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여행기4> 아유타야 유적에서 왜 한국의 아픔이 느껴지는가
<동남아여행기4> 아유타야 유적에서 왜 한국의 아픔이 느껴지는가
20일(화)
여행 셋째 날.
이날은 태국의 두 번째 통일왕조 아유타야의 수도 아유타야에 가는 날이다. 아유타야는 방콕에서 2시간 거리에 위치해있다.
이날부터는 연준, 성씨가 빠졌다. 그들은 파타야에 가서 신나게 해양스포츠도 즐기고 바다도 구경하겠단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헤어진다니까 좀 아쉽다. 전날 밤 카오산 거리의 노상 카페에서 맥주 한잔을 들이키며 석별의 정을 나누기도 했다.
"우리 서울에서 만나요!"
이날은 아침부터 좀 허둥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날 하루종일 돌아다니고 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바람에 다음날 늦게 일어난 것이다. 아유타야 투어를 이용하려면 아침 7시까지는 모여야 하는데, 내가 일어난 시간이 그만 7시였던 것이다. 중식, 득림씨도 내가 깨워준다는 말만 믿고 있다가 다같이 망했다!
다행히 가이드가 다시 오겠다고 했단다. 한 40분 뒤인가, 가이드가 다시 우리 숙소를 찾았다. 이번 봉고차에는 한국인이 줄어든 대신 보다 다양한 나라 사람들이 모였다. 대만, 일본,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어찼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에 다들 괜찮단다.
내 옆에 앉은 대만인 린니(정확한 발음을 표기하기 힘들다)는 정말 성격이 발랄하다. 학교 교사라는 그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풍부한 관심을 표명한다. 옆에서 어찌나 쉴새 없이 묻고 또 묻는지. 그리고 정말 영어를 잘한다. 기죽어서 말이 제대로 안나온다. ^^; 하지만 화통한 그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다.
또다른 대만인 제니도 영어실력이 장난이 아니다. 계속 기죽는 윤정.
하지만 일본사람이 있지 않은가! 같이 영어를 못하는. ^^ 이십대 후반의 직장인 마나부 요시다와 안면을 익혔다. 마나부는 정말 얌전한 사나이다. 그가 같이 간 한국인을 제외한 유일한 남자인 관계로, 난 열심히 말을 붙이려 노력했지만, 도통 말을 해야지. 쩝!
아유타야는 400여년에 걸친 화려한 시대를 구가했지만 큰 아픔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버마의 침공을 두 번이나 당하면서 처절히 유린당하고 결국 버마 때문에 멸망당하고 만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처절한 유린의 흔적은 왓 프라 마하타트(사원)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 숱한 불상들이 하나같이 모두 목이 잘리고 없었다!. 아주 조직적으로 예리하게 목이 잘려진 불상들.
태국인 가이드 파(PA)에 따르면 그 불상 머리들은 세계 곳곳의 개인 저택이나 박물관 등에 전시돼있다고 한다. 당시 버마군과 이후 태국인들이 유물들을 대거 반출해 팔아먹었던 것이다.
파(PA)는 사원내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좋은데 잘려진 불상에 머리를 갖다대고는 찍지 말라는 당부를 한다.
조금은 슬픈 마음이 들었다. 지금도 그 불상 머리들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고 어딘지도 모를 낯선 곳에서 떠돌고 있을 생각을 하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현실도 떠올랐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한국의 귀중한 유물들을 얼마나 많이 강탈하고 팔아먹었는가. 지금도 그 한국의 유물들은 이름 모를 낯선 곳들에서 힘겹게 떠돌고 있겠지. 늘 고향을 그리워하며.
아유타야는 그런 슬픈 기억에도 불구하고 당시 화려한 시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파괴된 불탑과 불상들에서 태국인들의 신실한 불심과 다양한 문화적 수용력을 느낄 수 있었다.
태국은 스리랑카 불교의 영향을 받은 소승불교로 95%이상의 국민이 불자들이라고 한다. 스님들은 절대로 돈을 만져서는 안되며 순전히 탁발을 통해 그들의 끼니를 떼워야 한단다. 개인의 구도를 통해 해탈의 길로 가고자 하는 그들의 불교는 한국의 대승불교와는 방식이 조금 다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로 통하는 법이겠지.
거대한 나무 줄기에 에워싸인 잘려진 불상 머리가 눈에 띄었다. 아마도 잘려진 후 막 자라나는 나무 근처에 버려졌다가 나무줄기가 불상 머리를 감싸면서 타고 올라왔던 것 같다. 그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가 그리워진다.
