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수의 태국, 캄보디아(앙코르왓) 여행기 제1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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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의 태국, 캄보디아(앙코르왓) 여행기 제1막

김철수 3 828
프롤로그




 2004년 6월 13일 일요일 오후, 태국 방콕의 여행자 천국 카오산로드에서 파나소닉 스피커는 사라 브라이트만의 "Anytime, Anywhere"을 불러내고 있었다. 난 이 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캄보디아 앙코르왓에서 국경을 건너 태국 방콕으로 들어왔던 터, 아직 그 빛, 캄보라이트가 식지 않았다. 사라의 고음은 카오산을 덮었고, 내 귀엔 압사라 미소가 흘렀다. 나의 여행기는 사라 브라이트만의 "Anytime, Anywhere"를 배경음악으로 한다. 실은, 앙코르왓 해자 너머로 연신 셔터를 눌러대던 겁없는 사람들은 그것이 배경음악이었다. 나는 친절하게도 아래에 배경음악의 가사를 적는다. 영어 번역본도 덧붙인다. 허나 앙코르왓은 이만큼 친절하지 않다. 그곳은 그저 나의 도시였으므로.




------- 사라 브라이트만의 Anytime Anywhere 원곡 가사 ---------




Strade son' cambiate.

Faccie son' diverse.

Era la mia città.

Non la conosco più.

La ora io sono solo un' estranea

Senza patria. 




I remember you were there.

Any one emotion.

Any true devotion.

Anytime, anywhere.




Case son' cambiate.

Voci son' diverse.

Era la mia città.

Non la conosco più.

La ora io sono solo un' estranea

Senza patria.




I remember you were there.

Any one emotion.

Any true devotion.

Anytime, anywhere.




Tanti, anni son' passati.

Vite son' cambiate.

Era la mia città.

Non la conosco più.

E ora io sono solo un' estranea

Senza patria.







------- 사라 브라이트만의 Anytime Anywhere 영어 번역 가사 ---------




Roads have changed.

Faces are different.

It was my city.

I do not know it anymore.

Now I'm just a stranger

Without a native land.




Houses have changed.

Voices are different.

It was my city.

I do not know it anymore.

Now I'm just a stranger

Without a native land.




Many years have passed.

Lives have changed. 

It was my city.

I do not know it anymore.

And I'm just a stranger

Without a native land.







- 여행기간 : 2004년 6월 8일 밤 9시 ~ 2004년 6월 17일 아침 6시 20분 (7박 10일)

- 이동경로 : 인천 - 방콕 - 아란야프라텟 - 캄보디아 뽀이뻿 - 씨엠립 - 앙코르왓 (거꾸로 반복)

- 비용 : 항공료 30만원 외 약 40만원

- 숙소 : 캄보디아 씨엠립 The Earth Walkers 4박, 태국 방콕 싸왔디인 3박




* 일반적인 여행기와 달리 이 글은 각각의 에피소드로 되어 있다. 어떤 부분은 사실에 바탕을 두지만 어떤 부분은 나의 환상이다. Lonely Planet을 원한다면 Hello 시리즈를 참고하라. 이 글은 Lonely Walker다.




제 1막 제 1장. 지평선




 6월 9일 새벽 0시 반, 동쪽 한국에서 서쪽 태국 방콕 돈 므앙 공항으로 두 시간을 앞당겨 도착했다. 문득 비행기 안에서 시간은 어떻게 조절하는지 궁금하다. 한국에서 태국으로 가는 항로 어디에서 시침을 돌려주어야 할까? 이륙할 때? 아니면 착륙할 때? 나의 타임머신은 우습게도 기내식이 나올 때이다. 밤 12시에 밥을 먹고 배를 두드리며 시침을 10시로 옮기면 소화가 잘 된다. 




 인천공항보다 2시간 늦은 방콕 돈 므앙 공항은 20년은 늦어 보인다. 방콕도 가야할 길이 멀 듯 나도 앙코르왓을 향해 긴 여정을 시작한다. 북부터미날로 택시를 같이 탈 어설픈 동행자를 2시간 넘게 기다렸지만 결국 새벽 2시 반에 택시 하나를 독차지했다. 택시 정류장 안내 부스에 있는 아가씨는 300바트(1바트는 약 30원)라고 했고, 벤치에 앉아 여느 현지인이 그렇듯 내게 'Where are you from?"을 물은 택시 기사는 200바트를 불렀다.




