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남자의 인도 표류기 프롤로그. 그야말로 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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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남자의 인도 표류기 프롤로그. 그야말로 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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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7년 갑오해 정월 초닷새 오시 경 태국 북부,

 

 

칠흑의 삼단 같은 머리카락을 촘촘한 빗살로 다스려 단단히 쪽찌게 하고 허리춤이 움푹 패여 선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다 앙가슴을 가득 열어 절로 눈길을 부르는 화문 색색의 상의, 삼베에 날염을 가미해 꽃문양을 새긴 기다란 치마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가죽 꽃신을 신고서 내딛는 걸음걸음 꽃으로 휘날리며 청명한 햇살과 함께 뭇사람들의 시선을 마주 안은 가운데 읍내 나들이에 임하여 두루 돌아다니다 목 좋은 술집에 앉아 잔을 받잡고서 고고히 낮술을 들이켜고 있자니 예의 그렇듯 여기저기서 틀림없는 입질이 왔다.

 

 

헤이, ! 서스피셔스 진!”

 

 

명은 진(Jin)이요 성은 서스피셔스(Suspicious 수상한), 하여 서스피셔스 진, 이라 이름을 쓰는 동양의 여행자. 신 개념인지 무 개념인지 개체별로 이름이 주어지기 시작한 이후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 작명법을 과감하게 버린 그는 이름만큼이나 행색 또한 심히 기이하고 가히 괴상하며 실로 기괴하여 때에 따라선 삼가 송구할 지경이니 자고로 희한한 것들은 쉽사리 각인되게 마련, 욕망이난망(欲忘而難忘)이라 제아무리 떨쳐내고자 해도 차마 못 잊어 절로 기억되고 즐겨 불리는 수상한 작자. 참고로 그는 나고 나는 남자다. 그것도 서른이 훌쩍 넘은 아저씨다. 게다가 술에 환장하는 날건달이며 여성에겐 한없이 다정하지만 남성에겐 시종 까칠하고 종종 난폭하기까지 한 그런 일반적인 XY염색체이다. 다만 하고 다니는 꼬락서니가 외람될 정도로 심란할 뿐.

 

 

세계 배낭여행자들의 요새이자 아시아 여행의 베이스캠프 타이(Thailand). 남부 방콕에 이어 두 번째 가는 대도시이며 북부에 위치한 치앙마이에서 대략 세 시간 거리에 있는 산골마을 빠이(Pai). 태생배경과 성장과정과 현재상황이 여타 여행지와는 가파른 차별성을 보여 혹자는 예술가의 마을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여행자의 마을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히피의 마을이라고도 하는 인구 삼천의 소읍에 똬리를 틀어 세계각국에서 몰려든 새하얀 피부, 짙푸른 눈동자, 샛노란 머리카락을 지닌 청순하고 청초한가 하면 요염하고 도발적인 생명체들을 넘어 가지각색의 떨거지들과 함께 늴리리야 늴리리 해대며 몹시 낭만적으로, 때론 퇴폐적으로 놀아 재끼자니 씨익, 깊게 파이는 웃음. 제 가진 전부를 걸고 떠나와 버린 여행자, 그 달라진 존재와 존재의 방식에서 거부할 수 없는 행복이 왔다. 이제는 정녕 길바닥 위의 인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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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 다르고 말이 다른 곳에서 색이 다르고 말이 다른 예쁜이들과 술을 마시는 것, 나는 그것보다 우선하는 생의 재미를 알지 못해. 그것이 내가 반드시 살아남아야 했던 이유이고 전부를 팔아치우고 떠나와야 했던 까닭이야. 그래서 난 지금 네게 감사해.

 

마시자! 아름다운 아가씨 줄리아.”

 

 

아름다움이 위대한 궁극적 원인은 상대로 하여금 아이덴티티를 고민하게 하여 여하한 식으로든 결과를 도출해내기 때문. 사고와 인식의 해체와 재조립, 이른바 존재전이. 마른 날의 벼락처럼 전혀 예상할 수 없던 시점에 들이닥친 한순간, 불가항력의 마력으로 전 존재를 단숨에 사로잡아버린 방랑이라는 형질의 카타르시스. 서른을 훌쩍 넘겨서야 처음 만났던 그 터질 듯한 희열은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니 난 그동안 뭐했지? 이 나이 처먹도록? 각성은 일순간에 왔다. 안타깝게도 고통과 함께.

