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왓디 무앙타이(17.끝)
- 마지막 날 -
오늘은 1월5일. 지난 12월29일에 비행기를 타며 시작된 여행이 끝나는 날이다. 아침 7시40분
기상. 어제 돌아보지 못한 방콕의 이곳저곳을 돌아보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하늘은 맑고 바
람도 살랑거리는데 마음은 봄처녀의 그것처럼 하늘거린다. 배고파서 고생했던 어제를 거울
삼아 오늘 아침은 든든하게 먹어뒀다. 닭고기덮밥, 오믈렛치즈샌드위치, 팬케이크에 핫커피
와 냉커피까지 총 8천원 어치를 먹었는데, 이런 식으로 아침을 배 터지게 먹는 이가 우리
말고 여기에 또 있을까? 하하!!
카오산 동쪽의 큰길로 나가서 왼쪽 방향으로 걸으니 날개모양을 한 커다란 기둥 네 개가 보
였다. 이것이 민주기념탑. 민주화를 요구하다 이 거리에서 죽어간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한
기념탑이다. 이어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는데 아침 먹은지 10분도 안됐건만 벌써 아내는 구
운 옥수수를 입에 물고 있다. 보러 온 건지 먹으러 온 건지... 암튼 왕이 행차하는 거리란 뜻
의 랏차담넌 거리(Ratchadamnoen Road)는 그 이름에 걸맞게 광화문대로와 닮아있고, 아침
부터 뚝뚝과 자동차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좀 더 걸어 내려가니 오른쪽으로 라마3세의 동상
이 있는 공원이 나오고, 뒷편으로는 뾰족한 탑이 높이 서 있는데 이곳이 로하쁘라삿. 안으로
들어가서 나선형 층계를 따라 끝까지 오르니 탑의 꼭대기에 도착. 방콕시내가 한 눈에 들어
온다. 이렇게 전망 좋은 곳은 인근에 있는 푸카오텅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인공으로 만든
산 위에 있는 황금색의 탑을 오르면 역시 가슴이 탁 트인다.
여기까지 오니 벌써 걷는 것이 고단해진다. 이럴 때는 뚝뚝을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
신나게 방콕시내를 달려서 도착한 곳은 비만맥궁전이다. '구름 위의 집'이란 의미의 이곳은
태국의 왕실과 관련된 여러 사진과 물품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추천해 주고 싶다. 안에 들어
가니 한 명에 1,800원씩 받는 예쁘게 꾸민 버스가 있어서 이용해 봤다. 아가씨 하나는 운전
을 하고, 다른 하나는 설명을 해 주는데,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나의 영어실력을 제외하면
모든게 만족스러웠다. 경내를 한바퀴 도는 것은 물론 밖에 나와서 왓 벤차마모핏(대리석사
원), 찌트라다 궁전(현재 왕이 사는 곳), 국회의사당, 두싯동물원, 서포트박물관 등을 돌며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장점. 다시 처음에 탄 곳에 내려주는데, 이번에는 걸어다니며 비
만맥궁전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전에 왕자와 공주가 쓰던 방에 들어가서 물품들을 보
는데, 모든게 굉장히 낯익다. 혹시 내가 전생에 이 집쥔?
- 씨푸드 -
대충 둘러보는데도 시간이 너무 걸린데다 점심도 건너뛰며 빙과와 아이스크림으로 배를 채
웠더니 허기에 쓰러질 듯...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저녁을 먹기로 하고 다시 뚝뚝을 탔다.
도착한 곳은 아마리워터게이트호텔. 내가 묵었던 이름만 호텔인 그 곳과는 차원이 다르게
엄청 으리으리... 그러나 호텔로 가기 위함은 아니고, 이 앞에는 씨푸드가게들이 많다. 씨푸
드(Sea Food)도 어제 먹은 수끼와 함께 이곳에 다녀온 이들이 한결같이 추천하는 음식이니
어찌 거를 수 있겠는가?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은 쑤쿰윗에 있는 씨푸드마켓. 그러나 아침에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짐을 맡기기 위해 찾아간 홍익여행사에서는 씨푸드마켓보다 이리로
가보라고 권유해줬다. 가격이 절반이면 될거라나?
