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후에 쓰는 여행기 - 쇼너와 레커의 태국 배낭여행(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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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후에 쓰는 여행기 - 쇼너와 레커의 태국 배낭여행(8)

쇼너 2 1337
1999년 3월 2일(화) 방콕 왕궁주변 도보여행

으슬으슬한 추위로 몸을 떨며 잠에서 깨었다.
시계를 보니 8시다. 확실히 에어컨은 켜놓으면 춥고 끄면 덥다. 거지같다. 앞으로는 에어컨이 없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레커를 두드려 깨운다. 피곤할텐데 의외로 순순히 잘 일어난다.
일어나서 씻고 오늘의 일정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했다. 원래 계획상 오늘은 수상시장 일일투어를 하기로 되어있었으나, 어제 워낙 정신이 없었던 관계로 투어예약을 하지 못해서 다음날로 잡혀있었던 왕궁주변 도보여행을 오늘 하기로 했다.
레커나 나나 원래 아침을 먹지 않기 때문에 굳이 아침을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단 숙소를 옮기기로 하고 일단 카오산 로드로 나갔다. 아침의 카오산은 조용했다. 어젯밤 길 옆 식당에서 맥주를 마시고 비디오를 보며 웃고 떠들던 그 많던 여행자들은 어디로 가버린걸까…
가게 문을 열려는 종업원들과 슬슬 다음 일정을 준비하는 여행자들만이 눈에 띌뿐 한산한 모습이었다.
몇군데 게스트하우스를 돌다가 싸왓디 게스트하우스에 다시 터를 잡았다. 가격과 시설도 괜찮고 해서 남은 방콕의 일정동안 이 곳에 머물기로 하였다.
짐을 들여놓고 로비로 나오니 방금 도착한 여행자들이 로비에 잔뜩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의 배낭크기였다. 족히 100리터는 될듯한 가방을 남녀 가리지 않고 메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체력들이다.

싸왓디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오는 골목에는 문신가게가 한 군데 있었다. 밖에다 자신들의 작품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한 남자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심지어는 성기끝까지 문신을 한 것을 보고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문신에 대한 혐오나 선입견이 많은데(조폭, 깡패, 전과자 등등) 서양에서는 그런 것이 별로 없는 듯했다. 그 크기나 문양도 가지가지였고, 저 정도라면 예술의 부류로 넣어줘야 하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있었다.

어쨌거나 짐은 게스트하우스에 놓아두고 비행기표랑 여권, 지갑만을 복대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만약을 대비해서 돈은 레커와 내가 반반씩 나누어서 보관했다.
가게에서 물을 한 병(예의 우윳빛 통)을 사가지고 왕궁쪽으로 코스를 잡았다. 원래는 타마삿대학교와 박물관을 들르기로 했는데 대학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원래 일정이 내일 일정을 당긴 것이라 박물관이 휴관이어서 그냥 건너뛴 것이다. 박물관은 꼭 보는 편이라 남부에 갔다가 시간날 때 가보기로 했다.
좀 걷다보니 큰길이 나왔다. 상당히 넓고 차도 많이 다니는 복잡한 교차로였는데 신호등이 전혀 없다. 그 많은 카오산 배낭족들이 왕궁을 가려면 반드시 건너야 하는 길인데도 말이다. 주위에는 우리와 같이 난감한 얼굴을 하고 눈치만 보고있는 배낭족들이 꽤 있다.

“에이…무단횡단 한두번 하냐? 건너자”

일단 우리가 차량들은 빈틈을 비집고 건너기 시작하자 눈치만 보던 사람들이 우르르 모두 건넌다. 영어로 구시렁거리기도 하면서…
그런데 이 길 건너는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건너가면서 공항에서 시간이 없어 들지못한 여행자 보험이 갑자기 아쉬워졌다.

천신만고 끝에 길을 건너자 바로 싸남 루앙이다. 싸남 루앙의 왕궁 반대쪽편에 서자 왕궁의 유명한 삼총사 탑(?)이 멀리 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각 나라 양식대로 지어진 3개의 쩨디다. 상당히 멀어 보이는데 날씨는 벌써 푹푹 찌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보로 충분히 가능함을 알고있고, 레커나 나나 걷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주위를 슬슬 둘러보며 걸어갔다. 이상한 것은 그렇게 많다는 뚝뚝기사의 유혹이나 보석사기… 등등 이 구역에서 흔히 출몰한다는 사기꾼(?)이 우리 눈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쇼너야. 우리가 지나치게 없어 보이는게 아닐까?”
“……”

싸남 루앙의 수많은 비둘기들을 헤치고 걸은 것이 얼마일까 왕궁의 하얀벽을 만났다. 입구가 어디로 가야 붙어있는지 몰라서 좀 두리번대다가 관광버스가 많이 서있는 곳을 발견하고는 그 쪽으로 가니 입구가 있다.
왕궁과 왓 쁘라깨우 입장권은 좀 비싸다. 아마 태국내의 사원입장료중 가장 비싼 것 같다. 물론 위만멕 표와 붙어있다지만 그래도 비싼편이다. 그러나 절대 피해갈 수 없는 곳이다.