 

 

언감생심 마님을 품은 돌쇠에게 언제까지 쌀밥이 주어지랴! 결국 몰매로 귀결되기 십상이듯 처지에 어울리지 않는 욕망이란 곧 비극의 이음동의어일 터, 연필로 치면 몽당연필이요, 담배로 치면 꽁초담배요, 식빵으로 치면 짜투리식빵 같은 초라하고 남루한 청춘. 어디 기댈 데 없나, 누울 자리 없나? 사방팔방 안만 둘러보아도 전후좌우, 전 방위적으로다가 꽉 막힌 참으로 답도 없는 인생. 에라, 모르겠다! 남자는 한방 아니더냐 하여 야심차게 뻗은 스트레이트는 그만 제 역할을 망각하고 부메랑으로 변신하여 다름 아닌 자신의 턱주가리에 적중하고 말았으니 역전에 빛나는 대박을 꿈꾸었으나 광박 피박 독박의 3단콤보로 일궈낸 야무진 쪽박. 역전의 한방은 개뿔, 한방에 골로 가게 생겼다야!

 

 

도락인줄 알고 들어간 문은 나락으로 안내하고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자의 발악과도 같은 용기는 누구 못잖게 백배했으나 세상이 어디 용기만으로 된다디? 누군 뭐 간이 작고 깡이 없어서 그 모양 그 따위로 산다디? 어쩌다 곰을 잡아다 꼭 쓸개 없는 곰만 잡는 지지리 복도 없는 팔자. 좆도 모르면 국으로 가마니나 쓰고 있을 일이지 뾰족한 수랍시고 노렸다가 무리수를 거쳐 자충수로 결착되는 악화일로의 나날들. 그래, 어차피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전 생애를 담보로 한순간이나마 낙원을 살아가자 하여도 이건 뭐, 가진 게 있어야지. 설상가상이라더니 가진 게 없으면 빚이라도 없어야지. 이래서 룸살롱 아가씨들이 룸살롱을 못 떠나는구나, 가슴 깊이 이해될 밖에.

 

 

트리클 다운이라든가 뭐라든가, 발음도 어쩐지 개떡 같은 개발독재의 국가적 지랄에 치솟는 물가를 감당할 길 없어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우리의 누이, 열여덟 순이가 식순이 공순이 빠순이의 3대 직종을 전전했던 60년대 시절부터 밀레니엄을 훌쩍 넘겨 오늘에 이르기까지 못 가진 자들과 못 배운 이들에게만 더욱 가혹하게 돌아가는 세상의 냉혹한 이치. 권선징악이라고 착하게 살아가라 배웠으나 이거야 원, 나쁜 놈들이 되레 떵떵거리고 사니 이론 따로 실제 따로 뭐 이런, 거지같은 따로국밥이!

 

 

울고불고 땡깡 놓는다고 카드할부만 남겨놓은 채 홀연히 떠나버린 옛사랑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다 대가리도 굵어질 만큼 굵어졌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도 느낄 만큼 느꼈으니 이제는 선택의 순간. 똑바로 걸어가기 위해 포기와 체념을 끌어안을 것인가, 자꾸만 삐딱해지는 심신에 오기와 배짱을 장착할 것인가! 양자택일, 그 갈등의 기로에서 떠올린 것은 남들 손자손녀 재롱에 함박웃음 짓고 있을 때 장가 못간 자식 놈에게 등골 빨리고 있는 시골의 노모가 아니라 쥐뿔 없이 살아온 주제에도 수그러들 줄 모르는 사나이 가오! 결국 끝장을 보자, 이거야!