호텔 앞에서 길을 건너 조금 걷다보니 아닌게아니라 내가 찾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밖에는
사진과 함께 메뉴를 소개한 두꺼운 책이 펼쳐져 있어서 구태여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
니 좋고. 내가 책을 뒤적이자 당연히 삐끼가 와서 달라붙는다. 밖에서 대충 음식을 선택하니
삐끼는 가격도 얼추 계산해 준다. OK!!
생각보다 꽤 넓은 가게 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으니 먼저 낑깡을 담은 물을 한바가지
가져온다. 여기에 손 씻으면 비린내가 안 난다나? 암튼 한국에서는 비싼 값 때문에 엄두를
못 냈었으니 여기서 뽕을 뽑자! 이토록 비장한 결의를 하는 가운데, 음식 등장. 처음에 주문
했던 것은 가재요리. 허허... 놀라거나 비웃지 마시라... 난 샛강에 사는 손가락 굵기의 가재
는 보았으되 이렇게 큰 가재는 처음이다. 어른 팔뚝보다도 굵다! 양념에 비벼진 살은 처음
먹는데도 맛은 뾰오옹!! 상추에도 싸 먹고 밥도 비비고, 며칠 굶다 온 사람처럼 눈 깜짝할
새에 쓱싹. 이어서 나온 왕게 한 마리도 단번에 해치우니 배가 상당히 불러오는데 이번엔
오징어를 시켜봤다. 오징어에 게살을 넣고 구운 건데 이 역시도 맛은 엄청나다. 이쯤되니 결
국 어제처럼 거동에 이상이 발생...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계산서를 청구하니 870바트. 우리 돈
으로 3만450원. 으하하하!!!!
- 태국에 대한 선입관 -
흔히 [태국]이라고 하면 우리들 대부분의 인식이 싸구려 패키지 관광의 나라 또는 골프관광
내지는 섹스관광이나 보신관광의 나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
리는 아니다. 내가 여행했던 12.29일에서 1.6일은 비행기 값이 1년 중에서도 가장 비싼 하이
피크 시즌. 구할 수 있었던 가장 싼 표가 왕복 64만원이었지만, 신문에 실린 방콕, 파타야 4
박5일권은 49만9천원이다. 게다가 '식사제공에 특급호텔 투숙'이란 문구까지 선명하다. 허허
허... 이렇듯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싸구려관광도 가능한 곳이 바로 태국이다. 싼 맛
에 골프를 치러오는 사람들로 공항이 넘쳐나는 것도, 팟퐁을 들락거림은 물론 이상한 마사
지까지 받아가며 매춘을 자랑인양 떠들어대는 것도, 맨손체조 한번을 안 하면서도 건강을
위해서라면 뱀이나 개구리는 물론 별 이상한 동물들까지 다 잡아먹고 돌아가는 것도 모두
사실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곳에 오기 전에는 나 역시 그러했다. 특별한 생각이라곤 없었다. 그
저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 그렇다고 함부로 막 대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기죽을
일은 전혀 없는, 오히려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얼마든지 괜찮을 그런 나라였다.
(특히 이곳에서 한국인은 유태인과 더불어 경멸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음을 몰랐다) 그럼
내 눈에 비친 그네들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 시내버스 -
어제 황금불상이 모셔진 왓뜨라이밋을 보고 카오산으로 돌아오기 위해 시내버스를 탔을 때
였다. 방콕의 버스는 옛날에 우리 나라가 그랬듯이 안내양이 직접 돌아다니며 요금을 받는
다. 지리에 어두운 나는 걱정스런 맘으로 말을 붙였다.
"카오산에서 내려주세요"
"..........................................."
역시 듣던 대로 태국의 일반인들은 영어를 할 줄 몰랐다. 나이가 사십은 넘어 뵈는 안내양
아줌마는 그저 멀뚱멀뚱 말이 없이 무뚝뚝...
안내양의 이런 모습에 더 답답해진 나는 앞에 앉은 여중생쯤 되어 보이는 애한테 다시 물었
다.
"카오산까지 얼마나 남았나요?"