 [한국인 트랜드]란 책에 “시간을 팔아 시간을 산다”는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팔아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돈을 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다시 자신의 시간을 산다. 이 아이러니한 논리는 택시 요금에도 적용된다. 빨리 가고 싶으면 돈을 더 내라. 그렇지 않다면 시간이라도 내라. 나는 시간을 냈다. 30분간의 두리번두리번(?)의 대가는 50바트. 북부터미날까지 150바트로 15분만에 도착했다.




 더위를 물으면 덥다. 낮더위는 그러려니 하지만 밤더위는 익숙지 않다. 방콕의 북부터미날과 서울의 상봉터미날의 차이는 신문지. 방콕은 맨바닥에 눕고, 우리네는 신문지라도 있어야 등을 댄다. 간혹 오해하기 쉽지만, 신문지를 깔고 누운 사람이 거지다. [공동경비구역 JSA]와 [복수는 나의 것] 등의 각본을 썼던 이무영 감독의 영화 [휴머니스트]엔 거지가 나온다. 그가 한 말이 생각난다. 대략 이렇게... “나는 깔끔하게 씻는 놈들이 싫어. 일단 안 씻기 시작하면 정말 편하지.” 익숙함이란 이런 것이다. 여행기간 중 나는 10번 큰 볼일(?)을 보았지만 한번도 물로 닦은 적은 없다. 내겐 휴지가 필요하다. 휴지통이 있는 화장실을 찾아다닐 필요가 있다.




 화장실 얘기가 나왔으니 방콕 돈 므앙 공항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다 화장실을 들렀던 때가 생각난다. 내가 먼저 들어간 화장실에서 대략 7미터의 휴지를 썼다. 그때 옆에 누군가 들어와서 볼일을 보더니 갑자기 쒸익! 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오호! 태국인인가 보다. 그는 먼저 물로 씻고 휴지를 뜯어 마무리를 하는 듯이 들렸다. 그가 먼저 나왔고, 뒤따라 나도 나왔다. 우리 둘밖에 없던 화장실에서 나는 휴지를 사용하는 한국인이었고, 그는 휴지와 물을 동시에 사용하는 서양인이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에로(?) 감독 틴토 브라스(모넬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의 영화를 보면 여성용 비데(?)가 나온다. 사실 비데의 원조는 인도였나 보다.




 아무튼 북부터미날에서 3시경에 3시 30분에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에 위치한 작은 도시 아란 야프라텟으로 가는 표를 164바트로 끊었다. 터미널 안에는 한 무리의 한국인이 있었고 좌석마다 태국인들로 꽉 차 있었다. 한쪽 입구 바닥엔 십여 명의 원주민(?)이 드러누워 있고 간간이 간판만 보다 걸으면 발에 원주민이 걸리기도 한다. 물론 이들은 거지가 아니다. 서서 기다리다 보니 앉고 싶고, 앉았다 보니 눕고 싶고, 누웠더니 졸려 자는 사람이다. 다행히(?) 우리 한국인들은 아직 졸음을 참을 수 있다.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북투터미날에서 아란 야프라텟 가는 버스 타는 법을 꼭꼭 읽어 외었지만 현장에선 별 쓸모가 없었다. 역시 나홀로 여행에서 눈치만큼 좋은 것은 없다. 눈치는 곧 생명이다. 한 무리의 한국인이 타는 버스에 오르면서 ‘아란?“ ”예“. 이 것이면 끝이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아란 야프라텟까지는 4시간 반 정도 걸린다. 나는 울산에서 태어나 대학을 서울로 다녔다. 경부선 버스는 우등버스가 막 나올 때부터 타고 다녔다. 경부선 버스는 옥천 휴게소나 금강 휴게소에 꼭 쉰다. 10분이라지만 15분도 쉬고 20분도 쉰다. 화장실은 이때 가야 된다.