벌써 수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지어 들어가고 있었다. 아줌마들이 무지하게 시끄러운(어디 아줌마는 안 시끄러우랴마는) 중국사람들도 많은 것 같고, 깃발따라다니는일본 관광객들도 많다. 간간히 한국사람들도 눈에 띈다.
우선 왕궁을 들어가니 3개의 대형 쩨디 그리고 비슷하게 생긴 수많은 탑(이것도 쩨디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다)들이 우리를 반긴다.
어느정도 거리에서 보면 정말 화려하고 찬란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좀 실망하게 된다. 황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쩨디는 금색타일의 집합체이고, 반짝반짝 화려한 쩨디도 거울조각과 촌스러운 색의 색타일을 닥지닥지 촘촘히 붙여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규모를 생각할 때 분명히 훌륭한 볼거리임에는 틀림없다.
내가 아마 건축이나 디자인, 혹은 태국역사에 대해서라도 조금만 자세히 알았더라도 더 흥미롭게 볼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문에 나오는 명언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절실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사실 3개의 쩨디 이외에도 왕궁에는 쏠쏠치 않은 볼거리들이 많이 있다. 여러가지 특이한 모양의 장식조각들과 신상들… 화려한 건물과 사원의 배치 등등.
하지만 그것말고도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연꽃화분이다. 태국의 곳곳에는 물을 담아놓는 소형분수같이 생긴 것이 있고 그 안에 작은 화분을 놓고 거기에 연꽃을 심어 놓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아마도 불교국가인 탓이 아닐까…
그 물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건 바로 구피라는 열대어이다. 태국이 원산지인 열대어인데 꼬리가 몸에 비해 상당히 크고 색깔이 화려하며 사육이 쉬워서 열대어를 기르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선택하는 열대어인데… 내가 당시 키우고 있던 열대어였다.

“난 구피 키우느라고 어항에 산소 넣고 겨울에는 히터켜주고 해도 잘 안자라는데…여기서는 그냥 지들끼리 알아서 잘 사네”
“역시 사람이건 동물이건 원산지에서 사는게 행복한 것 같아”

이렇듯 여행은 자신이 관심이 있는 분야에 대해서만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아는만큼 보이는구나…’

왕궁에 왔으니 기념사진을 또 찍어야 할 것이 아닌가? 척 보아하니 기념사진 포인트가 있다. 바로 3개의 쩨디가 가리는 것 없이 정통으로 보이는 위치가 있다. 가이들이 안내하는 폼이 지정석인 것 같다. 사람들이 줄도 서있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기념사진 한 장 찍었다.
왕이 산다는 왕궁은 들어가지 못했다. 원래 그런것인지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문틈으로 들여보니 화려하고 멋진 건물이 있다. 한 번 들어가보고 싶었으나 총 맞을것 같아서 통과.
왕궁과 왓 쁘라깨우는 경계가 모호했다. 얼추 안내도를 보고 그 유명하다는 에메랄드 불상을 보러갔더니 분위기가 술렁술렁한 것이 좀 이상했다. 옆에 있는 서양인에게 물어보니 오늘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무슨 행사가 있단다. 그 사람도 무슨 행사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걸 안 볼 수는 없지않은가? 어떻게 어떻게 비집고 봤더니 제지가 심하다. 그래서 흘깃 봤는데 뭔가 시퍼러딩딩한게 앉아있기는한데 불상이라기보다는 원숭이가 앉아있는 것 처럼 보인다. 억울하다… 흑흑.
얼떨떨하게 왕궁과 왓 쁘라깨우를 본 뒤, 왓포로 향했다.
역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까닭이 이해가 되었다. 감상을 한 단어로 얘기한다면 ‘화려’라는 단어가 되지 않을까?

왓포는 왕궁에서 별로 멀지 않았다..