"...................."
"영어할줄 알아요?"
"...................."
음.. 우리 나라처럼 여기 애들도 중고생은 영어에 서툰 모양. 오전에 만났던 탐마삿대학의
학생들은 역시 똑똑한 것이었다. 유창한 발음으로 내 기를 완전히 죽였으니까. 그런데 맨 뒷
자리에 앉아 있는 내가 이토록 답답해하자 그 모습이 안쓰러운지 내 옆에 앉은 아저씨가 바
디랭귀지로 설명해 준다. 물론 정확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이 아저씨 따라서 내려볼까도
생각했지만, 나보고 좀 더 가라고 하곤 먼저 하차. 고맙지만 서운...
답답...
얼마를 더 달렸을까... 안내양 아줌마가 우리에게 손짓을 한다. 당연히 나와 아내는 스프링처
럼 뛰어나갔고. 그러자 안내양은 어떤 아가씨를 소개해 준다. 이 아가씨도 여기서 내리는 모
양. 버스는 카오산의 코앞에 서지 않으므로 길 가르쳐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버스에서 내리자 이 아가씨는 유창한 영어로 내게 길을 안내해 줬다. 설명을 듣고 있으려니
이 분에 대한 고마움도 고마움이지만, 승객을 배려해 준 안내양에 대한 고마움이 더욱 따뜻
하게 느껴졌다.
- 뚝뚝에서 -
오늘 오전에 푸카오텅에서 비만맥궁전을 가기 위해 뚝뚝을 잡을 때였다. 문제는 차비를 얼
마나 줘야하는지를 모르는 것. 무턱대고 잡아타다간 바가지를 쓰거나 아님 이상한 곳에 끌
려가서 협박을 당해야 하는데... (협박=시내관광을 10바트에 시켜주겠다는 기사도 있는데, 이
런 것 타면 어딘가로 끌려가서 싸구려 보석을 비싼 값에 사도록 강요당한다) 결국 머리를
쓴 것은 태국 현지인에게 물어봐서 먼저 대략의 차비를 알아내는 것. 신호등 앞에서 만만한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니 깨끗한 옷차림의 남자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태국분이세요?"
"예"
"제가 비만맥궁전을 가고 싶은데, 뚝뚝타면 차비는 얼마를 줘야 하나요? 대충이라도 가르쳐
주세요"
"대충..."
잠깐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아예 길거리에 나와서 뚝뚝을 잡아준다. 그리고 기사에게 요금
을 물어봐주네? 70바트. 여행자가이드에는 60바트로 나와 있어서 내가 깎자고 우기니 또다
시 기사와 대화... 결국 깎진 못하고(내가 있는 위치에서 나면 U턴을 해야 하니 60바트에 가
려면 길을 건너야 한다고 해서) 그냥 탔지만 참 친절한 아저씨였다. 그리고 사실은 이 아저
씨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웃는 얼굴.. 적극적인 친절... 비만
맥궁전에서 아마리워터게이트호텔로 갈 때도 경찰아저씨가 뚝뚝을 잡아 요금까지 매겨줬고,
어제 야왈랏거리에서 만난 아저씨도 그랬다.
- 돌아오기 -
저녁 8시가 되자 우리는 카오산에서 공항버스를 탔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쉬
움이 남는 밤... 아내는 이곳에 온 이튿날부터 집에 가고싶단 소리를 입에 달고 다녔지만, 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그저 한숨만 나온다.
공항에 도착하니 9시 무렵.. 11시50분 비행기이니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는데, 오히려 이게
문제였다. 할 일이 없어서 공항바닥에 앉아 밍기적거렸는데 어이가 없게도 그러다가 체크인
시간을 놓친 것. 사실 체크인인야 아무 때나 해도 되는데, 일이 안 되려고 그랬는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광판에 우리가 타야할 비행기가 나타나면 체크인 하는 시간이지? 아
무 때나 막 하는 게 아니라...' 사실 일이 이렇게 된 근본이유는 언어소통의 문제가 컸다. 되
지도 않는 영어를 하기가 귀찮아져서 그냥 있었던 것.
