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켓에서의 추억 -9- IMF와 파국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서울은 여전히 활기에 넘치고 있었다. 겨울로 넘어가면서 경기가 조금씩 나빠지기는 하였으나 큰 문제는 없는 듯 보였다. 캄보디아 건은 상당한 호평속에 진전이 이루어졌다. 캄보디아 밀림을 개발하여 에칠알콜의 원료로 쓰이는 타피오카를 재배하는 일이다. 타피오카는 전분중에서 가장 저가의 원료로서 물량만 확보한다면 한국에서 쉽게 판로를 구할 수 있었다. 타피오카는 분말상태에서 소주의 원료인 에칠알콜을 만드는데 주로 사용되며, 화장품의 원료등으로도 사용되었다.
투자자들은 적극적이었으며 나는 상당한 초기자금을 마련하여 캄보디아로 날라갔다. 밀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칠었다. 장비는 모두 한국에서 들여와야 했으며 숙련자들도 한국에서 날라와야만 했다. 초기에 현지인들과의 의사소통에 애를 먹었으나 다행히 비교적 성실한 현지 관리인을 구할 수 있어서 일은 생각보다는 빠르게 진척되어 갔다. 그러나 밀림의 개간이라는 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일은 아니다. 개간을 끝내고 씨를 뿌려서 수확을 한 후에 그것을 분말로 만드는 과정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으며 초기 계획보다는 훨씬 더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캄보디아 조직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 다음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의 본사 조직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해가 바뀌어 97년도 봄이 되었다. 경기 불황은 지속되었다. 환율은 조금씩 상승추세에 있었는데 이것은 해외투자를 하는 나를 어렵게 만들었다. 금융권에서는 7월 위기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조직 구성원들은 초기의 불협화음을 극복하고 원활하게 움직였다.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잘안하는 내 성격은 처음에 조직을 안착시키는 되는 어려움이 있었으며 다소의 불협화음을 만들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것은 시스템을 조기 안착시키는데는 도움이 되었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나의 성격은 일종의 모럴헤저드일 수도 있었다. 탑의 싫은 소리는 오히려 정확한 업무지시일 것이고 직원 입장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편했을 것이다. 말을 아끼는 내 성품과 스스로 움직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오히려 저들을 불편하게 하였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직원들은 나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나는 직원들이 나를 이해해주는 것이 적이 안심이되면서도 지시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나의 직무태만이 미안하기도 하였다. 나는 인생에 있어서 일이라는 것이 사랑만큼 귀중하고 재미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눈을 뜨나 감으나 끊없이 떠오르는 그녀의 얼굴처럼 그렇게 일은 사랑하여야 인생은 유쾌하다. 만약 그 일이 재미가 없으면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경기가 쉽게 풀리지 않자 자금분야는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초기 자기자본 규모가 많지 않은 상태였고 경기가 불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자 투자자들은 서서히 나의 곁을 떠나갔다. 나는 하루의 반나절을 은행이나 금융기관에서 보내는 일이 잤아졌다. 금융기관 종사자들에게 나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실적을 원했다.
일이 바빠질수록 푸이와의 대화시간은 줄어들어 갔다. 대략 두시간 정도의 시차가 났는데 이것은 오히려 나에게는 편하였다. 밤 11시에 일을 끝내고 전화를 하여도 푸켓은 밤 9시이기 때문이다. 푸이와 나 모두 영어실력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화를 하면 할수록 영어는 늘어갔다. 어차피 영어는 나의 사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가을로 넘어가는 어느 날이었다. 초가을치고는 음산한 바람이 거리를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푸이의 목소리가 힘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냐고 왜 그리 힘이 없냐고 물어보자 그녀는 아버지가 요즘 울적해 하신다고 하였다. 언제나 쾌활하고 호탕한 성격의 아버지라 나도 걱정이 되었다. 사업이 잘 안되어서 그러시는 것 같다는 푸이의 말을 들어면서 요즘 태국경제가 좀 안 좋나보다 생각했다. 집안 일에 별로 걱정을 하지 않는 푸이의 평소 성격으로 보아, 아버지 사업이 많이 안좋은가 보다 생각했다.
