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벙이 부부 태국+캄보디아 가다 (첫날)
시작하며
'인생의 바람은 너무나 거칠고 멋대로 라서 어디에 가 닿을지 알 수 없다. 나는 어느 세상에 편안하게 닻을 내릴 수 있을까?'
인천공항을 나오자 바람의 향이 틀렸다.
30℃ 뜨거운 한 여름에서 겨울로 역주행하는 듯한 타임머신을 타고 현실로 돌아온 이질감이었다. 대전으로 향하는 공항버스의 차창으로는 뽀얀 벚꽃의 봉오리가 앙증스럽다.
마치 긴 전장의 터널을 헤치고 나온 병사의 귀환처럼 바로 어제까지의 그 뜨거운 정열의 더위는 차장의 유리 한 겹 사이로 멀어져 갔다.
막 겨울의 허물을 벗는 산과 들에 군더더기 같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일상의 파편들이, 밀렸던 여독의 피로를 몰고 온다.
점점 작아진 내 아집은 아득한 천년역사의 창살로 신기루가 되어 기억속에 흘러 들어 갔다.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1일)
3/28(일). 03:30
마음의 감옥은 아니였을까.
생각의 빈 용기에 삶의 무게가 체증으로 쌓이면 어느 정도까지 일까.
시간의 점들로 이루어진 그것들의 무게가 물방울처럼 모이고 깨지는 자연현상이 반복되는 과정이라면 감옥의 창살은 내가 그어 놓은 가슴의 상처일 뿐인 것을.
그 상처를 핑계로 일탈을 꿈꾸어 왔던 첫 발 걸음을 새벽 3:30분 기상으로 시작했다.
새벽 찬공기에 구멍이 숭숭 뚫린 스포츠 샌달을 신고 나서는 모습이 아무리 보아도 어색하다.
정확한 일정도 없이 미지로 향한다. 두 사람을 작은 배낭 하나가 열흘간의 유예기간을 잘 버티게 해 줄 것인지 사뭇 두려운 마음이다.
정작 배낭을 메고 떠날 사람은 대학생 아들놈이건만 녀석은 배웅을 하고있다. 바람난 늙다리 부부가 배낭을 들쳐 멘 모습은 새벽 어둠이 있었기에 위안이 되었다.
7명만을 태운 큰 덩치의 공항버스는 내내 새벽기운을 가르며 줄 곳 달려 6:55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너무 일찍 서두른 탓에, 우리를 맞이할 타이항공 카운터는 이후로도 한 시간을 수면 중 이었다. 커피와 빵으로 요기를 면해본다.
짬을 이용해 돈무앙 공항에서 첫 체류지 카오산 위앙타이 호텔까지의 대중교통 수단 이용요령을 익힐려고 짐을 뒤졌다.
최신정보라고 프린트 해 넣어둔 책자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뒤져도 없다.
우리의 무작정 “꺼벙호”는 출발부터 풍랑이 심창치 않다.
국내에서 공항 정도야.
주머니칼 하나 들었다고 겁먹고 조그만 배낭을 화물로 부쳤다. 신발까지 벗는 보안검색을 받았다. 세금 잘 내고, 병영의무 예전에 마쳤고, 죄 지은 것 없는 대한민국의 건전한 국민이건만 위압적인 출국 심사대에서는 부동자세로 섰다.
10:15분, TG 659는 빠른 고속음과 함께 순간 현기증을 일으키며 하늘로 튀어 올랐다. 옆 좌석의 우람한 스모선수(?)의 몸무게 때문인지 더 힘들게 이륙하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스모선수는 빈 좌석으로 옮겨 갔다.
한결 넓게 느껴지는 이코노미 좌석의 공간도 마음에서 오는 여유 때문이리라. 눈을 감았다. 머릿속은 더욱 선명하게 누선(淚腺)을 자극해 온다.
항공기 기내식은 태국식 이었다.
유예기간 중 절반이상은 그 나라 음식을 접해 보기로 다짐한 덕분인지 제법 먹을 만 했다. 그러나 동행한 땅콩 아지매는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찌는 더위를 반드시 극복해야하고, 음식은 절대다수 해당국의 전통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여행수칙 제 1조를 지켜줄지 우려되는 순간이다.