 그런데 아란 야프라텟으로 가는 이 버스는 어디에서 쉴까? 아니 쉬는 시간에 얘기라도 해줄까? 상봉터미날에서 의정부 방면으로 가는 구형 버스같은 이 버스에 비록 운전기사와 안내원 2명이 타고 있었지만 이 차가 어디에서 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역시 눈치가 최고다. 운전기사가 흡연자일 경우 더 이상 [헬로태국]은 필요하지 않다. 2시간쯤 달린 후 한 주유소 겸 휴게소에서 운전기사가 내려 담배를 꺼내 문다. 이때 화장실에 가야 된다. 아니나 다를까. 몇 명이 좁은 통로를 비집고 나와 화장실을 찾는다. 나도 나왔지만 담배만 한 대 문다. 아직까지 난 동남아의 화장실에 익숙지 않다.




 다시 버스는 출발하고 얼마쯤 갔을까? 점점 날이 밝아진다. 5시쯤 넘으니 어슴푸레 지평선이 보인다. 지평선!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이 바로 지평선이다. 산이 없이 평평한 땅이 구름과 맞닿은 지평선. 우리나라에선 지평선이 없다. 산평선(?)이라 해야 할까? 며칠 뒤 앙코르왓 동쪽의 쁘레 룹(PRE RUP)에서 한 소녀가 조그만 종이를 찢어 내게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녀의 그림은 가로로 그은 선과 바로 위에 붙은 해, 그리고 오른쪽 아래에 나무 하나였다. 그녀가 그은 가로선은 지평선이다. 내가 초등학교 때 그은 선은 수평선이다.




 우리나라에서 지평선을 본 것은 군대에서 행군할 때이다. 강원도 고성에서 복무할 때 한밤 중에 고성평야를 행군한 적이 있다. 알다시피 고성평야는 잼버리 대회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고성평야 한 가운데를 10킬로미터 이상 뻗어 있는 일직선의 도로를 걸으면서 지평선을 보았다. 사실 어두워서 안 보였던 것뿐이지만 둘레에는 작은 산맥이 가로 막고 있었다. 내가 본 가장 넓고 평평하고 건물이 없는 땅은 고성평야뿐이었다.




 해가 조금씩 평평한 땅위에서 올라옴에 따라 지평선은 더욱 분명해졌다. 중국이나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는 사각형 지구와 관련된 우주관이 있다. 지구를 네모난 상자이거나 혹은 네모난 평평한 판자로 보는 시각인데 그런 생각이 나올 만도 하다. 지평선을 보고 있자면 지구가 둥글다고 우겨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




 지평선의 감흥은 아란야프라텟을 지나 캄보디아 국경 마을인 뽀이뻿에서 택시를 타고 3시간을 씨엠립으로 달리는 길에서 더 잘 보였다. 건물이란 개념은 없고 집만 드문 드문 보이다 말다 하는 이 길을 달리고 있으면 완벽한 형태의 지평선(건물도 없고, 강도 없고, 산도 없는 지평선)을 볼 수 있다. 씨엠립에서 마지막 날 반띠아이 쓰레이를 보러가던 중 프놈 꿀렝(PHNOM KULEN)을 보았는데 이는 꿀렝 산이란 뜻이다. 캄보디아의 수도인 프놈펜은 펜 산이란 뜻이다. 프놈 꿀렝을 그림으로 그리면 마치 모자의 단면과 같다. 가로로 선을 긋고 그 위에 반원 하나만 그리면 된다. 한국화는 산을 여러 개 중첩되게 그려야 된다.




 그러니 나의 모또 드라이버인 크리스(그의 캄보디아 이름은 디몽 타낑 DIMONG TAKING이다. 나는 다이어몬드 테이킹 DIAMOND TAKING이라고 놀렸지만 서로가 어설픈 영어 놀이로 어색하기만 했다)가 아무리 저게 산이다(There is mountain)이라고 해도 내 보기엔 여전히 언덕이었다(There is hill). 앙크로왓 유적지 중에서 아마도 거의 유일하게 산 위에 위치한 프놈 바껭(PHNOM BAKHENG)에서 보는 일출과 일몰은 유명한데 이 야트막한 산으로도 사실 충분할 만큼 지평선은 분명히 보인다. 크리스는 아침부터 프놈 바껭에 오르려는 날 불쌍한 듯 쳐다봤다. 나의 입장에선 산책쯤이었지만 그는 아무래도 등산이라 여겼나 보다.




