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마을, 양숴阳朔
(2005년 글입니다.)
이곳 역시 중국인 단체 여행단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금은 8월 말... 휴가기간이나 대학생 방학도 서서히 끝나가고 있는 시점이어서 밀려드는 관광단의 물결도 조금은 잦아들고, 끝물의 한가한 무드가 상점 구석구석에서 솔솔 풍겨져 나오고 있다.
나이가 조금씩 들어갈수록, 숙소에 대한 기대치 또한 그에 따라서 조금씩 올라가는 걸 느끼게 된다. 예전에는 숙소 정보가 거의 없는 곳에 처음 도착하더라도, 그냥 아무 곳이나 눈에 보이는 곳에 쑥 들어가서 대충 둘러본 후 비바람만 가릴 정도면 오케이였는데... 이제는 웬만하면 화장실도 방에 딸려 있어야 될 거 같고, 에어컨도 필수고 너무나 더러워서도 안 되고, 찬물 샤워도 아침에는 온몸이 닭껍데기 마냥 오그라들 것 같아서(자칫 심장마비 걸릴까봐 겁도 난다)피하게 되고 이래저래 조건에 걸리는 게 많아져 버렸다.
이런 식으로 차츰차츰 변해 가다보면, 차비 몇 푼, 숙소비 얼마라도 아껴 보려고 먼지 나는 길을 걷고 또 걷고 쾌적하지 않은 곳에서도 대충 머리를 누이고 자는 지금의 생활이 먼 추억으로 남겨지는 날이 머지않아 곧 올 것 같다. 그건 곧 우리가 이런 생활을 견디기엔 역부족인 상태로 늙어간다는 말인데... 어째 좀 서글프다. 쩝...
어쨌든 별 정보도 없이 양숴의 버스정거장에 내리니, 역시나 우리를 환대해 주는 건 동네 숙소 삐끼 아줌마, 아저씨들의 열렬한 손짓이다. 약간 광적인 삐끼 환영단의 물결을 헤치고, 일단 양숴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거리인 시제西街로 걸어가려고 했으나... 멋지구리한 숙소 사진을 우리 눈앞에서 흔들며 ‘온리 60위엔, 프리 인터넷~~’을 외치는 숙소 아줌마의 낚시 바늘에 덥석 물린 채, 결국 우리는 나란히 줄지어 정류장에서 가까운 West street inn으로 들어갔다. 시제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길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숙소이름은 가장 시제스럽다니...
좋아좋아~ 일단 짐부터 내려놓고 배낭여행자들의 천국이라는 양숴를 둘러봐야지~~
이곳의 거리는 뭐랄까... 윈난의 따리와 좀 닮아 있고, 방콕의 카오산로드와도 많이 닮아 있다. 서양인 여행자들이 많이 오는 곳 답게 핏자테리아 간판을 단 산뜻한 식당들과 대충 만들어 낸 듯한 헐렁한 면바지며 손수 염색한 티셔츠를 내다파는 옷가게들, 그리고 갖가지 기념품들과 에스닉한 무드가 멀멀 나는 장신구 숍들로 그다지 길지 않은 시제는 그야말로 꽉 채워져 있다.
그리고 좀 더 이곳이 ‘여행자 거리’이구나 라고 느끼게 만들어 줬던 것은, 수많은 여행사 간판들에 영어로 쓰여져 있는 'one day tour' 프로그램과 그 외 각종 관광 포인트들로 인도하는 크고 작은 여행 상품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던 cooking school 까지... 어디서나 사람 사는 곳은 다 닮아 있듯이, 서양인 여행자들이 많이 오는 곳 또한 그 어디든 다 비슷한 모양새로 닮아 있는 거 같았다.
이 거리의 분주하고 웨스턴스러운 무드는 이곳의 자연적인 지형과 정말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곳의 전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중국 산수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글동글하고 모양새가 좋은 산들이 도시 전체를 두르고 있고, 시제의 끝에는 맑은 리 강과 작은 나룻배들이 그 강을 오르락내리락 분주히 다니고 있는, 그야말로 중국에서도 이제는 쉽사리 볼 수 없는 동양적인 무드가 강한 곳이다.