태국은 그 해 여름에 IMF 관리체제에 들어갔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으나 한동안 푸켓에 있는 푸이가 걱정이 되었다. 가을이 깊어가는 찬바람부는 이른 새벽에 갑자기 그녀가 걱정이 되어 전화를 걸었다. 꿈이 좋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나는 다른 나라의 IMF 기사를 많이 보긴하였으나 외환위기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3일동안 내리 전화를 하였지만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태국과 관련된 이전 뉴스들을 모두 살펴보았지만 도대체 이 외환위기라는 존재를 정확히 알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왜 전화는 받지 않는 것일까? 집에 아무도 없단 말인가?
3일째 되는 날 밤에 집으로 전화가 왔다. 푸이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놀라며 물었고, 푸이는 곧 말에 울음이 섞여 나왔다.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아버지가 결국 파산을 하여 집을 버리고 친척집으로 이사왔다는 이야기였다.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한사코 오지 말라고 말리는 그녀 말을 무시하고 나는 푸켓행 비행기를 예약하였다.
자금 사정이 넉넉치 않아서 푸이에게 무엇인가를 해줄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통받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사정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 해 11월초에 비행기가 예약되었고 나는 많지는 않지만 작은 돈을 마련해서 푸켓으로 날라갔다.
푸켓의 밤은 전에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 휘황하던 밤거리는 훵하니 비어 있었으며 관광객들도 초라해 보였다. 텅빈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느낀 작은 공포는 점점 더 크기를 더하면서 나를 압박하였다.
다행히 푸이의 얼굴은 그리 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언제나 밝은 얼굴에 분위기 있는 눈빛, 가끔 익살스럽게 변하는 입모양은 그대로였다. 반가운 모양이다. 나도 반가웠다. 무척 걱정을 하였는데 다행이었다.
한국은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지만 푸켓은 여전히 한여름의 열기로 타오르는 더운 날이었다. 오랬만에 잡아보는 손은 가슴을 떨리게 하였다. 인간은 참으로 오묘하다. 그냥 사람의 손인데 왜 푸이의 손을 잡을 때는 나의 손은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까? 마치 손바닥에 있는 신경세포 하나 하나가 살아나서 그녀 손세포 하나 하나를 탐닉하듯이 돌아다니는 것 같다. 이런 느낌을 그녀는 알까? 아니 그녀도 나처럼 같은 느낌일까?
그날 밤 그녀는 집으로 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나는 수차 집에 가야한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갈려고 하지 않았다. 오늘 집에 가버리면 내가 사라져버릴 것 같아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최근 그녀의 가정을 괴롭힌 경제적인 문제의 깊이를 조금씩 이해할 것 같았다. 언제나 당당하고 자존심 강했던 그녀가 풀이 죽어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우리는 썰렁해져 버린 그 푸통거리를 밤새도록 헤매며 돌아 다녔다. 번화가의 불빛이 싫어지면 해변으로 나가서 모래사장을 마음껏 뛰어 다녔다. 앞서 달리는 그녀를 쫒아갈 때 바다 바람에 실려오는 그녀의 사과향기가 좋았으며, 가까이 있을 때 느껴지는 간지러운 그녕의 머리카락, 여전히 나를 즐겁게 하는 그녀의 목소리. 그날밤 우리는 오랬동안 만나지 못했던 것을 분풀이라도 하듯 그렇게 푸켓의 밤거리를 쏘다녔고, 술을 마셨고, 때로는 밤새 문을 여는 악세사리 가게에서 물건을 흥정하며 즐거워했다.
