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대해 얘기한 좋은 글이 있어 추천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지으신 신윤복 선생님의
"더불어숲"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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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떠남과 만남입니다.
그리고 돌아옴입니다.
여행한다는 것은 크게 두가지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떠남과 만남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자기의 성(城)밖으로 걸어나오는 것이며 만난다는 것은 물론 새로운 대상을 대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여행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자체가 떠남과 만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아침 자기의 집을 나와 새로운 곳, 새로운 대상을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여행과 똑 같은 내용을 갖고 있 음에 틀림없습니다.
20여년을 한 점(點)에 못박혀 있던 내가 갑작스런 여행에서 받았을 충격을 당신은 궁금해 하였습니다. 물론 내가 처음으로 해외여행에서 느꼈던 감회가 유별난 것임은 부정할 수 없 습니다. 더구나 처음으로 여정에 오른 날이 공교롭게도 28년전 대법원의 최종판결이 내려지던 날이었습니다. 당시 1심과 2심에서 이미 사형언도를 받고 있었던 나로서는 생사의 갈림 이 되는 날이기도 하였습니다. 하필이면 바로 그날에 첫 해외여행에 나섰습니다. 28년전이라면 이미 한 세대를 격한 아득한 세월의 저편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날과는 달리 생사의 갈림길에서 빠져나오는 출국이 아니었음에도 내게는 무척이나 피곤한 비행이었습니다. 나는 쏟아지는 졸음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동행하는 기자에게 오후 1시정각에 깨워달라고 부탁 한 다음 잠들고 말았습니다. 오후 1시는 대법원 법정에서 최종언도(最終言渡)가 내려졌던 시 각이었습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비행기는 고도 1만m, 시속 800km로 몽고 고원위를 날고 있었습니다. 나 무 한그루 강물 한줄기 눈에 띄지 않는 황량한 몽고땅이 마치 나의 지난날처럼 아득히 발밑 을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28년전의 그날 그 시각에 나는 태어나고 자라고 갇혀있던 땅을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떠나는 것인가. 떠나는 것이라면 무엇으로부터 떠나고 있는가. 나는 과연 떠날 수 있기나 한 것인가. 고공(高空)이 펼쳐보이는 '걸리버의 세계'가 떠나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놓기도 하였지만 결코 결별할 수 없는 지난 세월이 긴 비행운(飛行雲)을 그으며 나를 따라오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태평양위를 날고 있는 비행기 속에서 당신에게 편지를 쓰면서 느끼는 심정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떠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제 한 몸에 지나지 않을뿐입니다. 지난 세월을 떠난다는 것은 수고로운 바램일뿐입니다. 생각하면 우리는 결코 떠날 수 없는 자리에서 저마다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땅속에 뿌리박은 한 그루 나무일뿐입니다. 제 한 몸 이나마 떠날 수 있다는 생각도 실은 소망일따름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비록 그것이 감옥처럼 고인 세월이든,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이든 지나간 세월은 어김없이 우리들의 가슴속에 깊숙히 들어와 결코 떠날 수 없는 자기자신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더구나 떠난다는 것이 단순히 장소를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온 '생각의 성(城)' 을 벗어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쩌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어떤 운명적인 만남이 있다면 과거로부터 시원하게 결별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남을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난다는 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떠날 수 없다면 만날 수도 없는 것이라 해야 합니다. 당신은 내게 질문을 한적이 있습니다. 개구리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 두꺼비를 만났을 때 어느 것을 먼저 바라보는가를 물었습니다. 먼저 바라보는 것은 풀숲의 두꺼비가 아니라 머릿속의 개구리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여행지의 곳곳에서 재확인하게 되는 것은 역시 우리는 풀숲의 두꺼비보다 머릿속의 개구리를 먼저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스페인의 라만차에서는 동키호테가 말을 달려 돌진했다는 풍차를 찾아가 사진을 찍기도 하고 과달키비르강가에 서 있는 칼멘의 동상을 찾아보고 돈 호세가 칼멘을 칼로 찔러 죽인 투우장에서 감회에 젖다가 뒤늦게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픽션이었다는 뉘우침으로 부끄럽게 돌아서기도 하였습니다. 트로이의 목마앞에서 오딧세이의 장대한 서사시의 세계에 빠져들기도 하고 에페소의 유적지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화려한 열정을 상상하기도 하다가 문득 유럽의 신화와 역사에 젖어있는 나자신을 반성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의 신화를 읽기전에 먼저 그리스의 신화를 읽어야 했던 학창시절이 회상되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식민지땅에 드리우고 있는 자조(自嘲)와 패배주의에 매몰된 채 도도한 서풍(西風)의 세례를 받아온 근대사의 유역(流域)을 반성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행이란 떠남과 만남의 낭만이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재발견이었습니다.