어느 집에나 한 장은 있을법한 모조 중국 산수화의 한 귀퉁이를 지우개를 쓱쓱 지운 후에, 서양인들과 중국인들로 빠글거리는 길쭉한 길 하나를 샤삭~ 그려 넣는다면 아마 이곳 양숴의 모양새와 비슷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동양적일 수는 없을 것 같은 중국 남부의 경치에, 파란 눈의 백인들과 간만의 유람을 위해 멋을 낸 듯 보이는 중국인 단체 관광단이 서로 북적이며, 도시 한구석에서는 프랑스식 이태리식 중국식의 온갖 종류의 음식이 불꽃을 뿜으며 만들어져 나오는 곳... 바로 양숴이다.
자 이곳에 왔으니 슬슬 근교 유람이나 해볼까... 일단 양숴에서 멀지 않은(빵차로 한 이십분 달리면 나오는...) 월령산으로 출발~ 이곳은 산 정상의 뻥~ 뚫린 구멍이 마치 달처럼 보여서 이런 이름을 얻게 된 거 같은데...
월령산에 내리니 온 동네 삐끼 할머니들의 극성이 대단하다. 손자 손녀에게 배웠을법한 영어로 계속 근처 동굴 표를 사라고 졸라 대는데, 어차피 우린 동굴에는 관심이 없었다. 티켓~ 티켓~을 외치며 끈질기게 따라붙는 할머니들에게 도망치는 나름대로의 방법은, 얼굴에는 미안한 미소를 살짝 띄우고 다리를 최대한 재빨리 샤샤삭~ 움직여 그들의 사정권으로부터 순간 이동해서 사라져버리는 바퀴벌레 전법이었다.
바퀴벌레가 얼마나 빠른지 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듯하다. 그동안 요왕이 쓰레빠로 바퀴 때려잡는 걸 목격한바, 거의 한 번에 빡~ 잡은 적이 별로 없는듯했다... 거의 두 세 번은 헛 쓰레빠질을 하고서야 배를 터트릴 수 있는 요 튼튼한 벌레는 빠르기도 엄청 빠르다.
어쨌든 우리의 소극적인 방법이 나름 먹혀들었는지 언제부터 인가 할머니들은 보이지 않고 월령산 꼭대기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에는 온전히 우리 뿐이다. 가이드북에 의하면 이곳에는 강도가 심심찮게 출몰하므로 절대 혼자서는 오르지 말라는 경고가 있는바, 우리는 다른 때와는 달리 나란히 어깨를 마주한 채 걸어 올라갔다.
다른 때 같았으면 성큼성큼 먼저 올라가서 이미 내 눈앞에서 애저녁에 사라졌을 요왕도, 책에서 읽은 글의 영향 때문인지 마른 숨을 헉헉 쉬어대는 내 느린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며 나란히 걸어준다. 쩝...
오~~ 산위에서 보는 전경이 ‘기대이상’ 이었으면 좋으련만... 지금은 오전이고 게다가 요즘은 우기이다. 온통 뿌연 수증기가 이곳 전체를 감싸고 있는 탓에 눈에 셀로판지 붙인 채 보는 거처럼 뭐든지 두루뭉실하게 보여버렸다. 그래도 높이서 내려다보는 전경은 늘 좋다.
한참 숨을 고르며 이리저리 사진을 찍다 보니 웬 서양인 한명과 동양인 한명이 우리 뒤를 따라 뷰포인트에 올라왔다. 이들의 뒤에는 삐끼 할머니들이 서로 재잘재잘 거리며 따라붙었는데, 올라오는 동안 조금 친해졌는지 어딘가를 손가락질 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로 뭐라뭐라 이야기 해주기도 하고, 서양인의 손에 있던 카메라를 대신 들고는 그 둘의 사진을 찍은 후 ‘뷰티풀~~’ 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올리며 연신 셔터를 눌러준다.