푸켓에서의 하루 하루는 너무나 시간이 빠르다. 푸켓으로 날아온지 4일은 후딱 지나가 버렸다. 나는 몇푼 안되는 돈이지만 그녀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건넸고, 그녀는 꼭 갚겠다는 어색하면서도 귀여운 표정을 내게 보였다. 낮에 그녀가 학교에 나가면 무료하였으므로 나는 한국에 전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큰 일은 없어 보였는데 자꾸 은행일이 걱정이 되었다. 주로 내가 담당하던 일이었으므로 없는 동안에 작은 불상사라도 생길까봐 전전긍긍하였다.
그날 밤 어쩐 일인지 푸이가 내 방을 보고 싶어 했다. 오래 사귀었지만 그녀는 결코 내 방에 오려고 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녀의 그런 절제를 몹시도 사랑했었다. 그런데 그 날 밤은 웬일인지 초저녁부터 내 방에 가보고 싶어 하였다.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한 그런 마음으로 어색하게 방에 들어왔다. 그녀 또한 몹시도 어려워하고 어색해 했다. 나는 어색한 기분을 없애려 창문을 열었다. 커피를 한잔씩 나누면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는 약자들의 만병통치약이다.
별로 할일이 없었으므로 CNN 뉴스를 틀어 놓고 잡담을 만들어가고 있었는데 CNN에 김영삼 대통령이 나왔다. 나는 별일이다 싶어하며 무심코 지나치는 눈길에 IMF라는 글귀가 들어왔다. 같이 TV를 응시하던 푸이도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화면에는 힘없어 하는 대통령과 기자들의 소란스러운 질문들을 방영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국이 IMF 관리로 들어간단 이야기야?"
"응 그런 것 같은데?"
이건 무슨 말인가? 도대체 왜 한국이 IMF 관리체제로 들어간단 말인가? 한국으로 전화를 하였다. 회사에 남아있는 직원들은 없었다. 김부장 집으로 전화를 했다. 부인이 전화를 받았다. 김부장은 나에게 계속 전화를 하다가 안되어서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IMF가 진짜냐고 부인에게 묻자 부인도 지금 방송을 보았다고 했다.
푸이는 흐름한 불 빛 속에서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는 페레그린 증권 황부장에게 전화를 했다. 그동안 나는 상당한 자금을 주식투자에 넣어 놓고 있었다.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황부장은 말이 없었다.
"사실대로 말해 주십시오. 저 지금 푸켓에 있습니다"
" 그냥 편안하게 당하자고요...어차피 주식은 휴지나 다름 없습니다....다같이 망한겁니다.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고통이지만 방법은 없습니다...."
그날 밤은 고통이었다. 그 호텔방에서 푸이와 나는 알수없는 미래에 대한 공포와 반복되는 같은 말들을 뇌까리며 아침을 맞았다. 유일한 피난처는 술이었는데 술을 마셔도 취기가 돌지 않았다.
밤이었고 한국으로의 전화도 잘돼지 않았으며 아는 것도 별로 없었다. 푸이는 나의 회사에 대한 걱정을 되풀이 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보았던 아버지 회사에 일어난 일들을 나에게 전달하려고 애를 썻고, 나는 애써 그 이야기가 나의 회사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하곤 하였다. 푸이에게 집으로 들어가라고 말하였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사실 나도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으며 혼자 있기에는 너무나 두려운 밤이었다.
한국으로 귀국하려는 사람들이 폭주해서 어렵게 어렵게 비행기표를 구하여 한국행을 탔다. 그녀는 퉁퉁부은 눈으로 나에게 웃을을 지으려고 애를 썻고 나는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희망을 주려고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한국에 왔지만 상황은 더욱 암울하였다. 받아 놓은 어음은 현금화할 수 없는 휴지가 되어 있었으며 자금융통을 위한 은행 담당자는 만날 수조차 없었다. 몇몇 금융기관들은 예금인출 사태를 우려하며 경찰관을 배치하기 시작하였으며, 나는 밀려오는 채권자들에게 그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밖에 할말이 없었다. 우리는 그 시절이 금방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나는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사무실을 지켰지만 해야할 일도 할수있는 일도 없었다.
