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 말레샤, 인도네샤 여행기-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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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말레샤, 인도네샤 여행기-9

필리핀 1 829
12월 27일 맑음
새벽 5시, 모스크에서 들려오는 확성기 소리에 잠을 깼다. 내가 여장을 푼 자키아 호텔은 메단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모스크 바로 뒤에 있다. 모스크에서는 새벽 5시가 되면 어김없이 코란을 외는 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새로운 하루가 또 시작되었다.
침대에서 뒤척이다 밖으로 나왔다. 누군가 몰래 지켜보고 있다가 살짝 내보이는 듯, 동쪽 하늘 저 멀리서 희미하게 날이 밝아오고 있다. 숙소 3층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모스크 뒤편으로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수십 개의 비석이 모스크 뒤뜰을 메우고 있다.
밖으로 나가 거리를 거닐어 본다. 수많은 차들이 이른 아침부터 도로를 질주하고 있다. 열대의 하루는 일찍 시작된다. 그리고 일찍 끝난다.
모스크 맞은편에 커다란 백화점이 있다. 메단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제 저녁에 잠시 거리 구경을 해보니 거지들이 꽤 많았다. 거리에서는 한 끼를 구걸하는 사람들이 널려 있는데, 백화점에는 사치품들이 쌓여 있다. 대체 그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빈부의 차이 정도를 상상할 수가 없다.
숙소로 돌아와 또바 호수 가는 여행자 버스표를 끊는다. 45,000루피아. 어제 숙소 주인과 다른 투숙객에게 확인해 보니 부낏 라왕이 홍수로 폐쇄되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부낏 라왕은 포기하고 브라스따기를 먼저 갈까 또바 호수를 먼저 갈까 저울질하다 또바 호수로 먼저 가기로 했다. 브라스따기는 메단에서 2시간 거리이므로 나중에 말레이시아로 갈 때 브라스따기에서 첫차를 타고 오면 메단에서 1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또바 호수는 4시간 거리여서 첫차를 타고 와도 당일에 말레이시아로 나갈 수 없다.
표를 사면서 물어보니 정원 9명(운전사 포함)의 미니버스라고 한다. 그러나 잠시 후 나와 크리스티를 태우러 온 미니버스에는 이미 10여 명의 사람이 타고 있다. 원래 3인용 좌석 3줄이 있는 밴인데 좌석 1줄을 더 만들어서 12명까지 타게 개조했다. 따라서 좌석의 앞뒤 간격이 무지 좁았다.
그러나 악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숙소를 출발한 버스는 다시 웬 정류장에 정차하여 사람을 더 태웠다. 그리고 다음 정류장에서 몇 명 더 태우더니 마침내 승객은 무려 18명으로 늘어났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현지인의 두 배에 가까운 여행자 요금을 내고도 이렇게 짐짝처럼 구겨져 가야 하다니. 승객은 나와 크리스티를 빼고는 모두 현지인이다. 이것은 여행자 버스가 아니라 일반 버스임이 분명하다. 아마 또바 호수로 가는 여행자가 없어서 여행자 버스는 취소된 모양이다.
체구가 작은 인도네시아 인들도 9명 정원의 버스에 18명이나 태우니 갑갑해서 죽으려고 하는데 그들보다 목 하나는 더 큰 나와 크리스티는 어떻겠는가. 천정이 낮아서 목을 똑바로 펼 수가 없다. 이 상태로 장장 4시간을 가야 한다니 눈앞이 아득했다.
또바 호수로 가는 길은 왕복 2차선이다. 주말이어서 상당히 많은 차들이 도로를 오가고 있다. 그런데 이 미니버스는 중앙선 침범을 수시로 감행하며 쉴 새 없이 추월을 감행한다. 이러다가 사고라도 만나면 몰살이다.