결국 그렇게 시간만 죽이다가 11시20분에서야 체크인. 공항직원은 놀란 얼굴을 하더니 태국
말로 계속 뭐라 떠들어댄다. 일단 화물로 부치려던 가방이 되돌아왔다. 비행기 짐칸을 닫은
모양. 이어서 직원은 "Hurry up"을 외치며 앞에서 뛰었고, 우리 부부는 모든 짐을 양손에
들고 달리기를 시작. 이 무슨 팔자에 없는 생고생인가...하는 생각을 하며 뛰는데, 삶이 고단
하다. 결국 직원의 에스코트까지 받으며 출국심사대에 입장했는데, 이럴수가... 바빠 죽겠는
데, 줄은 왜 그리 길게 늘어서 있는지... 특히 이 때는 휴가철이라 비행기를 놓치는 날이면
다음 좌석을 기약할 수 없는 성수기인데... 줄 끝에 서서 발만 동동 구르니 애간장이 녹는다.
우리 부부의 이런 딱한 모습을 지켜보던 어떤 우리 나라 아줌마 왈.
"그렇게 바쁘면 양해를 구하고 앞으로 가서 서요"
아하!! 우리는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을까.. 이 아줌마의 말을 듣고 신이 난 우리는 가방을
들고 뛰어가서 맨 앞으로 갔다. 새치기를 하겠다 이거였지. 뒷사람에게 "I'm sorry"하고 공
항직원 앞에 섰는데...
"당장 뒤로 가!!"
태국사람이라고 해서 언제나 친절한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게 예쁜 입으로도) 소리를
빽! 지르는데... 창피한 것보다는 그 단호함에 주눅이 들었다. 그 모습에서는 내가 한 새치기
를 '절대 해서는 안될 일'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 결국 우리 부부는 완전히 쫄아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안절부절...
이때는 주위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한 아저씨가 우리를 안심시킨다.
"여기 들어오면 비행기는 절대 안 떠요. 탈 때까지 기다리니까 걱정마세요"
다른 아저씨 왈 "몇 시 비행기요?"
(풀죽은 목소리로) "11시50분요..."
또 다른 아저씨 왈 "그럼 아직 많이 남았네 뭐... 10분전에 공항에 오는 사람도 있는데"
(속으로) "하하하!!"
남들은 어글리코리안 어쩌고 해도 난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이런 여유(?)가 참 좋다. 갑자기
마음이 턱 놓이며 기분까지 유쾌해졌다. 비행기로 이동하는 셔틀버스 안에서 이미 11시50분
을 넘고 있었는데, 모두가 한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이건만 아무도 걱정하는 이가 없다. 오히
려 골프치는 얘기로 버스가 떠나갈 듯...
사족:
1) 내가 '회'에 대해 몰라서 그랬는데, 나중에 선생님들한테 얘기해 보니 여기도 그렇게 큰
가재를 판다고 한다. 문제는 돈! 뭐 어디가면 있긴 한데 값이 25만원? 그 말이 맞는지는 모
르겠으나, 3만원 갖고는 광어 1킬로 먹기도 힘들다고...
2) 이 여행기의 제목을 [싸왓디 무앙타이]로 정한 것은 내가 본 태국인들에 대한 사랑과 감
사의 의미이다. 태국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자유의 나라'라는 의미로 '무앙타이'라 부른다
고... '싸왓디'는 우리의 '안녕하세요'에 해당하는 그들의 인사말
3) 나무 한그루를 보고 숲을 논하는 것이겠으나, 태국을 한번 다녀온 사람들은 결국 이 나
라와 사람들을 좋아하게 될 것이란 생각을 했다. 친절과 미소의 나라...
4) 태국사람들은 방콕을 천사의 도시란 뜻으로 [끄룽 텝]이라 부른다.
5) 오늘의 사진은 비만맥 궁전의 모습
6) 저는 이렇게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 여러모로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제 글을 읽어 주신 친
구제위, 제자들, 그리고 인터넷 사이트 [태사랑]의 여러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제 글을
읽고 좋은 말씀 주신 분들, 또 충고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7) 처음 계획보다 엄청 길어진 여행기를 여기서 마칩니다. 컵쿤 캅...
