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썼던 글을 다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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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예전에 썼던 글을 다듬으며...

네버스탑맘 11 656


3.

  드디어 본격적인 투어에 나선다.

  곤히 자는 아이를 서둘러 깨워 조식을 먹이고, 카운터에 언제 출발할지 물어보니, 7시에 여행사직원이 데리러 온다고 무심하게 대답한다. 우리에겐 생애 처음 맛보는 체험이지만 이곳 사람들에겐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상의 연속이니 당연한 태도일 게다.

 ​그럼에도 하루 이틀 지내다보면 한번 보고는 다신 보지 않을 사람들인데도, 심지어 내일이라도 더 깨끗하고 저렴한 숙소가 나타나면 바로 떠날 사람들임에도 관계의 상처를 겁내지 않고 이것저것 호의를 베푼다. 어젯밤엔 인터넷 게임을 하겠다는 아이에게 20바트를 들려서 보냈더니 도로 갖고 와선 자초지종을 말한다.

  ​주인 아주머니가 그냥 한번 냈으면 된다고 두 번째부터는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놀다가라고 따듯하게 말해줬단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 여행이 두 배 세 배로 힘들 것 같아도 막상 여행지에선 아이가 있다는 이유로 서슴없이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어른에게 말을 걸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지만 아이들은 만만하다. 초콜릿 하나, 사탕 한 개로도 가능하다. 여행이 풍요로워지는 지점이다.

오늘 새로 생긴 걱정은 그동안 겹겹이 싸고 다녔던 복대다. 물속으로 들어간다면, 이 복대는 어떻게 해야 하나? 둘 다 다이빙한 사이 지갑이고 뭐고 모두 사라지면 어쩌나? 카메라도 휴대폰도 몸에 지니고 들어갈 수 없는데 그것들이 몽땅 없어지면 어쩐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노심초사가 되었다. 이내 젊은 여행사 직원이 각 호텔에 흩어져 있는 투어 객을 한 차에 실어 항구에 내려놓는다.

 

 보트에 오른 구성원들은 국적도 나이도 다양했다. 샌들바깥으로 갈라진 발뒤꿈치가 보일 것만 같아 파스를 붙였는데 발음이 아나운서처럼 정확한 70대 미국 할머니가 왜 그러냐고 묻는다.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이것저것 물으며 궁금증이 해결되면 호탕하게 웃었다. 남편으로 보이는 노신사가 아내를 바라보며 전직 CIA에 근무했어서 저렇게 호기심이 많다고 해명해준다. 어제 오후에 섬으로 왔다고 해서 그렇다고 하니 파도가 너무 세서 배 멀미 좀 했겠다고 덧붙인다.

 ​그러면서 다음부터는 배 멀미가 나면 시선을 멀리주고 수평선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하라고 했다. 연습 삼아 울렁인다싶으면 투어보트에서 해보니 효과 만점이었다. 페리를 타고 나갈 일이 걱정이었는데, 그 말이 천금처럼 귀하다.

 

 또 한 편에는 태국여인과 결혼한 홀랜드 중년이 있고, 신혼여행을 중국에서 온 부부도 보였다. 틈만 나면 손을 잡는 동성애자도 보였다. 검은 슈트를 입은 가이드는 배를 타고 이곳저곳 지형을 설명해 주고 오늘 우리가 다닐 장소도 알려주었다. 쿠키, , 과일, 음료가 모두 넉넉했다.

 ​한 사람 당 20000원 정도만 내면 하루 종일 스노쿨링을 하고 뷔페를 즐길 수 있다. 사람들과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누자 망망대해의 쪽배에서 운명을 같이하는 공동체가 된 기분이었다. 복대나 지갑같은 건 누구도 걱정하지 않는 눈치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다이빙을 하기 때문에 아무도 가져갈 사람이 없다.

 ​평소보다 손님이 적어 가이드에게 돌아가는 돈은 적다지만 그는 프로였다. 칭찬이나 팁은 바라지도 않고 가장 나이가 어린 아들아이를 위해 물속에서 feeding을 하며 물고기를 불러모아줬다.

 ​스노클링 장비를 입에 물고, 구명조끼로 무장한 뒤 바닷 속에 첨벙 빠졌을 때 총천연색 물고기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충격이었다. 귀가 멍멍해지면서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는 그 순간 내 몸은 둔하고 열등한 동물이 되었다. 도무지 지상의 자유로운 몸놀림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반면에 검정등무늬 나비고기떼는 빵조각을 향해 달려오면서 내 다리를 부드럽게 스쳐간다. 브레히트가 설파하는 서사극처럼, 여행 속에 파묻히기보다 시종일관 내 경험을 관조하며 객관화하려 했던 그동안의 여행 태도가 일시에 뒤집어진다.

 ​바다와 내가 혼연일체가 되어 궁극에는 라는 실체가 사라지는 경이로움을 맛보았다. 경계를 넘어 영역이 달라지는 세계에 몸을 들여놓는 일이 이토록 황홀하다니. 영감이 필요할 때면 바다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알듯하다.