명료해지는 머릿속을 흐려 볼려고 서투른 와인을 한 잔 적신 후에야 잠시 눈을 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한 잔의 와인과 한 움큼의 잠 뒤에는 예기치 않은 두통으로 국적불명의 두통약까지 동원된 내심의 소란이 더 컷다.
아마도 여행 전 풀코스 달음질, 한 주일의 교육, 바쁜 일정 준비로 긴장한 탓 인듯하다.
노안으로 느려진 안구 조절 능력을 조율해 가며, 가이드 책자를 기초로 입국신고서를 작성했다.
현지시각 1: 20분, 항공기가 땅에 발을 내리자 나직하게 도열한 푸른 열대 야자수들이 반겨준다. 활주로 옆 골프장에는 골퍼들과 가방을 멘 나낙네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기내를 나오자 “훅”하는 열기가 몸을 휘감았다. 어느샌지 같은 기내에서 내린 젊은 아낙들은 어깨 끈만 달랑 붙은 속곳 차림이 여럿 보였다.
입국장으로 향하는 공항내 버스에는 뜨거운 열기가 질질 끌려온다.
대충 눈치로 많은 사람들이 가는 줄을 따라 갔다. 입국장, 그래도 대한민국 출국 심사대에 선 느낌 보다는 한결 여유가 있다. 우리는 이 나라의 관광 수입원으로 왔으니까.
한 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 삐닥하게 서서 입국 스탬프를 찍는 직원을 보니 까만 피부에 인자하게 보이는 여성 이었다.
뒤를 보니 땅콩 아즈매는 키 보다 큰 입국 심사대 아래서 부동자세로 서 있다.
배는 앞으로 10cm는 내민 채로.
“여보세요 몸 좀 푸세요”
이제, 꺼벙이 일행의 본격적인 고지적응 훈련이다.
“baggage~ ” 어쩌구 하는데 가서 배낭을 찾았다. 화장실에 들려 은근한 뱃고래의 두려움과 노폐물을 시원하게 분출하고, 반팔 상의로 갈아 입었다.
도상훈련대로 3층으로 올라가 다시 문을 열고 나가니 택시들이 도착하는 곳이다.
밤송이 머리를 한 수수한 인상의 기사가 막 도착한 승객의 짐을 내리고 있다.
이런 인상의 택시면 됐다 싶었다.
“따논 카오산?”
“....” 밤송이의 동공이 커졌다.
‘음, 나보다 더 꺼벙하네. 자기나라 말도 못 알아 듣고.’ 그럼 다른 말로 해야지.
“방람푸,.. 까오산,.. 방람푸... ”
그제서야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동시에 눈이 작아지며, “빠~나 푸우”로 통했다.
다시 신속하게 "How much?"
밤송이는 내말이 끝나기도 전에 택시안의 디지털 메타를 가르켰다.
웬 떡인가. 출발 후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웅얼거리는데 대충 고속도로 가자는 내용 같았다.
“오우케이”. 두 번의 요금소에서 30b+40b의 요금을 지불했다. 공연히 실언했나?
밤송이는 내내 백미러로 뒤를 힐긋거리며 특유의 웃음을 지어보였다.
목적지 까지 통행료, 미터요금, 포함 합이 250b.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다.
밤송이는 손으로 먼 곳을 가르키며 호텔이라고 했다. 차에서 내려 아무리 훝어봐도 HOTEL 글자는 아니보였다. 첫 날, 더위에 차츰 적응하기 위해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한 V호텔은 없었다.
더위는 어느새 이방인들의 머릿속과 몸속을 마구 휘 젖고 있었다.
특유의 진한 향이 더위에 녹아 피어 오르는 김이 되어 콧속을 어지럽힌다. 반 벗은 사람들이 즐비한 좁은 골목(나중에 알고 보니 ‘왓타나 쏭그람’ 뒷 골목 이었음)을 빙빙 돌아 호텔로 향했다.
땅콩아짐은 맨 몸에도 연실 얼굴을 훔쳐 낸다.
나중에 알았지만 밤송이는 말을 못 알아 들었는지 우리를 엉뚱한 방향에 내려주었던 것이다.
못 찾을 일은 없다. 다만 얼마나 빨리 적응 하는냐가 관건이다.
의외로 한국인들은 만날 수가 없었다.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젊은이들, 다른 피부색을 띤 사람들뿐이었다.
V호텔 체크인, 오후 4시가 다 되었다. 시원한 트윈룸에 짐을 놓자마자 땅콩아짐은 샤워를 해댔다.