여행 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정직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우리의 아픈 상처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만남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더 이상 갖지 않고 있지 않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볼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 법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과 그 삶의 방식인 문화에 최대한으로 겸손한 자세로 다가갈 뿐입니다. 그것이 비록 가난하고 납득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곳에서 삶을 꾸려온 수많은 사람들의 오랜 세월에 걸친 지혜와 노력의 결정(結晶)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교되거나 평가되기 이전에 먼저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쉽게 관여하려는 것은 오만과 무지입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역사가 일구어온 인류의 귀중한 자산을 훼손하는 폭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시원히 떠날 수 없듯이 그들 역시 떠날 수 없는 그들자신의 과거를 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행지의 도처에서 만나는 것은 이러한 오만과 무지가 낳고 있는 안타까움임니다. 특히 세계화라는 도도한 이데올로기가 도처에 그 예봉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만날 때 더욱 그렇습니다. 21세기를 지구촌의 시대로 단정하고 서둘러 세계를 만나기 위하여 여행에 나서 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숨막히는 산업사회의 질곡속에서 지친 심신 을 달래기 위하여 떠나온 관광객들의 경우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세 계화논리의 전령(傳令)이 되고 있거나 질곡의 외연(外延)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행은 돌아옴(歸)입니다. 정직한 귀향이며 겸손한 만남입니다. 나자신으로 돌아옴이며 타인에 대한 겸손한 이해입니다. 이 정직한 귀향과 겸손한 이해가 없는 한 서로 다른 세계가 평화롭고 평등하게 만날 수 있는 길은 찾아내기 어렵습니다. 20세기의 아픈 과거를 떠나 새로운 세기를 만날 수 있는 길을 찾아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더불어숲"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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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떠남과 만남입니다.
그리고 돌아옴입니다.
여행한다는 것은 크게 두가지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떠남과 만남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자기의 성(城)밖으로 걸어나오는 것이며 만난다는 것은 물론 새로운 대상을 대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여행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자체가 떠남과 만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아침 자기의 집을 나와 새로운 곳, 새로운 대상을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여행과 똑 같은 내용을 갖고 있 음에 틀림없습니다.
20여년을 한 점(點)에 못박혀 있던 내가 갑작스런 여행에서 받았을 충격을 당신은 궁금해 하였습니다. 물론 내가 처음으로 해외여행에서 느꼈던 감회가 유별난 것임은 부정할 수 없 습니다. 더구나 처음으로 여정에 오른 날이 공교롭게도 28년전 대법원의 최종판결이 내려지던 날이었습니다. 당시 1심과 2심에서 이미 사형언도를 받고 있었던 나로서는 생사의 갈림 이 되는 날이기도 하였습니다. 하필이면 바로 그날에 첫 해외여행에 나섰습니다. 28년전이라면 이미 한 세대를 격한 아득한 세월의 저편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날과는 달리 생사의 갈림길에서 빠져나오는 출국이 아니었음에도 내게는 무척이나 피곤한 비행이었습니다. 나는 쏟아지는 졸음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동행하는 기자에게 오후 1시정각에 깨워달라고 부탁 한 다음 잠들고 말았습니다. 오후 1시는 대법원 법정에서 최종언도(最終言渡)가 내려졌던 시 각이었습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비행기는 고도 1만m, 시속 800km로 몽고 고원위를 날고 있었습니다. 나 무 한그루 강물 한줄기 눈에 띄지 않는 황량한 몽고땅이 마치 나의 지난날처럼 아득히 발밑 을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28년전의 그날 그 시각에 나는 태어나고 자라고 갇혀있던 땅을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떠나는 것인가. 떠나는 것이라면 무엇으로부터 떠나고 있는가. 나는 과연 떠날 수 있기나 한 것인가. 고공(高空)이 펼쳐보이는 '걸리버의 세계'가 떠나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놓기도 하였지만 결코 결별할 수 없는 지난 세월이 긴 비행운(飛行雲)을 그으며 나를 따라오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태평양위를 날고 있는 비행기 속에서 당신에게 편지를 쓰면서 느끼는 심정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떠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제 한 몸에 지나지 않을뿐입니다. 