 아무튼 난 지평선이 좋다. 재작년 홍콩에서 구룡반도에서 보았던 홍콩섬의 야경(빌딩숲과 간판들)도 좋고 그 전 해의 일본 오사카의 건물평원(너른 평원 위를 건물로 메운 곳)도 좋다. 그래도 지평선만 못하다. 등산하는 사람은 정상에 올라 자기 발끝 아래 모든 것이 보이더라는 만족을 얻는데, 여기서는 손끝 아래 모든 것이 보인다. 대륙의 기질이란 단지 땅이 커서가 아니다. 이런 대평원이 있어서일 게다.







제 1막 제 2장. 뽀이뻿의 전투




 6월 9일 오전 3시 반에 방콕의 북부터미날에서 출발한 구형버스는 8시쯤에 캄보디아와의 국경 도시인 아란 야프라텟에 도착했다. 도시라고 표현했지만 우리로 치면 읍내 수준이다. 여느 관광객이 그렇듯 나도 화장실을 먼저 찾았다. 차마 큰 볼일을 볼 용기는 나지 않았고, 작은 볼일만으로 흡족해 했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정보는 여기에서 툭툭을 50바트를 주고 타서 국경으로 가면 된다. 아니나 다를까. 수십여 명의 툭툭 드라이버들은 50바트를 기준으로 흥정을 하고 있다.




 흥정은 매우 쉽게 된다. 나는 50바트로 알고 있고 원가(?)는 10바트 이하이다. 원가를 알게 된 것은 4일 후 돌아오는 날 어느 일본인 아저씨(할아버지에 가깝지만...) 때문이다. 그는 국경에서 아란 야프라텟 버스 터미널로 10바트에 툭툭을 탈 수 있다고 우겼다. 왜냐하면 몇일 전 이곳에서 국경까지 10바트로 툭툭을 탔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위는 흥정을 쉽게 끝낸다. 미국 드라마 중 [24시]라는 것이 있다. 대테러본부의 어느 하루 24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24편에 걸쳐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이색적인 드라마인데 현재 시즌 3까지 나왔다. 이 드라마에서 대테러본부 취조실 장면이 있는데 대장급 되는 주인공은 악녀(?)의 취조를 위해 취조실 온도를 높인다. 일단 온도가 높아 더위를 느끼게 될 때 만약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한다면 사람은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흔히 “냉정하게 생각하자”는 말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머리가 차가울수록 생각이 잘되고 두뇌 회전도 빠르다. 결정도 본인에게 유리하게 나온다. 하지만 머리가 더워지면 반대가 된다.




 흥정은 더위의 덕을 많이 받는다. 아들쯤 보이는 남자애를 앞에 앉힌 40대 초반쯤의 뚝뚝 드라이버는 100바트를 불렀고, 난 50바트를 불렀다. 그는 망설임없이 뒷좌석을 가리켰고 나는 무거운 가방을 실었다. 내가 인터넷으로 50바트를 보았듯, 그도 내가 50바트를 부를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린 이렇게 원가와 관계없이 선구자(?)와 원주민 사이에 암묵적으로 마련된 시장 경제를 따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규칙을 깨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일본인 아저씨처럼 바락바락 우겨서라도 10바트만 낼 수 있다. 그걸 보고 있자면 짠돌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반대로 보면 내가 속고 사는 것이다.




 어쨌든 버스는 날 대신해서 바람과 싸우지만 툭툭은 나더러 바람먼지와 사귀라 한다. 대략 시속 40~50키로쯤은 되는 듯한 속도로 툭툭은 잘도 달려갔다. 바람과 먼지와, 앞서 가는 차의 매연은 오픈카(?)의 매력을 반감시켰다. 캄보디아에서 여행 중에 문득 문득 느낀 것이지만 덮지만 않다면 고글과 마스크는 필수다. 당연히 캄보디아인은 고글이 없으므로 천으로 얼굴을 둘러싼다. 특히 트럭 뒤에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릴 때는 모두 인도 여인이 된 것 같다.