오늘은 1월5일. 지난 12월29일에 비행기를 타며 시작된 여행이 끝나는 날이다. 아침 7시40분
기상. 어제 돌아보지 못한 방콕의 이곳저곳을 돌아보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하늘은 맑고 바
람도 살랑거리는데 마음은 봄처녀의 그것처럼 하늘거린다. 배고파서 고생했던 어제를 거울
삼아 오늘 아침은 든든하게 먹어뒀다. 닭고기덮밥, 오믈렛치즈샌드위치, 팬케이크에 핫커피
와 냉커피까지 총 8천원 어치를 먹었는데, 이런 식으로 아침을 배 터지게 먹는 이가 우리
말고 여기에 또 있을까? 하하!!
카오산 동쪽의 큰길로 나가서 왼쪽 방향으로 걸으니 날개모양을 한 커다란 기둥 네 개가 보
였다. 이것이 민주기념탑. 민주화를 요구하다 이 거리에서 죽어간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한
기념탑이다. 이어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는데 아침 먹은지 10분도 안됐건만 벌써 아내는 구
운 옥수수를 입에 물고 있다. 보러 온 건지 먹으러 온 건지... 암튼 왕이 행차하는 거리란 뜻
의 랏차담넌 거리(Ratchadamnoen Road)는 그 이름에 걸맞게 광화문대로와 닮아있고, 아침
부터 뚝뚝과 자동차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좀 더 걸어 내려가니 오른쪽으로 라마3세의 동상
이 있는 공원이 나오고, 뒷편으로는 뾰족한 탑이 높이 서 있는데 이곳이 로하쁘라삿. 안으로
들어가서 나선형 층계를 따라 끝까지 오르니 탑의 꼭대기에 도착. 방콕시내가 한 눈에 들어
온다. 이렇게 전망 좋은 곳은 인근에 있는 푸카오텅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인공으로 만든
산 위에 있는 황금색의 탑을 오르면 역시 가슴이 탁 트인다.
여기까지 오니 벌써 걷는 것이 고단해진다. 이럴 때는 뚝뚝을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
신나게 방콕시내를 달려서 도착한 곳은 비만맥궁전이다. '구름 위의 집'이란 의미의 이곳은
태국의 왕실과 관련된 여러 사진과 물품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추천해 주고 싶다. 안에 들어
가니 한 명에 1,800원씩 받는 예쁘게 꾸민 버스가 있어서 이용해 봤다. 아가씨 하나는 운전
을 하고, 다른 하나는 설명을 해 주는데,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나의 영어실력을 제외하면
모든게 만족스러웠다. 경내를 한바퀴 도는 것은 물론 밖에 나와서 왓 벤차마모핏(대리석사
원), 찌트라다 궁전(현재 왕이 사는 곳), 국회의사당, 두싯동물원, 서포트박물관 등을 돌며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장점. 다시 처음에 탄 곳에 내려주는데, 이번에는 걸어다니며 비
만맥궁전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전에 왕자와 공주가 쓰던 방에 들어가서 물품들을 보
는데, 모든게 굉장히 낯익다. 혹시 내가 전생에 이 집쥔?
- 씨푸드 -
대충 둘러보는데도 시간이 너무 걸린데다 점심도 건너뛰며 빙과와 아이스크림으로 배를 채
웠더니 허기에 쓰러질 듯...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저녁을 먹기로 하고 다시 뚝뚝을 탔다.
도착한 곳은 아마리워터게이트호텔. 내가 묵었던 이름만 호텔인 그 곳과는 차원이 다르게
엄청 으리으리... 그러나 호텔로 가기 위함은 아니고, 이 앞에는 씨푸드가게들이 많다. 씨푸
드(Sea Food)도 어제 먹은 수끼와 함께 이곳에 다녀온 이들이 한결같이 추천하는 음식이니
어찌 거를 수 있겠는가?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은 쑤쿰윗에 있는 씨푸드마켓. 그러나 아침에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짐을 맡기기 위해 찾아간 홍익여행사에서는 씨푸드마켓보다 이리로
가보라고 권유해줬다. 가격이 절반이면 될거라나?