20일(화)
여행 셋째 날.
이날은 태국의 두 번째 통일왕조 아유타야의 수도 아유타야에 가는 날이다. 아유타야는 방콕에서 2시간 거리에 위치해있다.
이날부터는 연준, 성씨가 빠졌다. 그들은 파타야에 가서 신나게 해양스포츠도 즐기고 바다도 구경하겠단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헤어진다니까 좀 아쉽다. 전날 밤 카오산 거리의 노상 카페에서 맥주 한잔을 들이키며 석별의 정을 나누기도 했다.
"우리 서울에서 만나요!"
이날은 아침부터 좀 허둥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날 하루종일 돌아다니고 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바람에 다음날 늦게 일어난 것이다. 아유타야 투어를 이용하려면 아침 7시까지는 모여야 하는데, 내가 일어난 시간이 그만 7시였던 것이다. 중식, 득림씨도 내가 깨워준다는 말만 믿고 있다가 다같이 망했다!
다행히 가이드가 다시 오겠다고 했단다. 한 40분 뒤인가, 가이드가 다시 우리 숙소를 찾았다. 이번 봉고차에는 한국인이 줄어든 대신 보다 다양한 나라 사람들이 모였다. 대만, 일본,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어찼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에 다들 괜찮단다.
내 옆에 앉은 대만인 린니(정확한 발음을 표기하기 힘들다)는 정말 성격이 발랄하다. 학교 교사라는 그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풍부한 관심을 표명한다. 옆에서 어찌나 쉴새 없이 묻고 또 묻는지. 그리고 정말 영어를 잘한다. 기죽어서 말이 제대로 안나온다. ^^; 하지만 화통한 그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다.
또다른 대만인 제니도 영어실력이 장난이 아니다. 계속 기죽는 윤정.
하지만 일본사람이 있지 않은가! 같이 영어를 못하는. ^^ 이십대 후반의 직장인 마나부 요시다와 안면을 익혔다. 마나부는 정말 얌전한 사나이다. 그가 같이 간 한국인을 제외한 유일한 남자인 관계로, 난 열심히 말을 붙이려 노력했지만, 도통 말을 해야지. 쩝!
아유타야는 400여년에 걸친 화려한 시대를 구가했지만 큰 아픔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버마의 침공을 두 번이나 당하면서 처절히 유린당하고 결국 버마 때문에 멸망당하고 만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처절한 유린의 흔적은 왓 프라 마하타트(사원)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 숱한 불상들이 하나같이 모두 목이 잘리고 없었다!. 아주 조직적으로 예리하게 목이 잘려진 불상들.
태국인 가이드 파(PA)에 따르면 그 불상 머리들은 세계 곳곳의 개인 저택이나 박물관 등에 전시돼있다고 한다. 당시 버마군과 이후 태국인들이 유물들을 대거 반출해 팔아먹었던 것이다.
파(PA)는 사원내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좋은데 잘려진 불상에 머리를 갖다대고는 찍지 말라는 당부를 한다.
조금은 슬픈 마음이 들었다. 지금도 그 불상 머리들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고 어딘지도 모를 낯선 곳에서 떠돌고 있을 생각을 하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현실도 떠올랐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한국의 귀중한 유물들을 얼마나 많이 강탈하고 팔아먹었는가. 지금도 그 한국의 유물들은 이름 모를 낯선 곳들에서 힘겹게 떠돌고 있겠지. 늘 고향을 그리워하며.
아유타야는 그런 슬픈 기억에도 불구하고 당시 화려한 시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파괴된 불탑과 불상들에서 태국인들의 신실한 불심과 다양한 문화적 수용력을 느낄 수 있었다.
태국은 스리랑카 불교의 영향을 받은 소승불교로 95%이상의 국민이 불자들이라고 한다. 스님들은 절대로 돈을 만져서는 안되며 순전히 탁발을 통해 그들의 끼니를 떼워야 한단다. 개인의 구도를 통해 해탈의 길로 가고자 하는 그들의 불교는 한국의 대승불교와는 방식이 조금 다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로 통하는 법이겠지.
거대한 나무 줄기에 에워싸인 잘려진 불상 머리가 눈에 띄었다. 아마도 잘려진 후 막 자라나는 나무 근처에 버려졌다가 나무줄기가 불상 머리를 감싸면서 타고 올라왔던 것 같다. 그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가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