주식은 끝없이 하한가를 쳤으며 자금화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아버지에게 자금지원을 요청할까를 몇번 생각하였지만 그렇게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다함께 망했으므로 나 또한 같이 망한대로 있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 결론이었다. 댐이 무너져 내리는데 모래 포대 하나로 막을 수는 없었다. 물난리가 난 것이고 내가 할수있는 것은 물난리에서 살아남는 일밖에 없었다. 모든 재산을 다 떠나 보내고 그러나 살아 있다면 희망은 보일 것이다. 그것이 내일일지 일주일 후일지 아니면 일년 후일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암울한 겨울에 결국 나는 캄보디아 프로젝트를 남에게 넘기고 사무실을 정리하였다. 봄이 되었지만 사태는 해결의 기미가 없었다. 외국계 "스티브마빈"이라는 사람은 트리플 투를 떠들고 다녔다. 환율 2000원, 금리 20%, 주가 200포인트라는 말이다. 봄이 되면서 이말은 현실로 다가왔다.
나는 마지막 남은 나의 재산인 건물을 지키기위해 신용금고와 사투를 벌리고 있었다. 신용금고 금리는 30%가 되었다. 나는 이자를 부담할 현금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 건물은 경매로 넘어갈 처지가 되었다. 경매로 넘어가면서 금리는 40%가 되었고 나는 결국 그 건물마저 포기하였다. 완전히 파산한 것이다.
파산은 나의 정신건강을 가장 먼저 좀 먹었다. 나는 활기를 찾을 수가 없었으며 어디를 보아도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푸이에게 전화를 하기도 두려웠으며 나의 이런 파산을 그녀에게 설명할 용기도 없었다. 봄이 지나가고 여름으로 가고 있었는데 어디를 쳐다보아도 다시 재기할 건덕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전화가 왔지만 나는 전화를 받기가 두려웠다. 내 스스로를 자학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어느날 전화에서 나는 푸이에게 나를 잊어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울면서 전화를 끊었고 그 이후에도 전화가 몇번 왔지만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초라해진 나의 몰골을 더 이상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여름이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98년도 8월말에 나는 전에 있던 사무실을 찾았다. 그녀에게서 여러 통의 편지가 와 있었다. 마지막 편지에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지만 이제는 잊어야만 할 시간 같다는 눈물을 찍은 글이 들어 있었다.
투자자들은 적극적이었으며 나는 상당한 초기자금을 마련하여 캄보디아로 날라갔다. 밀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칠었다. 장비는 모두 한국에서 들여와야 했으며 숙련자들도 한국에서 날라와야만 했다. 초기에 현지인들과의 의사소통에 애를 먹었으나 다행히 비교적 성실한 현지 관리인을 구할 수 있어서 일은 생각보다는 빠르게 진척되어 갔다. 그러나 밀림의 개간이라는 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일은 아니다. 개간을 끝내고 씨를 뿌려서 수확을 한 후에 그것을 분말로 만드는 과정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으며 초기 계획보다는 훨씬 더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캄보디아 조직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 다음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의 본사 조직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해가 바뀌어 97년도 봄이 되었다. 경기 불황은 지속되었다. 환율은 조금씩 상승추세에 있었는데 이것은 해외투자를 하는 나를 어렵게 만들었다. 금융권에서는 7월 위기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조직 구성원들은 초기의 불협화음을 극복하고 원활하게 움직였다.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잘안하는 내 성격은 처음에 조직을 안착시키는 되는 어려움이 있었으며 다소의 불협화음을 만들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것은 시스템을 조기 안착시키는데는 도움이 되었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나의 성격은 일종의 모럴헤저드일 수도 있었다. 탑의 싫은 소리는 오히려 정확한 업무지시일 것이고 직원 입장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편했을 것이다. 말을 아끼는 내 성품과 스스로 움직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오히려 저들을 불편하게 하였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직원들은 나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나는 직원들이 나를 이해해주는 것이 적이 안심이되면서도 지시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나의 직무태만이 미안하기도 하였다. 나는 인생에 있어서 일이라는 것이 사랑만큼 귀중하고 재미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눈을 뜨나 감으나 끊없이 떠오르는 그녀의 얼굴처럼 그렇게 일은 사랑하여야 인생은 유쾌하다. 만약 그 일이 재미가 없으면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경기가 쉽게 풀리지 않자 자금분야는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초기 자기자본 규모가 많지 않은 상태였고 경기가 불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자 투자자들은 서서히 나의 곁을 떠나갔다. 나는 하루의 반나절을 은행이나 금융기관에서 보내는 일이 잤아졌다. 금융기관 종사자들에게 나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실적을 원했다.