호텔 앞에서 길을 건너 조금 걷다보니 아닌게아니라 내가 찾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밖에는
사진과 함께 메뉴를 소개한 두꺼운 책이 펼쳐져 있어서 구태여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
니 좋고. 내가 책을 뒤적이자 당연히 삐끼가 와서 달라붙는다. 밖에서 대충 음식을 선택하니
삐끼는 가격도 얼추 계산해 준다. OK!!
생각보다 꽤 넓은 가게 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으니 먼저 낑깡을 담은 물을 한바가지
가져온다. 여기에 손 씻으면 비린내가 안 난다나? 암튼 한국에서는 비싼 값 때문에 엄두를
못 냈었으니 여기서 뽕을 뽑자! 이토록 비장한 결의를 하는 가운데, 음식 등장. 처음에 주문
했던 것은 가재요리. 허허... 놀라거나 비웃지 마시라... 난 샛강에 사는 손가락 굵기의 가재
는 보았으되 이렇게 큰 가재는 처음이다. 어른 팔뚝보다도 굵다! 양념에 비벼진 살은 처음
먹는데도 맛은 뾰오옹!! 상추에도 싸 먹고 밥도 비비고, 며칠 굶다 온 사람처럼 눈 깜짝할
새에 쓱싹. 이어서 나온 왕게 한 마리도 단번에 해치우니 배가 상당히 불러오는데 이번엔
오징어를 시켜봤다. 오징어에 게살을 넣고 구운 건데 이 역시도 맛은 엄청나다. 이쯤되니 결
국 어제처럼 거동에 이상이 발생...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계산서를 청구하니 870바트. 우리 돈
으로 3만450원. 으하하하!!!!
- 태국에 대한 선입관 -
흔히 [태국]이라고 하면 우리들 대부분의 인식이 싸구려 패키지 관광의 나라 또는 골프관광
내지는 섹스관광이나 보신관광의 나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
리는 아니다. 내가 여행했던 12.29일에서 1.6일은 비행기 값이 1년 중에서도 가장 비싼 하이
피크 시즌. 구할 수 있었던 가장 싼 표가 왕복 64만원이었지만, 신문에 실린 방콕, 파타야 4
박5일권은 49만9천원이다. 게다가 '식사제공에 특급호텔 투숙'이란 문구까지 선명하다. 허허
허... 이렇듯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싸구려관광도 가능한 곳이 바로 태국이다. 싼 맛
에 골프를 치러오는 사람들로 공항이 넘쳐나는 것도, 팟퐁을 들락거림은 물론 이상한 마사
지까지 받아가며 매춘을 자랑인양 떠들어대는 것도, 맨손체조 한번을 안 하면서도 건강을
위해서라면 뱀이나 개구리는 물론 별 이상한 동물들까지 다 잡아먹고 돌아가는 것도 모두
사실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곳에 오기 전에는 나 역시 그러했다. 특별한 생각이라곤 없었다. 그
저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 그렇다고 함부로 막 대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기죽을
일은 전혀 없는, 오히려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얼마든지 괜찮을 그런 나라였다.
(특히 이곳에서 한국인은 유태인과 더불어 경멸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음을 몰랐다) 그럼
내 눈에 비친 그네들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 시내버스 -
어제 황금불상이 모셔진 왓뜨라이밋을 보고 카오산으로 돌아오기 위해 시내버스를 탔을 때
였다. 방콕의 버스는 옛날에 우리 나라가 그랬듯이 안내양이 직접 돌아다니며 요금을 받는
다. 지리에 어두운 나는 걱정스런 맘으로 말을 붙였다.
"카오산에서 내려주세요"
"..........................................."
역시 듣던 대로 태국의 일반인들은 영어를 할 줄 몰랐다. 나이가 사십은 넘어 뵈는 안내양
아줌마는 그저 멀뚱멀뚱 말이 없이 무뚝뚝...
안내양의 이런 모습에 더 답답해진 나는 앞에 앉은 여중생쯤 되어 보이는 애한테 다시 물었
다.
"카오산까지 얼마나 남았나요?"
"...................."