슬슬 걸어서 가니 얼마 가지않아 왓포가 보인다.
들고 나는 사람들이 많은 커다란 건물이 있었고 눈치로 그 안에 와불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건물은 상상외로 컸다. 입구에서 신발들을 모두 벗고 들어가게 되어있어서 신발을 배낭에 대롱대롱 매달고(혹시나 잃어버리면 맨발로 방콕을 헤메게 될지도 몰라서) 법당(?)안으로 들어섰다.
거기에 와불이 있었다. 별로 크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머리에서 발끝까지 걸어보고서 얼마나 큰 불상인지 깨달았다. 그 큰 건물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불상은 규모로 사람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Size does matter라는 말은 고질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법당안은 시원했고 맨발에 느껴지는 돌바닥의 차가운 느낌도 좋았다. 여기저기서 플래쉬를 터뜨려가며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과 동양의 불상을 살펴보는 외국인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들….
사실 조형미의 측면에서는 빼어나지 못한 불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거대함에 압도당했을뿐. 조형미의 측면이라면 우리나라 석굴암의 본존불상을 따라갈 것이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 기하학적 균형을 과학적으로 따른 배치며 비례… 지금 봐도 입이 벌어진다.
우아함으로 따진다면 신라의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백미이고. 내가 뭐 국수주의의 색채를 띤 애국심이나, 민족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러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머리쪽에서 정말로 한참을 걸어서 발바닥쪽까지 갔다. 가이드북의 가이드에 충실하게 발바닥의 수미산도를 살펴보았다. 우리나라의 자개공예같이 옻칠 비슷한 까만 발바닥에 조개로 수미산도를 그려놓았다. 불법세계의 오묘함 혹은 이상향을 표현한 그림이라고 하는데 불교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는 나로서는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불교가 친숙한 우리나라 사람인 나도 그런데 외국인들은 어떠할까? 그것을 과연 이해할까? 물론 이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 이색적임만을 보고 돌아갈 것이다. 나도 그중에 하나고…

가이드북에 덜렁 와불(臥佛)만 보지 말고 경내를 한 번 둘러보고 나오라는 말이 나와서 둘러보았다. 우리는 정말 착한 여행자였을까 소신없는 여행자였을까?
경내에는 마사지 학교가 있었다. 왓포는 그 유명한 태국 마사지의 산실이라고 알려져 있고 실제로 그 안에서 마사지를 하기도 한다. 원조를 좋아하는 것은 세계 공통의 것일터 수많은 관광객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줄을 서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남이 내 몸에 손을 대는 것을 무척 꺼려하는 편이라 마사지 생각은 별로 없었고(그래서 난 아직까지 태국 마사지의 경험이 없다. 다음에 가면 한 번 시도해 보려고 한다) 뜨거운 햇살아래 줄서기가 겁이 나서 마사지를 받지는 못했다. 우리나라의 뜸이나 침, 수지침 혹은 지압도 별로 아프지도 않고 효과가 확실한데 관광상품화는 되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왓 포를 나와 다음 장소인 왓 아룬으로 향했다.
태국의 놀라운 전통문화의 관광상품화와 아직도 부족한 우리나라의 관광인프라에 대한 생각이 교차했다.

왓포에서 나와 어떻게 갔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짜오프라야강 건너편에 위치한 왓 아룬을 가기 위해 선착장을 찾았다. 쉽게 찾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나라 지하철 역 통과대 비슷한 것이 설치되어 있었다. 1인당 요금은 2B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왓 아룬으로 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짜오프라야 강물은 혼탁했다. 물이 더러워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진흙이 섞여서 그런 것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일전에 유럽을 다녀오셨던 아버님의 얘기에 의하면(난 아직도 유럽근처에도 못가봤다) 그 유명하다는 세느강, 도나우강, 라인강등등은 한강에 비하며 거의 준용하천이나 생활하천(한마디로 또랑)이라는데 짜오프라야는 그나마 좀 넓은 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나아감에 따라 왓 아룬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랍쇼? 저기 보이는 파란 비닐 천막은 무엇이란 말이냐?
알고보니 왓 아룬은 보수공사중이었다. 그래서 탑에 올라가보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인부들이 보수작업을 하는 것을 구경할 수 있었다.
왓아룬은 그 규모가 대단한데 거기에 인부들이 달라들어서 탑을 구성하는 그 세세한 문양이며 조각들에 페인트칠(!)을 하고있었다. 인부들의 문화적 소양을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우리나라 잡역부의 옷차림이었다. 하긴 그렇게 큰 답에 문화재 전문가를 총동원시켜서 복원하는 것은 무리다 싶었다. 그 거대한 탑을 보며 그 인부들이 불쌍해졌다.
복원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은 확연히 구분이 되었는데 새로 칠한 부분은 정말로 화려하게 보였고 아직 복원이 진척되지 않은 부분은 색이 바래어 그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새벽사원의 진면목은 새벽에 은은하게 드러나는 탑의 모습에 있다고 하던데 땡볕에 봐도 멋지게 보였다. 왕궁이나 왓아룬이나 낱개로 볼때는 별 것 아닌 것들을 대규모로 모아서 그 규모와 화려함을 자랑하는 것이 특징인 듯 싶었다.