 

 

욕망이란 비극의 열쇠인 동시에 생을 추동하는 가장 큰 에너지였으니 참 나, 오래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다고 내가 이럴 줄 나도 몰랐네. 골통만 크지 재주는 매주인 자들에겐 그저 이빨 딱 앙다물어 참고 견디고 버티고, 도합 3고만이 고민하고 자시고할 것도 없는 억울하고도 분통한 해답. 조삼모사를 탄생시킨 원숭이들처럼 근시안적 기쁨을 생의 원칙으로 살아가던 칠푼이 팔푼이에게서 그런 인내력과 지구력이 어떻게 비롯되었을까? 아마도 모르면 몰랐지 알고도 당할 만큼 반푼이는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터, 바라면 바랄수록 치고 나가는 힘은 비례하였다. 맥없이 사라져버린 주검의 날들을 찢고 나와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고통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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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고 했다. 찢어 죽이고 말려 죽인다 해도 시간은 흐르는 법, 뱃속의 아이에게도 출생월일이 있고 이등병 군바리에게도 제대날짜가 있으며 감방의 죄수들에게도 출소일자가 있듯이 내게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도착하는 종착역이 있었다. 이제 비행기로 갈아타야할 타이밍, 세상으로 향하는 티켓을 거머쥐고서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는 각오로 가진 것 전부를 처분해버렸다. 브라보, 멋지다야! 다만 집도 절도 없는 내게 팔아서 돈이 될 유일한 물건인 자동차가 그만 서른두 건의 압류에 묶여 자신의 재정적 가치를 훨씬 상회하는 벌금을 토해내야 했던 것이 패착이라면 패착이었다. 시간이 조금만 있었다면 어떻게 수를 썼을 텐데…… 그게 좀 아쉽네, .

 

 

허리춤을 넘나드는 기다란 머리카락과 꽃으로 도배한 옷차림 플러스, 1920년대 프랑스적인 필이 느껴지는 꽃무늬 캐리어에 대금을 꽃아 넣은 것으로 모자라 새카만 수트와 색색의 코트로 무장한 채, 주색잡기의 달인이자 퇴폐와 낭만의 화신으로 거듭나기 위해 전 존재를 담보로 예정할 수 없는 길에 오른 남한의 어느 날건달로 하여금 나머지 생을 투신하고 싶게 만들었던 매혹적인 소읍, 빠이.

 

 

(다시 말하지만) 태생배경과 성장과정과 현재상황이 여타 여행지와는 가파른 차별성을 보여 혹자는 예술가의 마을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여행자의 마을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히피의 마을이라고도 하기에 시뻘건 색 명함에 새겨진 이름 Suspicious Jin, (다시 말해 미안하지만) 이름만큼이나 행색 또한 심히 기이하고 가히 괴상하며 실로 기괴하여 때에 따라선 삼가 송구해질 지경인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라고 제멋대로 결정지어버린 마을, 빠이에서 보내는 시간. Daytime drinking is Daytime dreaming이라며 낮술을 부추기는 나와 함께 흔쾌히 잔을 부딪치는 스페인계 혼혈 아가씨 줄리아는 오목조목 예쁘게도 생긴 입으로 살포시 물었다. 이따 산에서 하는 파티에 갈 거냐고.

 

 

다소곳이 저무는 노을 녘을 따라 의미를 알 수 없는 레터링과 인어 한마리가 자수로 새겨진 새하얀 드레스 셔츠에 글렌체크(Glen Check) 패턴의 니트(Knit) 보타이를 동여매고 바짓가랑이의 너비가 살벌하게 넓어 무려 반세기 전, 러브 이즈 터치요 터치 이즈 러브라 설파하셨던 존 레논 형님께서 입고 다녔을 법한 클래식 팬츠와 함께 전신의 날을 바짝 세우듯 어깨를 잡아끌고 허리를 끌어당기며 딱 달라붙는 붉은색 레오파드 재킷과 더불어 천연가죽에다 천 조각을 가미해 풍취를 높인 윙팁 구두로 무장. 오늘 좋은 일 있으시나 봐요? 추측되는 복장으로 도착한 산중의 히피 축제. 초입으로 마중 나온 경쾌한 음악 소리에 피식, 담배 하나 힘차게 빨아올리며 자아, 선수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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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른 공터 곳곳에 모닥불 타오르고 기타 속주 흘러내리는 가운데 헤이, ! 미욱한 이름 기꺼이 불러주시는 각색의 여인네들과 별나도 친한 척해대는 일단의 놈팡이들. 마치 일생을 그렇게 살아왔다는 듯 하이 허니, 가볍게 대꾸하고 자연스레 끌어안으며 거푸 잔을 들이켜고 있자 기타의 퇴장과 함께 불을 매단 포이(poi)가 사정없이 돌아가기 시작하고, 신비스런 음색을 지닌 디지(didge)가 울려 퍼지고, 솥단지를 닮은 행 드럼(hang drum)이 짝을 이루고, 지구 곳곳에서 놀러 나온 히피들은 어쩐지 주술적이고 어딘가 나사 풀린 춤을 춰대고…… 새하얀 피부, 짙푸른 눈동자, 샛노란 머리카락을 지닌 청순하고 청초한가 하면 요염하고 도발적인 언니야들께선 남한에서 온 수상한 날건달을 또 아껴주시고……

 

 

아아, 그야말로 화양연화!