지난 세월을 떠난다는 것은 수고로운 바램일뿐입니다. 생각하면 우리는 결코 떠날 수 없는 자리에서 저마다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땅속에 뿌리박은 한 그루 나무일뿐입니다. 제 한 몸 이나마 떠날 수 있다는 생각도 실은 소망일따름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비록 그것이 감옥처럼 고인 세월이든,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이든 지나간 세월은 어김없이 우리들의 가슴속에 깊숙히 들어와 결코 떠날 수 없는 자기자신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더구나 떠난다는 것이 단순히 장소를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온 '생각의 성(城)' 을 벗어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쩌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어떤 운명적인 만남이 있다면 과거로부터 시원하게 결별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남을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난다는 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떠날 수 없다면 만날 수도 없는 것이라 해야 합니다. 당신은 내게 질문을 한적이 있습니다. 개구리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 두꺼비를 만났을 때 어느 것을 먼저 바라보는가를 물었습니다. 먼저 바라보는 것은 풀숲의 두꺼비가 아니라 머릿속의 개구리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여행지의 곳곳에서 재확인하게 되는 것은 역시 우리는 풀숲의 두꺼비보다 머릿속의 개구리를 먼저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스페인의 라만차에서는 동키호테가 말을 달려 돌진했다는 풍차를 찾아가 사진을 찍기도 하고 과달키비르강가에 서 있는 칼멘의 동상을 찾아보고 돈 호세가 칼멘을 칼로 찔러 죽인 투우장에서 감회에 젖다가 뒤늦게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픽션이었다는 뉘우침으로 부끄럽게 돌아서기도 하였습니다. 트로이의 목마앞에서 오딧세이의 장대한 서사시의 세계에 빠져들기도 하고 에페소의 유적지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화려한 열정을 상상하기도 하다가 문득 유럽의 신화와 역사에 젖어있는 나자신을 반성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의 신화를 읽기전에 먼저 그리스의 신화를 읽어야 했던 학창시절이 회상되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식민지땅에 드리우고 있는 자조(自嘲)와 패배주의에 매몰된 채 도도한 서풍(西風)의 세례를 받아온 근대사의 유역(流域)을 반성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행이란 떠남과 만남의 낭만이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재발견이었습니다.
여행 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정직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우리의 아픈 상처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만남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더 이상 갖지 않고 있지 않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볼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 법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과 그 삶의 방식인 문화에 최대한으로 겸손한 자세로 다가갈 뿐입니다. 그것이 비록 가난하고 납득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곳에서 삶을 꾸려온 수많은 사람들의 오랜 세월에 걸친 지혜와 노력의 결정(結晶)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교되거나 평가되기 이전에 먼저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쉽게 관여하려는 것은 오만과 무지입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역사가 일구어온 인류의 귀중한 자산을 훼손하는 폭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시원히 떠날 수 없듯이 그들 역시 떠날 수 없는 그들자신의 과거를 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행지의 도처에서 만나는 것은 이러한 오만과 무지가 낳고 있는 안타까움임니다. 특히 세계화라는 도도한 이데올로기가 도처에 그 예봉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만날 때 더욱 그렇습니다. 21세기를 지구촌의 시대로 단정하고 서둘러 세계를 만나기 위하여 여행에 나서 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숨막히는 산업사회의 질곡속에서 지친 심신 을 달래기 위하여 떠나온 관광객들의 경우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세 계화논리의 전령(傳令)이 되고 있거나 질곡의 외연(外延)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행은 돌아옴(歸)입니다. 정직한 귀향이며 겸손한 만남입니다. 나자신으로 돌아옴이며 타인에 대한 겸손한 이해입니다. 이 정직한 귀향과 겸손한 이해가 없는 한 서로 다른 세계가 평화롭고 평등하게 만날 수 있는 길은 찾아내기 어렵습니다. 20세기의 아픈 과거를 떠나 새로운 세기를 만날 수 있는 길을 찾아내기 어려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