왕궁은 관람 시간이 지났다. 내일 투어를 위해 여행사 “만남~ ”을 찾아 나섰다.
목록표를 만들어 체크했지만 빠뜨리고 만 주변 지도와 여행사 약도가 없으니 더 고생이었다.
입은 먹는 기능밖에 없고, 언어의 기능은 부재라. 가이드 책자를 펴고 카오산 뒷 골목을 들어왔다 나갔다. 다시 민주 기념탑 쪽으로 한 바퀴 돌았다. 여기는 아니다.
기진맥진한 땅콩아짐을 한 곳에 묶어 두고 홀로 나선 후에야 발견 할 수 있었다.
“알림 이전” 먼지를 뒤집어쓴 누런 바탕에 글씨였다.
손바닥에 펴진 가이드북이 빤히 올려다보고 있다. 서러움의 눈물인양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안내판을 메모하고 있는 내 등 뒤에서 미남 청년이 데려다 주겠단다(물론 손짓을 봐서).
50cc 오토바이(20b)였다. 몸무게 노출을 꺼려하는 땅콩아짐과 꺼벙이를 태운 미남이 오토바이는 노란중앙 차선과 택시 틈을 요리조리 빠져 순식간에 ‘만남’으로 데려다 주었다.
오후 6시. 무려 두 시간이나 카오산 주변을 맴 돌았다. 물론, 덕분에 온몸으로 체득한 첫 날 카오산, 방람푸를 완전히 접수한 격 이었다.
‘만남’에서 내일 데이투어(수장시장+로즈가든+악어)와 저녁 아시아호텔 “칼립소 쇼”를 예약했다.
한결 여유로운 맘으로 주변을 걸었다. 현지 음식 탐방 제1탄으로 노점을 택했다.
노점에서 만두(이름 모름)를 한 도시락 사서 맞을 보았다. 제법 맛이 느껴졌다.
맞을 잘 모르는 음식도 미리 머릿속에 맞을 각인시켜 주면 동요 될 수 있다는 것이 꺼벙이의 지론 이렸다. 즉 마인드 콘트롤 효과다.
“어 맛있네, 당신은 어때, 맛있지?”
“응...” 아짐씨는 마지못해 대꾸를 했다.
아점(아침과 점심)으로 주는 기내식 이후 점심도 거른 탓인지 배가 고팠다.
8시에 시작하는 “칼립소”를 보러 갈려면 서둘러 저녁을 먹어야 한다. 방람푸 Pannee G.H 야외 식탁에 자리를 틀고 ‘**야채누들’과 콜라를 주문했다.
“야 맛있다. 당신 배고프지. 먹어봐?”
땅콩아짐의 표정은 영 아니었다. '근데, 이 아짐씨가 한식을 먹자고 시위하자는 건가'. 안색이 노랗게 변해갔다. 얼굴을 식탁에 떨구었다.
순간 앞으로의 일정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큰 소리를 “먹어야 체력을 유지 할 수 있다”고 지청구를 해 댔지만 이미 전세는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환자를 앞에 두고 버럭 화를 낸 사람이나, 돈 주고 주문한 음식을 앞에 두고 고개를 떨군 모습, 이무슨 첫 날 밤의 추태란 말인가.
당분간은 오직 먹는 기능만을 위해 존재하는 입구(入口)에 꺼벙이는 바쁘게 쑤셔 넣었다. 그러나 맛의 음미는 고사하고 그릇의 반을 비우기 전에 땅콩아짐씨의 낮은 “욱” 소리가 들렸다.
우선 자리를 이탈해야 한다. 포탄 떨어지는 전장의 현장을 피하듯 손목을 이끌고 뛰었다.
그러나 아짐씨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뒤였다.
몇 발짝 못가서 갑자기 멈추었다.
몸을 숙이기도 전에 포탄이 터졌다. 후폭풍도 없는 짧고 굵은 단 한 발 이었다.
다행히 조금 어둑한 커브길이며 노점 리어카 쥔장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우리는 범행 흔적을 은폐 할 여유도 없이 유유히 현장을 빠져 나왔다.
이국만리 숙소에 아짐 혼자 남겨 두고 ‘칼립소’를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에어컨 바람에 몸을 얼군 땅콩아짐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졌다. 대단한 대한민국 아줌마의 정신력 이었다.
오후 7시.