일이 바빠질수록 푸이와의 대화시간은 줄어들어 갔다. 대략 두시간 정도의 시차가 났는데 이것은 오히려 나에게는 편하였다. 밤 11시에 일을 끝내고 전화를 하여도 푸켓은 밤 9시이기 때문이다. 푸이와 나 모두 영어실력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화를 하면 할수록 영어는 늘어갔다. 어차피 영어는 나의 사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가을로 넘어가는 어느 날이었다. 초가을치고는 음산한 바람이 거리를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푸이의 목소리가 힘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냐고 왜 그리 힘이 없냐고 물어보자 그녀는 아버지가 요즘 울적해 하신다고 하였다. 언제나 쾌활하고 호탕한 성격의 아버지라 나도 걱정이 되었다. 사업이 잘 안되어서 그러시는 것 같다는 푸이의 말을 들어면서 요즘 태국경제가 좀 안 좋나보다 생각했다. 집안 일에 별로 걱정을 하지 않는 푸이의 평소 성격으로 보아, 아버지 사업이 많이 안좋은가 보다 생각했다.
태국은 그 해 여름에 IMF 관리체제에 들어갔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으나 한동안 푸켓에 있는 푸이가 걱정이 되었다. 가을이 깊어가는 찬바람부는 이른 새벽에 갑자기 그녀가 걱정이 되어 전화를 걸었다. 꿈이 좋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나는 다른 나라의 IMF 기사를 많이 보긴하였으나 외환위기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3일동안 내리 전화를 하였지만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태국과 관련된 이전 뉴스들을 모두 살펴보았지만 도대체 이 외환위기라는 존재를 정확히 알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왜 전화는 받지 않는 것일까? 집에 아무도 없단 말인가?
3일째 되는 날 밤에 집으로 전화가 왔다. 푸이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놀라며 물었고, 푸이는 곧 말에 울음이 섞여 나왔다.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아버지가 결국 파산을 하여 집을 버리고 친척집으로 이사왔다는 이야기였다.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한사코 오지 말라고 말리는 그녀 말을 무시하고 나는 푸켓행 비행기를 예약하였다.
자금 사정이 넉넉치 않아서 푸이에게 무엇인가를 해줄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통받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사정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 해 11월초에 비행기가 예약되었고 나는 많지는 않지만 작은 돈을 마련해서 푸켓으로 날라갔다.
푸켓의 밤은 전에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 휘황하던 밤거리는 훵하니 비어 있었으며 관광객들도 초라해 보였다. 텅빈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느낀 작은 공포는 점점 더 크기를 더하면서 나를 압박하였다.
다행히 푸이의 얼굴은 그리 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언제나 밝은 얼굴에 분위기 있는 눈빛, 가끔 익살스럽게 변하는 입모양은 그대로였다. 반가운 모양이다. 나도 반가웠다. 무척 걱정을 하였는데 다행이었다.
한국은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지만 푸켓은 여전히 한여름의 열기로 타오르는 더운 날이었다. 오랬만에 잡아보는 손은 가슴을 떨리게 하였다. 인간은 참으로 오묘하다. 그냥 사람의 손인데 왜 푸이의 손을 잡을 때는 나의 손은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까? 마치 손바닥에 있는 신경세포 하나 하나가 살아나서 그녀 손세포 하나 하나를 탐닉하듯이 돌아다니는 것 같다. 이런 느낌을 그녀는 알까? 아니 그녀도 나처럼 같은 느낌일까?