 10분 정도 달렸을까? 드디어 국경에 도착했다. 사실 툭툭 드라이버는 날 국경에 내려줬지만 나의 첫느낌은 시장이었다. 이런! 사기를 당한 걸까? 허나 국경의 삐끼들은 여기가 국경 맞다고 얘기하며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인터넷으로 본 바 그들은 비자 삐끼들이다. 비자 사무소가 문을 닫았다거나 하는 등으로 대신 비자 신청을 해주고 공식 비자 수수료 1,000바트의 두 배를 받아 챙긴다고 한다. 항상 그렇지만 모르면 당하는 법이다. 때론 알아도 당한다. 그러니 어찌 내가 이들 삐끼들을 이길 수 있으리오. 대부분의 게시판에 올라온 댓글과 마찬가지로 ‘그냥 무시하세요’가 답이다.




 슈퍼마켓을 끼고 돌아 조금만 걸어가니 국경이 나왔다. 캄보디아 관련 홈페이지에서도 자주 보았던 캄보디아 국경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왼쪽 앞에 여행자가 서 있고 그 뒤로 큰 기둥 두 개 위에 앙코르왓 단면이 올려져 있는 이 사진은 캄보디아 입국시, 혹은 출국시 꼭 치러야하는 의례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국경을 본 순간 나는 무척 궁금했다. 왜 수많은 캄보디아 여행자들은 앙코르왓 대문 아래를 찍지 않고 꼭 위를 보고 찍었을까? 이유는 쉽게 찾았다. 대문의 아래에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장면을 뽀이뻿의 전투라고 표현하고 싶다. 수많은 캄보디아인들이 국경을 넘어 태국에서 물자를 가져간다. 큰 트럭을 몰고 오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맨발로 리어카를 끌고 와서 한가득 담아간다. 과일도 있고, 천도 있고, 고기도 있고 별의별 것을 다 가져간다. 리어카는 아버지가 끌고 뒤에서 아들이 밀고 양 옆으로 어린 아들과 딸이 붙어 간다. 더위와 먼지와 소음과 매연과 사람들이 뒤섞인 장면. 난 최근에 이 장면을 보았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대구 피난길이었던가? 딱 그런 모습이다.




 캄보디아는 알다시피 세계적인 최빈국이다. 근세 들어 프랑스가 점령했고 독립과 함께 내전이 끊이질 않았다. 영화 [킬링 필드]는 크메르루즈군의 대학살을 다룬 영화다. 더 깊은 내용은 사실 우리네 현대사만큼 복잡하다. 어쨌든 그들은 지금 크메르루즈를 싫어하는 것은 분명하다. 내 생각엔 프랑스가 독한 나라다. 그들이 캄보디아를 점령했을 때 기찻길 한 칸 놓지 않았다. 철저히 빼앗기만 하고 하나도 주지 않았다. 사실 무얼 준들 감사하겠느냐마는...




 캄보디아 비자를 받는 일은 역시 눈치껏 해야 한다. 단지 간판과 정복을 입은 사람만이 비자사무소임을 알려주었다. 여전히 나는 그 허름한 1층 건물이 비자사무소라는 것이 믿기지 않아 서성거렸지만 배경음악처럼 언제 어디서나 자신있는 서양인 한 명이 비자사무소로 들어가 비자신청서를 쓰는 것을 보고 따라했다. 희한한 것은 비자사무소 벽에 걸린 샘플 3장에는 영어와 일본어, 그리고 한국어로 적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홍길동이었다. 이 친숙함. 이 편안함. 이 느긋함. 선구자에게 감사를 드리며 비자신청서와 사진 한 장과 여권과 1,000바트를 정복입은 사람에게 주니 어설픈 영어로 기다리라 한다. 5분 후 그가 부르더니 비자가 붙은 여권을 돌려준다.