툭툭은 무리다. 택시(50b)를 탔다.
서비스로 음료가 제공되고 곧이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게이라는 편견 때문인지 그렇게 쭉쭉빵빵 잘 빠진 미모도 단지 가슴에 붙은 아름다운 꽃봉오리가 실리콘 덩어리로 연상됨은 어찜인가. 去勢(거세)한 남성의 심볼이 있던 그 곳이 일천하게 보이는 까닭은 어인 일인가.
무릇 남여의 관계에 무한한 호기심과 밀고 당기는 긴장감이 돌아야 엔돌핀이 팍팍 솟느니.
꺼벙이의 편견, 고정관념의 한계란 말인가. 이 여정은 거꾸로 보는 세상 이어야 한다는 다짐이 무색한 순간이었다.
익히 귓 소문으로 알고 있어서인지 ‘칼립소’의 백미는 별로였다. 워커힐 쇼를 보진 못 했지만 그런류의 매들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색다른 느낌은, 비록 립싱크로 어색하지만 각 국의 전통춤과 노래를 접할 수 있다는 것, 재미를 가미한 진행은 작위적 이지만 소득이었다.
우리의 좌석은 우측 중간 움푹하게 공간이 들어간 로얄석 이었다.
이곳에서는 또 하나의 꼴(?)볼견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옆자리 앉은 몸을 주체 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중년 백인남자와 동양여성의 무차별한 애정공세였다.
무대에 조명이 줄어 들거나 꺼지는 순간은 어김없이 제한시간을 오버 해가면서 입 박치기를 해 댔다.
꺼리낌 없이 배꼽 밑에서 손 장난이 이어졌다. 외면 할 수도 상영을 중지 시킬 수도 없는, 이 무슨 얄굿은 삼류극장의 동시 상영이란 말인가.
무자비한 ‘칼립소 쇼’였다.
23:00시. 숙소 창문으로 넘나드는 카오산 일대의 가뿐 숨소리는 식을 줄 모른다.
이방인들의 들뜬 숨소리, 자동차 열기, 어둠이 혼재한 가운데 V호텔 트위룸은 불이 꺼졌다.
대한민국 아줌마는 종일 식사도 거른채였다.
--- 거꾸로 보는 꺼벙이 세상---
'인생의 바람은 너무나 거칠고 멋대로 라서 어디에 가 닿을지 알 수 없다. 나는 어느 세상에 편안하게 닻을 내릴 수 있을까?'
인천공항을 나오자 바람의 향이 틀렸다.
30℃ 뜨거운 한 여름에서 겨울로 역주행하는 듯한 타임머신을 타고 현실로 돌아온 이질감이었다. 대전으로 향하는 공항버스의 차창으로는 뽀얀 벚꽃의 봉오리가 앙증스럽다.
마치 긴 전장의 터널을 헤치고 나온 병사의 귀환처럼 바로 어제까지의 그 뜨거운 정열의 더위는 차장의 유리 한 겹 사이로 멀어져 갔다.
막 겨울의 허물을 벗는 산과 들에 군더더기 같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일상의 파편들이, 밀렸던 여독의 피로를 몰고 온다.
점점 작아진 내 아집은 아득한 천년역사의 창살로 신기루가 되어 기억속에 흘러 들어 갔다.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1일)
3/28(일). 03:30
마음의 감옥은 아니였을까.
생각의 빈 용기에 삶의 무게가 체증으로 쌓이면 어느 정도까지 일까.
시간의 점들로 이루어진 그것들의 무게가 물방울처럼 모이고 깨지는 자연현상이 반복되는 과정이라면 감옥의 창살은 내가 그어 놓은 가슴의 상처일 뿐인 것을.
그 상처를 핑계로 일탈을 꿈꾸어 왔던 첫 발 걸음을 새벽 3:30분 기상으로 시작했다.
새벽 찬공기에 구멍이 숭숭 뚫린 스포츠 샌달을 신고 나서는 모습이 아무리 보아도 어색하다.
정확한 일정도 없이 미지로 향한다. 두 사람을 작은 배낭 하나가 열흘간의 유예기간을 잘 버티게 해 줄 것인지 사뭇 두려운 마음이다.
정작 배낭을 메고 떠날 사람은 대학생 아들놈이건만 녀석은 배웅을 하고있다. 바람난 늙다리 부부가 배낭을 들쳐 멘 모습은 새벽 어둠이 있었기에 위안이 되었다.