"영어할줄 알아요?"
"...................."
음.. 우리 나라처럼 여기 애들도 중고생은 영어에 서툰 모양. 오전에 만났던 탐마삿대학의
학생들은 역시 똑똑한 것이었다. 유창한 발음으로 내 기를 완전히 죽였으니까. 그런데 맨 뒷
자리에 앉아 있는 내가 이토록 답답해하자 그 모습이 안쓰러운지 내 옆에 앉은 아저씨가 바
디랭귀지로 설명해 준다. 물론 정확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이 아저씨 따라서 내려볼까도
생각했지만, 나보고 좀 더 가라고 하곤 먼저 하차. 고맙지만 서운...
답답...
얼마를 더 달렸을까... 안내양 아줌마가 우리에게 손짓을 한다. 당연히 나와 아내는 스프링처
럼 뛰어나갔고. 그러자 안내양은 어떤 아가씨를 소개해 준다. 이 아가씨도 여기서 내리는 모
양. 버스는 카오산의 코앞에 서지 않으므로 길 가르쳐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버스에서 내리자 이 아가씨는 유창한 영어로 내게 길을 안내해 줬다. 설명을 듣고 있으려니
이 분에 대한 고마움도 고마움이지만, 승객을 배려해 준 안내양에 대한 고마움이 더욱 따뜻
하게 느껴졌다.
- 뚝뚝에서 -
오늘 오전에 푸카오텅에서 비만맥궁전을 가기 위해 뚝뚝을 잡을 때였다. 문제는 차비를 얼
마나 줘야하는지를 모르는 것. 무턱대고 잡아타다간 바가지를 쓰거나 아님 이상한 곳에 끌
려가서 협박을 당해야 하는데... (협박=시내관광을 10바트에 시켜주겠다는 기사도 있는데, 이
런 것 타면 어딘가로 끌려가서 싸구려 보석을 비싼 값에 사도록 강요당한다) 결국 머리를
쓴 것은 태국 현지인에게 물어봐서 먼저 대략의 차비를 알아내는 것. 신호등 앞에서 만만한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니 깨끗한 옷차림의 남자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태국분이세요?"
"예"
"제가 비만맥궁전을 가고 싶은데, 뚝뚝타면 차비는 얼마를 줘야 하나요? 대충이라도 가르쳐
주세요"
"대충..."
잠깐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아예 길거리에 나와서 뚝뚝을 잡아준다. 그리고 기사에게 요금
을 물어봐주네? 70바트. 여행자가이드에는 60바트로 나와 있어서 내가 깎자고 우기니 또다
시 기사와 대화... 결국 깎진 못하고(내가 있는 위치에서 나면 U턴을 해야 하니 60바트에 가
려면 길을 건너야 한다고 해서) 그냥 탔지만 참 친절한 아저씨였다. 그리고 사실은 이 아저
씨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웃는 얼굴.. 적극적인 친절... 비만
맥궁전에서 아마리워터게이트호텔로 갈 때도 경찰아저씨가 뚝뚝을 잡아 요금까지 매겨줬고,
어제 야왈랏거리에서 만난 아저씨도 그랬다.
- 돌아오기 -
저녁 8시가 되자 우리는 카오산에서 공항버스를 탔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쉬
움이 남는 밤... 아내는 이곳에 온 이튿날부터 집에 가고싶단 소리를 입에 달고 다녔지만, 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그저 한숨만 나온다.
공항에 도착하니 9시 무렵.. 11시50분 비행기이니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는데, 오히려 이게
문제였다. 할 일이 없어서 공항바닥에 앉아 밍기적거렸는데 어이가 없게도 그러다가 체크인
시간을 놓친 것. 사실 체크인인야 아무 때나 해도 되는데, 일이 안 되려고 그랬는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광판에 우리가 타야할 비행기가 나타나면 체크인 하는 시간이지? 아
무 때나 막 하는 게 아니라...' 사실 일이 이렇게 된 근본이유는 언어소통의 문제가 컸다. 되
지도 않는 영어를 하기가 귀찮아져서 그냥 있었던 것.