하지만 승객들은 태평무사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담배만 연신 피워 대고 있다. 인도네시아 인들의 흡연 열기는 정말 대단하다. 인생의 유일한 낙이 흡연인 것 같다. 한 사람이 담배를 피우면 전염이라도 된 듯 주위 사람들이 일제히 담배를 피운다. 잠시 후 또 다른 사람이 담배를 피우면 조금 전에 피웠던 사람들이 다시 일제히 담배를 피운다. 이제 열서너 살밖에 안 되어 보이는 꼬마가 담배를 피우는 데도 아무런 제지가 없다. ‘담배가 당신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습니다.’는 이곳에서 전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한참동안 굽이굽이 산길을 휘돌아 가더니 눈앞에 한없이 펼쳐진 호수가 나타난다. 드디어 파라팟에 도착한 것이다. 파라팟은 또바 호수 중앙에 있는 사모시르 섬으로 가는 배를 타는 곳이다.
또바 호수는 수마트라에서 가장 경관이 좋은 휴양지다. 해발 800미터여서 낮에는 시원하고 밤에는 서늘한 편이다. 인도네시아라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경관과 기후 때문에 장기 체류자가 많은 곳이다.
또바 호수는 10만 년 전 폭발했던 거대한 화산 칼데라에 물이 고여 형성되었다. 동남아에서 가장 넓은 호수로 깊은 곳은 무려 450미터나 된다.
호수의 중앙에는 싱가폴 크기 만한 사모시르 섬이 있다. 사모시르 섬 동쪽에 혹처럼 툭 튀어나온 뚝뚝이라는 곳에 배낭여행자촌이 형성되어 있다. 파라팟에서 출발한 배는 맨 먼저 뚝뚝을 거친다. 배는 1시간마다 1대씩 있고 편도 요금이 4,000루피아.
뚝뚝의 숙소들은 대부분 소뿔 모양의 전통 바딱식 지붕을 하고 있다. 주변 경관과 숙소가 잘 어우러져서 무척 아름답다. 숙소마다 조그만 선착장이 있어서 승객이 원하는 숙소에 배가 선다. 
1순위로 생각했던 숙소 렉존에 가니 방이 있긴 한데 예상보다 비쌌다. 핫 샤워 룸은 30,000루피아이고 콜드 샤워 룸은 15,000루피아다. 가이드북은 핫 샤워를 선택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금액 차이가 너무 크다. 다른 숙소를 알아보니 더 비싸다. 위치와 가격을 고려했을 때 렉존이 최선인 것 같다.
잠시 고민 끝에 일단 콜드 샤워 룸에 묵기로 한다. 하룻밤 자보고 견딜 수 없으면 핫 샤워 룸으로 옮기지 뭐.
렉존의 모든 숙소는 호수를 향해 있다. 2층 방으로 올라가자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통유리 너머의 경관은 100만불짜리다. 바다처럼 장대한 호수와 그 호수의 끝 간 데를 막아선 산들, 그리고 그 위로 둥둥 떠가는 구름떼. 마치 알프스의 한 자락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광경이다. 호수가 바로 발아래 있어서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다. 게다가 영혼의 은밀한 부분을 어루만지듯 들려오는 은은한 물결 소리! 지난 며칠간의 피로가 그 물결에 남김없이 씻겨가는 듯 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숙소에 딸린 식당에 가니 명랑하게 생긴 여자애가 반갑게 맞아준다. 이름은 마리아, 주인 딸이란다. 지난 10월에 메단에 있는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쉬면서 부모님 일을 도와주고 있단다. 내년에는 직장을 구해 이곳을 떠날 예정이라고 한다. 가능하면 먼 곳으로 가고 싶단다. 여행자들에겐 최고의 여행지인 이곳도 그녀에게는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촌구석에 지나지 않는 모양이다.
밤에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니 달빛을 머금은 물결이 고고하게 뒤척이고 있다. 10만 년 전부터 늘 같은 모습으로 뒤척여 왔을 또바 호. 시간이 수없이 흘러가고 수많은 변화의 나날이 거쳐 가도 항상 변함없는 모습으로 남아 있을 또바 호.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온 몸이 이대로 화석이 되어 저 깊은 호수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1 Comments
할리 2012.05.23 12:48  
또바호수의 풍광이 머리속에 그려집니다.  꼭 가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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