좀 올라가보고 싶었으나 공사관계로 올라가지 못한게 아쉬웠지만 왓아룬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고 돌아섰다. 그 막 내려오려고 하는데 저 쪽에서 일본인임이 분명한(약간 지저분한 수염과 부얼부얼한 헤어스타일로 미루어보아) 남자 애들이 입구에 있는 사진찍기틀(불상같은 모양을한 나무판인데 얼굴부분만 자신의 얼굴을 집어넣게 되어있는 것)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 틀의 하단부분에 약 폰트 11의 크기로 XX Baht(금액이 기억이 안난다)라고 써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채…

“레커야, 저기 저 일본애들 좀 봐라” “왜?”
“쟤들 이제 조금있다가 좀 황당한 꼴을 당할거니까…”

아니나 다를까 사진을 찍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등장하는 요금징수원이 있었다. 돈을 요구하니 일본애들은 이게 무슨일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당당하게 그러면서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틀 밑의 조그마한 글자를 가리키는 아저씨.
그 때 그 일본 애들의 황당한 표정이라니…
사실 나는 가서 말을 해주고 싶었으나 괜히 내가 나서서 영업방해를 하는 것도 좀 그렇고 그 금액이 일본 엔화와의 환율을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 금액이어서 그냥 보고만 있었다.
역시 주도면밀한 관찰은 생존의 지름길이다.

아침 일찍 나와서 서둘렀던 탓일까? 아니면 그냥 성의없게 둘러보아서일까 시간이 많이 지나지는 않았다. 다시 르아 캄팍을 타고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선착장 주위를 둘러보니 별로 먹을 것도 없고 그래서 좀 참았다가 카오산에서 먹기로 했다. 햇살은 따갑고 긴바지를 입은 터라(왕궁 때문에 특별히 긴바지를 입었다. 화근의 시초가 된다) 땡볕에 다시 걸어가기가 암담해서 서있는 뚝뚝을 타고 왕궁까지 왔다(흥정을 했지만 적절한 가격에 온건지는 아직도 모른다). 왜 왕궁에서 내렸는지도 기억이 안난다. 무슨 이유가 있었음에는 분명하다. 다시 싸남 루앙을 지나서 카오산으로 오는 길에 의외의 성가신 복병을 만났다.
그것은 바로 비둘기 모이 행상. 싸남 루앙에는 비둘기가 많은데 그 모이를 사라고 아줌마며 할머니들이 10미터를 멀다하고 붙잡는 것이다. 과감히 무시하고 걸었다.
성질급한 레커는 신경질까지 낸다.
다시 목숨을 건 무단횡단을 통하여 카오산로드로 돌아온 우리는 일단 숙소로 돌아가 우리를 내내 괴롭혔던 긴바지를 벗어던졌다.
오호! 통재라~ 긴바지라고는 갈 때 입고간 청바지밖에 없어서 그것을 입고 돌아다닌 레커는 바람이 통하지 않았던 하반신의 거의 모든 부분에 심각한 땀띠 증상을 보였다. 어쩌랴… 눈썹이 휘날리게 편의점으로 가서 존슨즈 베이비 파우더를 구입하여(이 파우더는 아직도 쓰고있다) 골고루 도포하였다.(에로틱한 상상은 금하여 주시라…^^ 에로틱은 커녕 여행에 차질생길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계속됩니다....
2 Comments
레커는 귀 1970.01.01 09:00  
의외가 아니라 난 원래 일어나라고 깨우면 '벌떡~' 일어나는 편이다 깨워도 안일어나는 자는 쇼너뿐인가 하노라<br>쇼너,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뇨?
토토로 1970.01.01 09:00  
저희도 왕궁가는날 긴바지 입고 갔다가 하루종일 더워서 짜증도 나고 싸움도 엄청나게 했지요...^^저희는 거기에 양말, 운동화까지 챙겨 신었어요..거의 죽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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