그날 밤 그녀는 집으로 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나는 수차 집에 가야한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갈려고 하지 않았다. 오늘 집에 가버리면 내가 사라져버릴 것 같아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최근 그녀의 가정을 괴롭힌 경제적인 문제의 깊이를 조금씩 이해할 것 같았다. 언제나 당당하고 자존심 강했던 그녀가 풀이 죽어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우리는 썰렁해져 버린 그 푸통거리를 밤새도록 헤매며 돌아 다녔다. 번화가의 불빛이 싫어지면 해변으로 나가서 모래사장을 마음껏 뛰어 다녔다. 앞서 달리는 그녀를 쫒아갈 때 바다 바람에 실려오는 그녀의 사과향기가 좋았으며, 가까이 있을 때 느껴지는 간지러운 그녕의 머리카락, 여전히 나를 즐겁게 하는 그녀의 목소리. 그날밤 우리는 오랬동안 만나지 못했던 것을 분풀이라도 하듯 그렇게 푸켓의 밤거리를 쏘다녔고, 술을 마셨고, 때로는 밤새 문을 여는 악세사리 가게에서 물건을 흥정하며 즐거워했다.
푸켓에서의 하루 하루는 너무나 시간이 빠르다. 푸켓으로 날아온지 4일은 후딱 지나가 버렸다. 나는 몇푼 안되는 돈이지만 그녀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건넸고, 그녀는 꼭 갚겠다는 어색하면서도 귀여운 표정을 내게 보였다. 낮에 그녀가 학교에 나가면 무료하였으므로 나는 한국에 전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큰 일은 없어 보였는데 자꾸 은행일이 걱정이 되었다. 주로 내가 담당하던 일이었으므로 없는 동안에 작은 불상사라도 생길까봐 전전긍긍하였다.
그날 밤 어쩐 일인지 푸이가 내 방을 보고 싶어 했다. 오래 사귀었지만 그녀는 결코 내 방에 오려고 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녀의 그런 절제를 몹시도 사랑했었다. 그런데 그 날 밤은 웬일인지 초저녁부터 내 방에 가보고 싶어 하였다.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한 그런 마음으로 어색하게 방에 들어왔다. 그녀 또한 몹시도 어려워하고 어색해 했다. 나는 어색한 기분을 없애려 창문을 열었다. 커피를 한잔씩 나누면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는 약자들의 만병통치약이다.
별로 할일이 없었으므로 CNN 뉴스를 틀어 놓고 잡담을 만들어가고 있었는데 CNN에 김영삼 대통령이 나왔다. 나는 별일이다 싶어하며 무심코 지나치는 눈길에 IMF라는 글귀가 들어왔다. 같이 TV를 응시하던 푸이도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화면에는 힘없어 하는 대통령과 기자들의 소란스러운 질문들을 방영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국이 IMF 관리로 들어간단 이야기야?"
"응 그런 것 같은데?"
이건 무슨 말인가? 도대체 왜 한국이 IMF 관리체제로 들어간단 말인가? 한국으로 전화를 하였다. 회사에 남아있는 직원들은 없었다. 김부장 집으로 전화를 했다. 부인이 전화를 받았다. 김부장은 나에게 계속 전화를 하다가 안되어서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IMF가 진짜냐고 부인에게 묻자 부인도 지금 방송을 보았다고 했다.
푸이는 흐름한 불 빛 속에서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는 페레그린 증권 황부장에게 전화를 했다. 그동안 나는 상당한 자금을 주식투자에 넣어 놓고 있었다.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황부장은 말이 없었다.
"사실대로 말해 주십시오. 저 지금 푸켓에 있습니다"
" 그냥 편안하게 당하자고요...어차피 주식은 휴지나 다름 없습니다....다같이 망한겁니다.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고통이지만 방법은 없습니다...."