7명만을 태운 큰 덩치의 공항버스는 내내 새벽기운을 가르며 줄 곳 달려 6:55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너무 일찍 서두른 탓에, 우리를 맞이할 타이항공 카운터는 이후로도 한 시간을 수면 중 이었다. 커피와 빵으로 요기를 면해본다.
짬을 이용해 돈무앙 공항에서 첫 체류지 카오산 위앙타이 호텔까지의 대중교통 수단 이용요령을 익힐려고 짐을 뒤졌다.
최신정보라고 프린트 해 넣어둔 책자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뒤져도 없다.
우리의 무작정 “꺼벙호”는 출발부터 풍랑이 심창치 않다.
국내에서 공항 정도야.
주머니칼 하나 들었다고 겁먹고 조그만 배낭을 화물로 부쳤다. 신발까지 벗는 보안검색을 받았다. 세금 잘 내고, 병영의무 예전에 마쳤고, 죄 지은 것 없는 대한민국의 건전한 국민이건만 위압적인 출국 심사대에서는 부동자세로 섰다.
10:15분, TG 659는 빠른 고속음과 함께 순간 현기증을 일으키며 하늘로 튀어 올랐다. 옆 좌석의 우람한 스모선수(?)의 몸무게 때문인지 더 힘들게 이륙하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스모선수는 빈 좌석으로 옮겨 갔다.
한결 넓게 느껴지는 이코노미 좌석의 공간도 마음에서 오는 여유 때문이리라. 눈을 감았다. 머릿속은 더욱 선명하게 누선(淚腺)을 자극해 온다.
항공기 기내식은 태국식 이었다.
유예기간 중 절반이상은 그 나라 음식을 접해 보기로 다짐한 덕분인지 제법 먹을 만 했다. 그러나 동행한 땅콩 아지매는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찌는 더위를 반드시 극복해야하고, 음식은 절대다수 해당국의 전통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여행수칙 제 1조를 지켜줄지 우려되는 순간이다.
명료해지는 머릿속을 흐려 볼려고 서투른 와인을 한 잔 적신 후에야 잠시 눈을 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한 잔의 와인과 한 움큼의 잠 뒤에는 예기치 않은 두통으로 국적불명의 두통약까지 동원된 내심의 소란이 더 컷다.
아마도 여행 전 풀코스 달음질, 한 주일의 교육, 바쁜 일정 준비로 긴장한 탓 인듯하다.
노안으로 느려진 안구 조절 능력을 조율해 가며, 가이드 책자를 기초로 입국신고서를 작성했다.
현지시각 1: 20분, 항공기가 땅에 발을 내리자 나직하게 도열한 푸른 열대 야자수들이 반겨준다. 활주로 옆 골프장에는 골퍼들과 가방을 멘 나낙네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기내를 나오자 “훅”하는 열기가 몸을 휘감았다. 어느샌지 같은 기내에서 내린 젊은 아낙들은 어깨 끈만 달랑 붙은 속곳 차림이 여럿 보였다.
입국장으로 향하는 공항내 버스에는 뜨거운 열기가 질질 끌려온다.
대충 눈치로 많은 사람들이 가는 줄을 따라 갔다. 입국장, 그래도 대한민국 출국 심사대에 선 느낌 보다는 한결 여유가 있다. 우리는 이 나라의 관광 수입원으로 왔으니까.
한 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 삐닥하게 서서 입국 스탬프를 찍는 직원을 보니 까만 피부에 인자하게 보이는 여성 이었다.
뒤를 보니 땅콩 아즈매는 키 보다 큰 입국 심사대 아래서 부동자세로 서 있다.
배는 앞으로 10cm는 내민 채로.
“여보세요 몸 좀 푸세요”
이제, 꺼벙이 일행의 본격적인 고지적응 훈련이다.
“baggage~ ” 어쩌구 하는데 가서 배낭을 찾았다. 화장실에 들려 은근한 뱃고래의 두려움과 노폐물을 시원하게 분출하고, 반팔 상의로 갈아 입었다.
도상훈련대로 3층으로 올라가 다시 문을 열고 나가니 택시들이 도착하는 곳이다.
밤송이 머리를 한 수수한 인상의 기사가 막 도착한 승객의 짐을 내리고 있다.
이런 인상의 택시면 됐다 싶었다.
“따논 카오산?”
