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켓에서의 추억 -3- 방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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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켓에서의 추억 -3- 방황

트라이크 8 1498
식사를 마치고 룸으로 돌아왔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담배를 꺼내물고 물끄러미 룸 밖의 풀장을 바라보았다. 어슴프레한 불 빛의 방에는 저녁에 먹다만 술병과 잔하나가  패잔병처럼 아무렇게나 놓여 있엇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무엇이 잘못되어 먼 이국 땅의 어느 이름모를 방안에서 나는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일까?

 

풀장으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었다. 갑자기 햇살이 묻은 싱그러운 공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풀장에는 휴가를 즐기러온 몇몇 팀들의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왼쪽으로는 이미 꽤 따가와진 햇살을 즐기는 성급한 썬텐 족들이 누워 있었고, 어린아이들의 깔깔대는 소리와 연신 물속으로 뛰어드는 즐거운 비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즐거운 모습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혼자 외로우진 나에 대해 문득 웃음이 배어나왔다. 어제 먹은 술기운이 아직 남아있는지 졸음이 몰려왔다.  나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정오를 훨씬 넘기고서야 잠에서 깻다.  문을 열어 놓고 잠에 든 탓인지 풀장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푸켓의 자연은 정오를 넘기면서 무르익을만큼 무르익어  그 농염한 자태를 풀장에 가득 채우고 잇었다.  다소 소란스러운 즐거움들이 넘쳐나고 있었는데, 나는 잠도 깰겸 기분 전환도 할겸 풀장으로 내려갔다. 혼자라는 고독을 푸켓의 자연으로 묻어서 스스로 즐거워 지고 싶은 바램이었다.

 

 일본계인듯한 두 여인이 썬텐을 하고 있었고  유럽계 부부인듯한 두 사람과 아이가 행복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헬로우" "헬로우" "Where are you from?"  서양사람들은 눈 빛만 마주쳐도 인사를 건넨다. 나는 이들의 친절함과 적극적 사교를 좋아 한다. 나 또한 푸켓에서는 세계인이 되어 지나가며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싶다.

 

그 부부는 이태리에서 온 모양이다.  부인의 하얗고 고운 얼굴이 햇살에 반짝거렸다. 저편 구석에는 중국계의 세여인이 수줍은듯 몰려서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한사람은 대단히 매혹적인 얼굴이었다. 커다랗고 아름다운 검은 눈과 물보다 투명해보이는 하얀 피부, 갸름한 얼굴선은 멀리서 보아도 남자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나는 수영을 하면서 언듯 언듯 그 여인을 훔쳐 보았다. 그녀의 투명한 눈과 마주쳤을 때 나는 물을 한모금 마시는 벌을 받았다. 풀장의 물은 바다처럼 짜지 않아 좋았다.

 

나는 무엇가에 복수를 하듯 물을 헤집고 다녔다. 머리속의 복잡한 생각들이 지워질 때까지, 숨이 목까지 차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순간까지 학대하듯 물속을 헤집고 다녔다. 나의 이런 모습이 우스웠던지 그 갸름한 중국계 여인이 커다랗게 웃어 보였다. 웃는 모습은 더욱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여인의 정겨운 눈빛도 나에게는  위안이 되지 않았다. 수영장을 헤집고 다니는 것도 귀찮아질 쯤에 나는 물을 뚝뚝 떨구며 방으로 들어왔다. 뜨거운 물세례를 머리에 받으며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디 갈 곳도 가야할 곳도 없었지만 습관처럼 옷을 챙겨 입었다. 전화가 올 사람이 전혀 없었지만 전화기만 쳐다보면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올 것 같았다. 전화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시 한번 전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다이얼을 돌렸는데 뜻밖에도 전화를 받는 사람이 있었다.

