓰고 있는데 띠링~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What will u do this weekend? I have to tell u something.
(010-8***-****. 1/1 11:40 pm)
제발...
이러지 말라고 했잖아....
-이것은 나의 연애 이야기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