“....” 밤송이의 동공이 커졌다.
‘음, 나보다 더 꺼벙하네. 자기나라 말도 못 알아 듣고.’ 그럼 다른 말로 해야지.
“방람푸,.. 까오산,.. 방람푸... ”
그제서야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동시에 눈이 작아지며, “빠~나 푸우”로 통했다.
다시 신속하게 "How much?"
밤송이는 내말이 끝나기도 전에 택시안의 디지털 메타를 가르켰다.
웬 떡인가. 출발 후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웅얼거리는데 대충 고속도로 가자는 내용 같았다.
“오우케이”. 두 번의 요금소에서 30b+40b의 요금을 지불했다. 공연히 실언했나?
밤송이는 내내 백미러로 뒤를 힐긋거리며 특유의 웃음을 지어보였다.
목적지 까지 통행료, 미터요금, 포함 합이 250b.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다.
밤송이는 손으로 먼 곳을 가르키며 호텔이라고 했다. 차에서 내려 아무리 훝어봐도 HOTEL 글자는 아니보였다. 첫 날, 더위에 차츰 적응하기 위해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한 V호텔은 없었다.
더위는 어느새 이방인들의 머릿속과 몸속을 마구 휘 젖고 있었다.
특유의 진한 향이 더위에 녹아 피어 오르는 김이 되어 콧속을 어지럽힌다. 반 벗은 사람들이 즐비한 좁은 골목(나중에 알고 보니 ‘왓타나 쏭그람’ 뒷 골목 이었음)을 빙빙 돌아 호텔로 향했다.
땅콩아짐은 맨 몸에도 연실 얼굴을 훔쳐 낸다.
나중에 알았지만 밤송이는 말을 못 알아 들었는지 우리를 엉뚱한 방향에 내려주었던 것이다.
못 찾을 일은 없다. 다만 얼마나 빨리 적응 하는냐가 관건이다.
의외로 한국인들은 만날 수가 없었다.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젊은이들, 다른 피부색을 띤 사람들뿐이었다.
V호텔 체크인, 오후 4시가 다 되었다. 시원한 트윈룸에 짐을 놓자마자 땅콩아짐은 샤워를 해댔다.
왕궁은 관람 시간이 지났다. 내일 투어를 위해 여행사 “만남~ ”을 찾아 나섰다.
목록표를 만들어 체크했지만 빠뜨리고 만 주변 지도와 여행사 약도가 없으니 더 고생이었다.
입은 먹는 기능밖에 없고, 언어의 기능은 부재라. 가이드 책자를 펴고 카오산 뒷 골목을 들어왔다 나갔다. 다시 민주 기념탑 쪽으로 한 바퀴 돌았다. 여기는 아니다.
기진맥진한 땅콩아짐을 한 곳에 묶어 두고 홀로 나선 후에야 발견 할 수 있었다.
“알림 이전” 먼지를 뒤집어쓴 누런 바탕에 글씨였다.
손바닥에 펴진 가이드북이 빤히 올려다보고 있다. 서러움의 눈물인양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안내판을 메모하고 있는 내 등 뒤에서 미남 청년이 데려다 주겠단다(물론 손짓을 봐서).
50cc 오토바이(20b)였다. 몸무게 노출을 꺼려하는 땅콩아짐과 꺼벙이를 태운 미남이 오토바이는 노란중앙 차선과 택시 틈을 요리조리 빠져 순식간에 ‘만남’으로 데려다 주었다.
오후 6시. 무려 두 시간이나 카오산 주변을 맴 돌았다. 물론, 덕분에 온몸으로 체득한 첫 날 카오산, 방람푸를 완전히 접수한 격 이었다.
‘만남’에서 내일 데이투어(수장시장+로즈가든+악어)와 저녁 아시아호텔 “칼립소 쇼”를 예약했다.
한결 여유로운 맘으로 주변을 걸었다. 현지 음식 탐방 제1탄으로 노점을 택했다.
노점에서 만두(이름 모름)를 한 도시락 사서 맞을 보았다. 제법 맛이 느껴졌다.
맞을 잘 모르는 음식도 미리 머릿속에 맞을 각인시켜 주면 동요 될 수 있다는 것이 꺼벙이의 지론 이렸다. 즉 마인드 콘트롤 효과다.
“어 맛있네, 당신은 어때, 맛있지?”
“응...” 아짐씨는 마지못해 대꾸를 했다.