 

"저 푸이 있습니까? " 어떤 남자의 다소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는데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몇 번 더 시도하였지만 안타깝게도 대화는 되지 않았다. 아쉬웠지만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무엇을 할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옷을 갈아입었으므로 일단 방을 나가야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방을 나오자 풀장의 그 중국계 여인네들이 저만치서 걸어 왔다. 외출 복장으로 갈아입은 그 아름다운 여인은 나의 시선을 발견하자 시야를 고정시킬 대상을 찾지 못한채 이리 저리 눈 빛를 굴리면서 당황스러워 하였다. 베이지색 반바지에 옅은 주홍색 티를 챙겨 입은 모습은 수영장에서 보다 더욱 더 눈부셨다. 내 앞을 어색하게 지난 직후 살짝 뒤를 돌아 나를 쳐다 보았는데 당황한 눈 빛 밑으로 내려오는 고운 뺨에 주홍색 웃옷의 색깔이 발그라니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 여인의 날씬한 걸음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로비에 키를 맡기다가 다른 생각이 문뜩 들었다. 호텔직원한테 전화번호를 주면서 전화 한통화를 부탁하였다. 한국에서 온 친구가 푸이를 기다리고 있으니 집에 들어오면 전화 부탁한다라는 말을 좀 전해달라고 하였다. 그 직원은 내 말을 이해했고 전화를 걸어 주었다.  푸이는 역시 집에 없었고 좀 전의 그 남자가 전화를 받는 모양이었다. 나는 내 룸 넘버도 가르쳐 주라고 말했다.  더 이상의 기대는 나를 지치게 하였다. 컴컴한 호텔방에 앉아서 전화를 기다리며 또 하루를 보내는 것은 그 시절의 나를 화나게 하는 일이었다.

 

밖으로 나왔다. 좁은 2차선 도로에는 렌트카를 팔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해변을 걷고 싶었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과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바다빛은 3년전 그대로였다.  혼자 걷는 사람은 나 밖에 없는 듯 보였지만, 그러나 그 눈부신 해변은 내가 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더욱 눈부신 자태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한동안 해변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끝없이 다가오는 파도소리에 취하여 걸었다. 주변이 조용하여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너무 멀리 온 것일까?  돌아오는 길은 조금 더 적적하였다. 해변의 사람들은 많이 사라져 없었고 배도 출출해졌다.

 

조금 이른 듯 하였지만 시계를 차지 않은 나는 시간이 몇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길 옆의 레스토랑에서 요기를 하고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환락의 중심가로 나아갔다. 수많은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으며 그들 모두가 오늘 저녁의 환락을 위하여 매우 바쁜 듯 보였다.

 

거리를 오고가는 수많은 사람들속에 언듯 언듯 푸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는 그 때마다 발걸음이 빨라졌고, 곧 허탈하게 돌아서곤 하였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 얼굴들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긴장했던 내 눈은 그러나 곧 지치고 말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지만 그러나 푸이는 그 곳에 없었다. 그런 나의 모습이 나는 곧 싫어지기 시작하였다.

 

 어둠은 점점 짙어졌고 거리는 정염으로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홍수가 오늘 하루밤을 만끽하기 위해 이리저리 몰려 다녔으며,  나의 존재도 그 정염의 열기에 서서히 묻혀버리면서 푸이라는 존재도 어슴프레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밤의 파도가 다시 한번 세차게 몰아치자  나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번민도 고뇌도 환락의 밤에 그대로 묻혀 사라져 버렸다.

 

어느 소란한 야외형 바에 않아 술을 시켰다. 입구에는 요란한 게이쇼가 진행중이었고 주변의 인파는 굉음을 질러댔다. 술 몇잔을 들이키자 한결 기분은 좋아졌고, 바 앞에 앉은 이국 여인이 이뻐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곳에서 몇잔의 술이 더 마시면서 주사위 놀이를 했다. 따분한 게임이었지만 그 이국의 여인은 즐거운 듯이 게임을 계속했고 나는 번번히 지기는 하였지만 시간은 잘 흘러갔다. 내기 게임에서 계속 나는 졌고 그래서 계속 술을 마셨다.

 

술이 어느정도 들어가서 알콜이 내 혀를 조금씩 지배하기 시작할 때 쯤에 갑자기 푸이 생각이 났다. 푸이가 사는 곳은 어딜까? 나는 그 바의 여인에게 전화번호를 보여주면서 그 위치가 대략 어디쯤 되는 지 물어 보았다. 그 여인의 말로는 "타운"지역이라 하였다. 푸켓타운 지역. 밤이 좀 깊은 듯 보였는데, 술을 더 마시는 것도 흥미가 없었으며 요란한 흥청거림도 내게는 그리 즐겁지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시는 광란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그 거리를 빠져나와 택시를 탓다. 푸켓타운 지역이 보고 싶었다.   