그날 밤은 고통이었다. 그 호텔방에서 푸이와 나는 알수없는 미래에 대한 공포와 반복되는 같은 말들을 뇌까리며 아침을 맞았다. 유일한 피난처는 술이었는데 술을 마셔도 취기가 돌지 않았다.
밤이었고 한국으로의 전화도 잘돼지 않았으며 아는 것도 별로 없었다. 푸이는 나의 회사에 대한 걱정을 되풀이 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보았던 아버지 회사에 일어난 일들을 나에게 전달하려고 애를 썻고, 나는 애써 그 이야기가 나의 회사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하곤 하였다. 푸이에게 집으로 들어가라고 말하였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사실 나도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으며 혼자 있기에는 너무나 두려운 밤이었다.
한국으로 귀국하려는 사람들이 폭주해서 어렵게 어렵게 비행기표를 구하여 한국행을 탔다. 그녀는 퉁퉁부은 눈으로 나에게 웃을을 지으려고 애를 썻고 나는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희망을 주려고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한국에 왔지만 상황은 더욱 암울하였다. 받아 놓은 어음은 현금화할 수 없는 휴지가 되어 있었으며 자금융통을 위한 은행 담당자는 만날 수조차 없었다. 몇몇 금융기관들은 예금인출 사태를 우려하며 경찰관을 배치하기 시작하였으며, 나는 밀려오는 채권자들에게 그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밖에 할말이 없었다. 우리는 그 시절이 금방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나는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사무실을 지켰지만 해야할 일도 할수있는 일도 없었다.
주식은 끝없이 하한가를 쳤으며 자금화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아버지에게 자금지원을 요청할까를 몇번 생각하였지만 그렇게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다함께 망했으므로 나 또한 같이 망한대로 있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 결론이었다. 댐이 무너져 내리는데 모래 포대 하나로 막을 수는 없었다. 물난리가 난 것이고 내가 할수있는 것은 물난리에서 살아남는 일밖에 없었다. 모든 재산을 다 떠나 보내고 그러나 살아 있다면 희망은 보일 것이다. 그것이 내일일지 일주일 후일지 아니면 일년 후일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암울한 겨울에 결국 나는 캄보디아 프로젝트를 남에게 넘기고 사무실을 정리하였다. 봄이 되었지만 사태는 해결의 기미가 없었다. 외국계 "스티브마빈"이라는 사람은 트리플 투를 떠들고 다녔다. 환율 2000원, 금리 20%, 주가 200포인트라는 말이다. 봄이 되면서 이말은 현실로 다가왔다.
나는 마지막 남은 나의 재산인 건물을 지키기위해 신용금고와 사투를 벌리고 있었다. 신용금고 금리는 30%가 되었다. 나는 이자를 부담할 현금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 건물은 경매로 넘어갈 처지가 되었다. 경매로 넘어가면서 금리는 40%가 되었고 나는 결국 그 건물마저 포기하였다. 완전히 파산한 것이다.
파산은 나의 정신건강을 가장 먼저 좀 먹었다. 나는 활기를 찾을 수가 없었으며 어디를 보아도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푸이에게 전화를 하기도 두려웠으며 나의 이런 파산을 그녀에게 설명할 용기도 없었다. 봄이 지나가고 여름으로 가고 있었는데 어디를 쳐다보아도 다시 재기할 건덕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전화가 왔지만 나는 전화를 받기가 두려웠다. 내 스스로를 자학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어느날 전화에서 나는 푸이에게 나를 잊어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울면서 전화를 끊었고 그 이후에도 전화가 몇번 왔지만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초라해진 나의 몰골을 더 이상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여름이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98년도 8월말에 나는 전에 있던 사무실을 찾았다. 그녀에게서 여러 통의 편지가 와 있었다. 마지막 편지에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지만 이제는 잊어야만 할 시간 같다는 눈물을 찍은 글이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