그 여행자들은 할머니들이 시키는 대로 여기에도 섰다가 저기에도 섰다가 하며 나란히 사진을 찍히게 되는데, 그 모습을 보니 제주도에 신혼 여행간 커플들이 택시 기사 아저씨의 손짓에 따라 폭포 앞에서 다소 키치한 포즈로 사진 찍히는 모습이 연상된다. 어쨌든 그 모든 뷰티풀~ 한 사진 작업이 끝나자 할머니들은 작은 가방을 열어 물을 사랜다.
여기서는 얼마에 팔까... 살짝 훔쳐 들으니 작은 물 한 병에 10 원 이란다... 후아~ 넘 비싼걸...
어이없는 미소와 약간 당황스런 기색이 잠시 여행자들의 얼굴에 스쳤지만, 결국 한 병에 10원씩 2병을 사고는, 서양인 여행자는 산의 완전 꼭대기 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할머니들의 조언에 따라 그곳에 기어오르기 위해 이 뷰포인트를 총총히 떠났다.
할머니들은 곧이어 우리에게도 포커스를 맞추고 한 병에 십 원짜리 물을 팔려고 액션을 취했지만, 이미 우리가방엔 물이 가득한데다가 뭔가 빚진 맘도 없으니 가볍게 ‘노 탱큐’ 해버렸다.
우리에게서 뭔가 나올게 없을 걸 알았는지 이내 짐을 옆에 놓고 좌판 행상 모드로 변신하신다.
- 이궁... 아까 그 서양애는 저 위에 까지 올라 갈껀가 봐...
- 그러게...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나보지... 우리도 한번 가볼까...
- 아이구 돼따... 저기 올라가나 여기서 보나 다 그 경치가 그 경치지...
우리끼리 속닥이는데 갑자기 들리는 한국말... ‘한국 분이세요?’이다. 중국인인줄 알았던 그 동양인 여행자가 바로 한국 사람이었던 것... 해외에 나오면 아무래도 말조심을 덜하고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흉도 가끔은 아무렇지 않게 보게 되는데, 휴우~어디가나 말조심 해야지...
난닝에 산다는 그 한국인 아저씨는 그 서양인 친구와 함께 양숴에서 이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왔단다. 그래서 아마 우리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 듯 하다. 일행중에 중국인 여자가 한명 더 있었지만, 그녀는 계단을 올라오는 동안 모기에게 물어뜯기고 페달을 밟느라 더 이상 계단 올라갈 힘이 없다며 그냥 공원 입구 벤치에서 주저앉아 버렸단다.
대충 이곳의 전경을 둘러본 후 우리는 다시 양숴로 돌아온다.
구이린에서 양디, 싱핑을 거쳐 이곳 양숴로 흐르는 '리 강'은 다른 도시의 강 보다는 훨씬 맑은 편이어서 작은 쪽배를 하나 빌려 이리저리 유람 다니는 것도 잼 있을듯했다. 배를 어디서 구할까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을듯하다. 강변을 걷는 동안 어김없이 누군가가 다가와 ‘배 타슈~’ 하고 말을 붙일테니까 말이다.
이곳에서 꽤 인기 있는 투어라는 동굴 탐험도(배를 타고 동굴로 들어가고 진흙 머드팩도 할 수 있단다)도 우리 숙소에서 70위엔이라는 저렴한 가격(원래는 128위엔)에 해 주겠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경험으로 동굴에 들어가서 좋았던 적이 별로 없어서 그건 포기~
강 옆에 있는 작은 산에 입장료 거금 30원을 내고 들어가서 보는 경치랑 강변에서 보는 경치랑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고 분통을 터트리고 있으니 해는 이미 기울어서 내가 젤 좋아하는 즐거운 '묵자묵자! 시간'이다.
이곳의 명물 요리라는 ‘피쥬 위啤酒魚’ 맥주를 넣어 요리한 생선 요리를 먹어 볼 양으로 저녁 시간 버스 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현지인 식당가를 두리번 거려봤다.