아점(아침과 점심)으로 주는 기내식 이후 점심도 거른 탓인지 배가 고팠다.
8시에 시작하는 “칼립소”를 보러 갈려면 서둘러 저녁을 먹어야 한다. 방람푸 Pannee G.H 야외 식탁에 자리를 틀고 ‘**야채누들’과 콜라를 주문했다.
“야 맛있다. 당신 배고프지. 먹어봐?”
땅콩아짐의 표정은 영 아니었다. '근데, 이 아짐씨가 한식을 먹자고 시위하자는 건가'. 안색이 노랗게 변해갔다. 얼굴을 식탁에 떨구었다.
순간 앞으로의 일정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큰 소리를 “먹어야 체력을 유지 할 수 있다”고 지청구를 해 댔지만 이미 전세는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환자를 앞에 두고 버럭 화를 낸 사람이나, 돈 주고 주문한 음식을 앞에 두고 고개를 떨군 모습, 이무슨 첫 날 밤의 추태란 말인가.
당분간은 오직 먹는 기능만을 위해 존재하는 입구(入口)에 꺼벙이는 바쁘게 쑤셔 넣었다. 그러나 맛의 음미는 고사하고 그릇의 반을 비우기 전에 땅콩아짐씨의 낮은 “욱” 소리가 들렸다.
우선 자리를 이탈해야 한다. 포탄 떨어지는 전장의 현장을 피하듯 손목을 이끌고 뛰었다.
그러나 아짐씨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뒤였다.
몇 발짝 못가서 갑자기 멈추었다.
몸을 숙이기도 전에 포탄이 터졌다. 후폭풍도 없는 짧고 굵은 단 한 발 이었다.
다행히 조금 어둑한 커브길이며 노점 리어카 쥔장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우리는 범행 흔적을 은폐 할 여유도 없이 유유히 현장을 빠져 나왔다.
이국만리 숙소에 아짐 혼자 남겨 두고 ‘칼립소’를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에어컨 바람에 몸을 얼군 땅콩아짐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졌다. 대단한 대한민국 아줌마의 정신력 이었다.
오후 7시.
툭툭은 무리다. 택시(50b)를 탔다.
서비스로 음료가 제공되고 곧이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게이라는 편견 때문인지 그렇게 쭉쭉빵빵 잘 빠진 미모도 단지 가슴에 붙은 아름다운 꽃봉오리가 실리콘 덩어리로 연상됨은 어찜인가. 去勢(거세)한 남성의 심볼이 있던 그 곳이 일천하게 보이는 까닭은 어인 일인가.
무릇 남여의 관계에 무한한 호기심과 밀고 당기는 긴장감이 돌아야 엔돌핀이 팍팍 솟느니.
꺼벙이의 편견, 고정관념의 한계란 말인가. 이 여정은 거꾸로 보는 세상 이어야 한다는 다짐이 무색한 순간이었다.
익히 귓 소문으로 알고 있어서인지 ‘칼립소’의 백미는 별로였다. 워커힐 쇼를 보진 못 했지만 그런류의 매들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색다른 느낌은, 비록 립싱크로 어색하지만 각 국의 전통춤과 노래를 접할 수 있다는 것, 재미를 가미한 진행은 작위적 이지만 소득이었다.
우리의 좌석은 우측 중간 움푹하게 공간이 들어간 로얄석 이었다.
이곳에서는 또 하나의 꼴(?)볼견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옆자리 앉은 몸을 주체 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중년 백인남자와 동양여성의 무차별한 애정공세였다.
무대에 조명이 줄어 들거나 꺼지는 순간은 어김없이 제한시간을 오버 해가면서 입 박치기를 해 댔다.
꺼리낌 없이 배꼽 밑에서 손 장난이 이어졌다. 외면 할 수도 상영을 중지 시킬 수도 없는, 이 무슨 얄굿은 삼류극장의 동시 상영이란 말인가.
무자비한 ‘칼립소 쇼’였다.
23:00시. 숙소 창문으로 넘나드는 카오산 일대의 가뿐 숨소리는 식을 줄 모른다.
이방인들의 들뜬 숨소리, 자동차 열기, 어둠이 혼재한 가운데 V호텔 트위룸은 불이 꺼졌다.
대한민국 아줌마는 종일 식사도 거른채였다.
--- 거꾸로 보는 꺼벙이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