 

 

쫒고 쫒기는 속도전, 치고받는 공방전, 속고 속이는 복마전의 세상 속에 알코올만 없다 뿐이지 술맛은 똑같다던 맥주처럼, 사진만 안 찍힌다 뿐이지 다른 건 멀쩡하다던 카메라처럼 뭔지 알 수 없지만 결정적 무언가가 빠져있던 공허한 삶은 이제 없다. 십수 년, 일을 쉬지 않았건만 정식 취업을 한 적 없으니 실업수당 같은 게 있을 리 없고 무보증금의 코딱지만 한 월세방도, 기름을 토하며 곧 쓰러질 것처럼 쿨럭대던 낡은 자동차도 이제는 없지만 그 시시한 가드라인으로는 결코 대체될 수 없는 삶이 여기 있다. 생애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한 시절, 짧기에 더욱 강렬하고 끝이 있기에 더더욱 아름다운 청춘의 나날들이.

 

 

몽환인 듯 흔들리는 시침에 기대어 슬며시 눈을 감고 뜻 모를 음악에 맞춰 팔다리를 유유히 너풀거리자면 의식의 흐름은 가파른 상승기류를 타고 멀리 날았다가 허공을 되짚어 자유 낙하하며 이내 쏟아져 내리기를 반복한다. 사유의 손길은 지나간 회한을 어루만지고 지나온 시간의 자취는 기억과 추억 사이 어느 골짜기를 부유하다 정해진 약속인 양 짙은 그리움에 휩쓸려 그곳으로 찾아든다.

 

 

그곳, 십대 소년의 꽃다운 순정을 다 바쳐 사랑했던 그녀처럼, 어린 내게서 흔쾌히 동정을 앗아간 그 연상의 여인처럼 변할 수 없는 낙인으로 새겨진 최초의 이름, 인도(India). 꿈은 침대에서만 꾸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변환을 심어준 파종의 대지이자 돌연한 문제재기와 함께 생의 방향전환을 유도해 버린 지진의 진앙이며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고 상식의 지평을 헤까닥 뒤집어버린 반전의 대서사시, 인크레더블 인디아.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또 안 되는 것도 없는 희한한 동네. 돈을 버리든지 성질을 버리든지 뭐 하나는 버려야 속이 편해지는 나라. 친구 하자는 건지 한판 붙자는 건지 가름하기 애매한 세상, 그 역동적인 카오스를 떠올린다.

 

 

황홀하게 추락하는 핏빛 석양들, 분주한 사람들의 왁자한 소음들, 무공해 아이들의 순도 높은 웃음들, 뭐라 형언하기 힘든 특유의 냄새들, 다채롭고 강렬한 원색들, 기존의 통념을 과감하게 버린 괘심한 음식들, 그놈의 속 터지는 No ProblemThis is India, 한 가지 물음이 도출하는 열 가지 대답들. 도대체 기약이 없는 각종 시간표들…… 그리고 그녀들. 그 처음 만난 자유, 그 환희의 순간들을.

 

 

어떠한 세월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거슬러 올라야할 생의 분명한 지점으로 남은 인도, 다시 그곳으로 간다.

 

내 이야기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곳으로.

 

2 Comments
삼천포 2015.07.02 15:10  
꼬락서니가 외람될 정도로 심란하지 않은데요ㅎㅎ 류승범 같아요,개성 있고..
여행기 시작이 정말 멋집니다. 원래 글쓰는 일 하셨나요?
다동 2015.07.02 16:52  
저도 올리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스스로의 사진을 거의 안 찍어 글에 합당한 사진이 마땅찮은 게 사실이에요.
오랜 기간 나무 깎는 공예가로 살다가 근자에 잡문을 끼적인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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