생선, 닭, 빨간 가재, 징그럽게 큰 미꾸라지 등등 온갖 살아있는 재료들을 전부 길가에 내어놓고 손님들을 호객하고 있는 이 혼잡한 곳을 지나다보니 웬 큰 생선 한 마리가 퍼더덕~~ 뛰어올라 도망을 감행한다. 근데 재수 없게도 그 생선이 뛰어올라 들어간 곳은 바로 옆의 빨간 가재 다라이... 쩝... 쓰레기차 피할려다가 똥차에 깔려 죽는 다더니만, 요 생선이 딱 그꼴이네... 결국 가재들한테 물어뜯기다가 식당주인에 의해 구출 되어 다시 친구들이 있는 물속으로 첨벙했다... 어쨌거나 죽을 운명이지만 좀 불쌍한걸...
이 노점 식당가는 싸구려 분위기와는 달리 메뉴판의 가격은 그다지 저렴한 거 같지도 않고 어느 정도 주문의 기술도 필요한 거 같아 결국은 만만한 여행자 식당으로 발길을 돌려 피쥬 위를 먹어봤다.
어느 식당이나 거의 40위엔을 받는 이 요리는 이곳에 왔으면 꼭 먹어봐야 할 아이템인데다가 한국인들도 좋아하는 맛이란다.
- 맵게 요리할까요? 안 맵게 요리 할까요?
- 안 맵게 해주셍~
근데 가만 생각해 보니 안 맵게 요리하면 이 요리의 원래 맛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급히 종업원을 불러 "그냥 맵게 해주셍..." 이라며 주문했다.
잠시 후 고춧가루를 가득 뒤집어쓴 생선 조각이 얹혀진 큰 쟁반이 우리 식탁으로 날라져 왔다. 아아~ 이 매운 포스는 나도 감당하기가 힘든걸...
음... 맛은 그냥 그랬다... 아마 우리가 제대로 하는 곳을 못 찾아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막판에 맵게 해달라는 우리의 주문을 너무 곧이곧대로 들어(모든 종류의 문제는 의사소통에서 비롯되듯...) 엄청나게 고춧가루를 뿌려댄 덕분일수도 있다. 제대로 잘 요리하는 곳이라면 맛있었을 텐데, 뭐랄까 충분히 예상 가능 한 평범한 맛이었다.
토막 친 생선을 튀겨서 맥주, 토마토, 양파, 고추랑 버무려서 한번 푹 끓인 맛이라고 해야되나... 맥주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맥주가 그 요리에 특별히 다른 맛을 선사 한 것 같지는 않은듯... 맵기는 엄청나게 매워서 다 먹고 나니 입술 주위와 코 언저리 까지 화끈화끈 하다. 원래 매운 걸 잘 먹지 못하는 요왕은 몇 젓가락 먹지도 못하더니만 빨간 눈을 하고 땀을 엄청나게 흘려대는 흉물스런 모습으로 코를 훌쩍이며 앉아있다. 쩝...
야시장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요왕이 말한다... 내일 이곳을 떠나 싱핑으로 가겠다고... 허걱~ 여행자들의 도시인 이곳에 단 이틀 밤만 묵고 떠난다고? 우리는 이곳에 훨씬 더 오래 있을 예정이 아니었던가...? 요왕말에 의하면 좀 더 한산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원했건만, 이곳은 예상보다는 훨씬 더 활기(?)가 넘쳐서 좀 부담스럽다나...
헐... 이 정도가 부담스러운 양반이라면 카오산은 마치 ‘소돔과 고모라’ 같이 느껴질텐데, 그곳에서는 어케 그렇게 유유자적 잘 지낸담... 역시 사람은 정이 들게 되면 객관적인 시선을 잃고 마냥 좋아지기 마련인가 부다.
여기서 피자도 더 먹고 싶고 제대로 된 피쥬 위도 한번 더 먹고 싶다는 작은 불평은 요왕의 ‘짐 싸자~’ 소리에 묻혀지고, 결국 다음날 아침 우리는 구이린과 양숴 사이를 흐르는 리 강의 동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 싱핑으로 향했다.
양숴 에서...너무나 짧은 시간만을 체류한 덕에 이곳의 매력이나 감흥을 우리는 잘 느끼진 못했지만, 분명히 다른 여행자들에겐 좋은 인상을 준 곳이었을 거다. 앞으로 가게 될 싱핑과 구이린 역시 덩치만 크고 작을 뿐 이곳과 비슷한 경치와 비슷한 무드일테니 그다지 아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양숴를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