 

  따오 섬에 딸린 낭유안은 지금껏 보아온 해변과 달랐다. 회색으로 변한 가지산호의 잔해가 물가에 가득하다. 식물을 닮았으나 엄연한 동물인 산호. 산호초는 지상의 열대우림과 같아 바닷속 물고기 중 30%가 이곳에 서식한다고 한다. 사슴의 뿔 같기도 하고 사자의 발톱 같기도 한 산호의 잔해는 바다 속 보이지 않는 도도한 흐름을 몸으로 증거한다. 왕관가시 불가사리가 산호의 몸을 빨아들이면 이렇게 회색으로 변한다지만, 우리가 방금 전 물속에서 본 산호는 어떠했는가?

 ​흰동가리돔, 두동가리돔, 능성어, 검정등무늬 나비고기들과 어우러진 오색빛깔 산호. 산호초가 생명을 지닌 이상 삶과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때가 되면 부스스 부서져 나와 파도에 휩쓸려 깨어지고 쪼개져 모래가 된다. 내 여행의 기억도 그렇게 되길 소망해 본다.

 ​온 몸의 세포를 열고, 미지의 세계를 받아들여 저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다가 때가 되면 부스스 솟아나 삶의 의미를 깨닫고 기꺼이 다시 모래가 되어 순환하고 싶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처럼.

 

-평생동안 내가 간직했던 가장 큰 욕망들 가운데 하나는 여행이어서-미지의 나라들을 보고 만지며, 미지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지구를 돌면서 새로운 땅과 바다와 사람들을 보고 굶주린 듯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이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사물을 보고, 천천히 오랫동안 시선을 던진 다음에 눈을 감고는 그 풍요함이 저마다 조용히, 아니면 태풍처럼 내 마음 속에서 침전하다가 마침내는 오랜 세월을 걸쳐서 고운 체로 걸러지게 하고 모든 기쁨과 슬픔으로부터 본체를 짜내고 싶었다.-(문명의 배꼽 그리스에서 재인용)

11 Comments
호루스 2017.01.12 19:20  
너무 다닥다닥 글이 붙어서 가독성이 없네요.
글 퇴고 좀 부탁드려요.
네버스탑맘 2017.01.12 19:57  
반가운 첫 댓글이라 읽어봤는데...ㅠㅠ이렇게 올리면 되는 줄 알고...
고구마 2017.01.12 22:07  
와...마치 단편수필집같은 문체여서 정말 감수성 돋게 잘 읽었어요.
저도 색목인 이란 말 종종 쓰는데...ㅎㅎ
꼬 따오 들어갈때 엄청난 고생을 해본 경험이 있어서 아드님이 오바이트 한 대목에선 저도 예전기억이 소환되네요.
ㅠㅠ
네버스탑맘 2017.01.12 22:41  
고구마님~ 절 기억하시나요? 4년 전, 제 글에 따듯한 격려를 해주시고!! 이번에 용기를 얻어 그날들을 복원하여 책을 써보려 한답니다!! 그때 매듭이란 글^^많이 좋아해주셨는데!!
냐냐뇬뇨 2017.01.13 01:46  
글 너무 멋있어요~ 여행후기 답지 않게 굉장히 수필같은 느낌이 나네요 공들여 쓰신 티가 나요~ㅎㅎ
네버스탑맘 2017.01.13 06:38  
나이 50이 가까워지면서도 글을 묶을 엄두를 못내다가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글을 누가 읽겠는가싶어 저 자신만이라도 내글을 긍정하자고  마음을 다잡았으면서도 막상 아무도 반응이 없어서 상심하고 있었는데, 고구마님과 냐냐뇨뇨님의 격려를 받으니 더욱 기운이 나요!! 고맙습니다.
타이거지 2017.01.13 07:57  
맞다...이..글이네요.
따오..낭 유안에 시간들.
글고..앤..누구야?..앤 또 누구고? 웰케 이름이 어려워?
아쒸..@#$%#...생각납니다.
네버스탑맘 2017.01.13 14:55  
^^ 정확히 5년 전이에요~~
네버스탑맘 2017.01.14 11:55  
4년전이요.ㅎㅎ제가 계산을 잘못했어요.ㅎㅎ
돌이킬수없어요 2017.01.14 11:03  
5년전 글이군요^^
글이 연배가 좀 있어보이긴 해요 그래도... 퇴고는 아니에요
충분히 상상할수 있어서 좋앗어요
그리고 발 뒷꿈치는.... 풋 스크럽  태국에서 한번 받아보세요~
전 페디큐어 받앗는대... 각질 제거에 발톱도 깍아주던대요 ㅎㅎ
가격은... 얼마 안해요~~
네버스탑맘 2017.01.14 11:56  
고맙습니다..꼼꼼하게 읽어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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