 

택시 운전사에게 푸켓타운 지역의 제일 중심지역에 내려달라고 했다. 타운지역은 Pootong과는 달리 조용한 시골마을의 풍취가 났다. 주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 같았다. 시계탑이 있는 꽤 괜찮은 건물 앞에서 차를 내려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쏘다녔다. 재래시장 풍취의 거리도 보였고 도대체 알수 없는 그림같은 글씨가 채워진 작은 간판들이 수없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푸통지역만큼 사람이 많지 않은 지역이였지만 어둠속에 가끔씩 푸이의 모습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그 어떤 모습도 푸이는 아니었지만 작은 유사점에도 나는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곤 하였다.

 

언듯 "라면"이라는 글귀가 눈에 번쩍 들어왔다. 머리를 들어보니 "썬라이즈"라는 한국식 식당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한국사람 몇몇이 음식을 먹고 있었다. 나는 소주 한병과 안주를 시켰다. "자유여행 오신 모양이지요" "네"  비교적 큰 키의 마음 좋게 생긴 아저씨가 앞에 서 있었다.

 

그 분은 푸켓에서 한국식당을 운영하면서 자유여행사를 운영하는 분이었다. 여러가지 푸켓 여행에 관한 정보를 끝없이 늘어 놓으셨다. 절벽위에 서 있는 레스토랑 "온더 락", 화요일과 금요일에 꽤 먹을만한 "홀리데이인 호텔 뷔페"  " 연인과 오면 꼭 묵어야할 호텔 /.......카트리지"  " 피피섬 관광" "시밀리언 섬의 미지의 세계" " 화려한 환타씨"등등........

 

술이 꽤 오른 듯하고 시간도 늦은 듯하여 주인아저씨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자리에 일어섰다. "선라이즈"-  떠오르는 태양의 식당이름에서  나는 어릴 때 읽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그 소설의 여주인공인 "스칼렛 오하라"가 폐허가 된 집에서한  마지막한 대사,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 오른다"

 

"썬라이즈 식당의 친절한 아저씨"와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 오른다"는 말을 머리에 빙빙 맴돌리며 나는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로비에서 키를 찾으러 갔더니 직원이 전화가 왔었다는 말을 하면서 메모를 주었다.

 

"내일 10시쯤 전화할께요...푸이..."

 

 내일은 오늘보다 더욱 찬란한 태양이 떠 오를 것이다. 

 

 
8 Comments
기름장사 2004.05.27 17:22  
  거의 작가 수준이십니다.
이건 하이틴 로맨스류 저러가라 이군요
다음편이 기대되어 잠못이룰것 같읍니다.
기름장사 2004.05.27 17:22  
  거의 작가 수준이십니다.
다음편이 기대되어 잠못이룰것 같읍니다.
르네 2004.05.27 21:03  
  와~ 진짜 작가 이신가봐요^^
재즈아프리카 2004.05.27 21:58  
  헉~~ 팬이 될꺼같다는 느낌이 팍팍드는군요..이런.~~
기다리다가~ 목빠질까 겁납니다...~~~~  정말 잘 쓰는군요~~~
qing 2004.05.27 23:14  
  담에 방콕에서 만나면 꼭 제가 한잔 살께요. 밤새 이야기하면서 담소에 빠져 보고싶군요. 저는 밀라노에서 공부 중인 옛 애인과 한국 왔을 때 2년전 함께 푸켓여행을 떠났었는데 그 애피소드를 들려 드리고 싶군요. ^^
qing 2004.05.27 23:31  
  트라이크님!  마음이 무거워지는군요. 님의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앤딩이라면 좋겠군요.
kim 2004.05.28 10:06  
  꺼벙이님 과 대작할만한 여행기 다음편 기다립니다...
여행일기가 있어 행복한 떠돌이 입니당~
Moon 2004.05.28 17:20  
  정말 트라이크님 글에는 매력이 뚝뚝 묻어 나오네요, 하룻밤 묵은 일이 있는 선라이즈 얘기도 반갑고, 그 곳 주인장이신 조이형님도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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