 사실 비자사무소의 리셉션 안은 보지 못했다. 나는 그곳이 전산화가 되어 있는지 궁금했다. 물론 나중에 출국할 때는 리셉션 안을 보니 노트북이 있었다. 하지만 인천공항처럼 바코드를 찌익 긁지는 않았다. 나는 캄보디아로 입국했지만 캄보디아 네트워크에는 입국하지 못한 것 같다. 순간 나는 적잖게 당황스러웠다. 나는 내 존재가 네트워크에 기록되어 남아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종이에 펜으로 나의 입국 날짜를 적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컴퓨터에 연결된 라인을 따라 나의 위치와 존재가 중앙 전산망에 흔적을 남겨주어야 안정이 될 것 같았다. 이 기분을 이해하는가?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내가 여행을 떠난다는 흔적을 여러 곳에 남겼다. 우선은 가족에게 전화를 했고, 애인과 친구에게 얘기했다. 여행자보험을 들었고, 휴대폰 인사말을 녹음했다. 나의 네이버블로그에 여행 기간을 알렸고, 한메일 중 중요한 이메일에는 자동답장 기능을 추가했다. MSN 메신저엔 일찌감치 대화명을 여행날짜로 바꾸어놓았다. 이것은 모두 나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이다. 나는 네트워크인간이다. 네트워크에서 나의 위치를 잃어버리면 나의 존재도 잃어버린다.




 뽀이뻿의 로터리는 국경 바로 앞이다. 하지만 가운데 길은 캄보디아인들이 지나다니고 양 옆으로 바리케이트(?)가 쳐진 좁은 길은 외국인이 입출국하는 길이다. 이 길 입구에는 두세 명의 관리가 작은 의자에 앉아 비자를 검사하고 있었다. 이곳 뽀이뻿의 사람들 중 아마도 가장 여유가 있는 사람은 바로 이들 정복차림의 관리들일 것이다. 이곳에선 그들이 왕이다. 누구도 그들에게 대들지 못한다. 사실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다. 세계 어느 나라 국경 관리들도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다. 나는 국경 관리들이 외무부 소속인지 법무부 소속인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모두 국방부 출신인 것 같다. 그들은 입국자와 출국자 때문에 먹고 살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감사하지 않는다. 우린 그런 사람들을 관리라고 부른다.




 뽀이뻿 로타리까지 따라온 젋은 삐끼는 씨엠립까지 가는 트럭을 계속 권유했다. 그는 500바트를 불렀다. 짐칸이 아니라 운전석 바로 옆자리가 500바트. 나는 삐끼를 무시하고 택시를 같이 타고 씨엠립까지 갈 동행자를 찾기로 했다. 택시는 1대당 1,000바트. 버스는 300바트 정도라지만 5시간 가량 걸린다고 한다. 트럭은 조수석은 300바트, 짐칸은 100바트까지도 한다고 하니 참 다양한 이동 방법이 있다고 해야 할까? 난 3시간만에 도착한다는 택시를 원했고 1시간 넘게 기다린 끝에 190센치가 넘는 미국인 남자와 그의 (의심가는) 태국인 애인과 함께 택시를 구했다. USA맨은 24달러를 불렀고 나는 도착 후 8달러를 지불했다.




 일본 도요타 캄리(CAMRY, 나중에 일본인 아저씨는 까므리라고 불렀다)는 정말 잘 달렸다. 일찍이 비포장도로 얘기는 인터넷으로 수없이 읽었지만 정말 이 정도라고 보기엔 힘들 정도로 험한 도로(이 표현이 문맥상 적당한지는 모르겠지만)를 부드럽게 굴러갔다. 나는 조수석(우리로 치면 운전석)에 앉았고 미국인과 태국인은 뒷좌석에 앉았다. 택시 드라이버는 안전 벨트를 매지 않았지만 나는 시속 90키로로 비포장도로를 달린다는 얘기를 들은 바, 뻑뻑한 벨트를 잡아 댕겼다.

3 Comments
푸잉좋아 2004.06.20 15:18  
  근래 보기 힘든 여행기입니다. 장편소설을 읽는 기분이 드는군요...기대하겠습니다...앞으로의 일정을...^^
그렇지뭐 2004.06.21 04:06  
  그림이 머리속으로 그려지네요.
표현력,비유법 ,정말 좋습니다,.
저는 그런 문장력이 없어 님이 부러울 뿐입니다.
택시는 탔는데...
다음일정이 기다려 집니다!
계속 수고하세요?????
쟝고 2004.06.21 16:37  
  대단한 필력이심다...지금까지 침묵을 지키신게 용하네요..존경스럽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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