결국 그렇게 시간만 죽이다가 11시20분에서야 체크인. 공항직원은 놀란 얼굴을 하더니 태국
말로 계속 뭐라 떠들어댄다. 일단 화물로 부치려던 가방이 되돌아왔다. 비행기 짐칸을 닫은
모양. 이어서 직원은 "Hurry up"을 외치며 앞에서 뛰었고, 우리 부부는 모든 짐을 양손에
들고 달리기를 시작. 이 무슨 팔자에 없는 생고생인가...하는 생각을 하며 뛰는데, 삶이 고단
하다. 결국 직원의 에스코트까지 받으며 출국심사대에 입장했는데, 이럴수가... 바빠 죽겠는
데, 줄은 왜 그리 길게 늘어서 있는지... 특히 이 때는 휴가철이라 비행기를 놓치는 날이면
다음 좌석을 기약할 수 없는 성수기인데... 줄 끝에 서서 발만 동동 구르니 애간장이 녹는다.
우리 부부의 이런 딱한 모습을 지켜보던 어떤 우리 나라 아줌마 왈.
"그렇게 바쁘면 양해를 구하고 앞으로 가서 서요"
아하!! 우리는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을까.. 이 아줌마의 말을 듣고 신이 난 우리는 가방을
들고 뛰어가서 맨 앞으로 갔다. 새치기를 하겠다 이거였지. 뒷사람에게 "I'm sorry"하고 공
항직원 앞에 섰는데...
"당장 뒤로 가!!"
태국사람이라고 해서 언제나 친절한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게 예쁜 입으로도) 소리를
빽! 지르는데... 창피한 것보다는 그 단호함에 주눅이 들었다. 그 모습에서는 내가 한 새치기
를 '절대 해서는 안될 일'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 결국 우리 부부는 완전히 쫄아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안절부절...
이때는 주위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한 아저씨가 우리를 안심시킨다.
"여기 들어오면 비행기는 절대 안 떠요. 탈 때까지 기다리니까 걱정마세요"
다른 아저씨 왈 "몇 시 비행기요?"
(풀죽은 목소리로) "11시50분요..."
또 다른 아저씨 왈 "그럼 아직 많이 남았네 뭐... 10분전에 공항에 오는 사람도 있는데"
(속으로) "하하하!!"
남들은 어글리코리안 어쩌고 해도 난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이런 여유(?)가 참 좋다. 갑자기
마음이 턱 놓이며 기분까지 유쾌해졌다. 비행기로 이동하는 셔틀버스 안에서 이미 11시50분
을 넘고 있었는데, 모두가 한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이건만 아무도 걱정하는 이가 없다. 오히
려 골프치는 얘기로 버스가 떠나갈 듯...
사족:
1) 내가 '회'에 대해 몰라서 그랬는데, 나중에 선생님들한테 얘기해 보니 여기도 그렇게 큰
가재를 판다고 한다. 문제는 돈! 뭐 어디가면 있긴 한데 값이 25만원? 그 말이 맞는지는 모
르겠으나, 3만원 갖고는 광어 1킬로 먹기도 힘들다고...
2) 이 여행기의 제목을 [싸왓디 무앙타이]로 정한 것은 내가 본 태국인들에 대한 사랑과 감
사의 의미이다. 태국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자유의 나라'라는 의미로 '무앙타이'라 부른다
고... '싸왓디'는 우리의 '안녕하세요'에 해당하는 그들의 인사말
3) 나무 한그루를 보고 숲을 논하는 것이겠으나, 태국을 한번 다녀온 사람들은 결국 이 나
라와 사람들을 좋아하게 될 것이란 생각을 했다. 친절과 미소의 나라...
4) 태국사람들은 방콕을 천사의 도시란 뜻으로 [끄룽 텝]이라 부른다.
5) 오늘의 사진은 비만맥 궁전의 모습
6) 저는 이렇게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 여러모로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제 글을 읽어 주신 친
구제위, 제자들, 그리고 인터넷 사이트 [태사랑]의 여러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제 글을
읽고 좋은 말씀 주신 분들, 또 충고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7) 처음 계획보다 엄청 길어진 여행기를 여기서 마칩니다. 컵쿤 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