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6일-앙코르 왓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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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6일-앙코르 왓으로 가는 길

필리핀 5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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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을 타고 50년 쯤 전으로 온 것 같은 국경 풍경. 아이들이 모두 맨발이다.


손목시계의 알람을 4시에 맞추었는데 눈을 뜨니 3시다. 세상은 아직 짙은 어둠의 장막에 싸여 있다. 다시 잠을 청했다 눈을 뜨니 5시다. 부랴부랴 배낭을 챙기고 체크 아웃을 하고 택시를 잡아 탔다. 택시운전사가 한국어를 조금 할줄 안다. 의정부에서 2년 동안 일을 했었단다. 그때 번돈으로 택시를 마련한 걸까?
북부터미널에 도착하니 5시 40분이다. 미터기는 80몇밧이었는데 90밧을 줬다. 마침 6시에 출발하는 아란 야프라뗏(줄여서 '아란'이라고 한다) 행 버스가 있어서 부리나케 표를 끊고 승차한다.
버스 안은 현지인 일색이다. 출근하는 직장인과 등교하는 학생들로 인해 만원이다. 서서 가는 사람도 여럿 있다.
4시간 여를 달린 끝에 아란에 도착했다. 버스 터미널 옆 식당에서 국수로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한다. 한 그릇에 25밧인데 먹을만 하다.
식사를 마치고 뚝뚝을 타고 캄보디아 국경으로 향했다. 2001년 봄에도 지금처럼 아란에서 뚝뚝을 타고 캄보디아 국경으로 가서 도보로 국경을 넘은 적이 있다. 그런데 몇 년 사이에 국경 주변이 많이 변했다. 캄보디아와는 어울리지 않는 최신식 빌딩이 여러 채 서 있다. 카지노 건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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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란 시외버스 터미널 주변(멀리 휘적휘적 걸어가는 필리핀의 뒷모습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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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국경으로 향하는 뚝뚝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비자 창구에서 비자를 받고 잠시 기다린다. 씨엠리업까지 택시를 함께 타고 갈 일행을 구하기 위해서다. 국경에서 씨엠리업까지 가는 택시는 대당 1,000밧이다. 정원 4명을 채우면 그만큼 1인당 요금이 줄어든다. 아란에서 캄보디아로 넘어오는 여행자들은 대부분 국경에서 비자를 받으므로 이곳에서 기다리면 일행을 구할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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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출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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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왓을 본딴 아치가 있는 캄보디아 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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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을 받고 캄보디아 비자 신청을 대행해주는 공무원 아자씨들


10여분을 기다린 끝에 한국 여성 두 분을 만났다. 자, 이제 출발이다. 3년 전에는 국경에서 씨엠리업으로 가는 차편은 트럭과 미니버스 2가지 뿐이었다. 택시는 최근에야 운행하기 시작했다.
3년 전, 나는 방콕에서 늦장을 부린 탓에 오후가 되어서야 국경에 도착했다. 국경을 넘어 비자를 받고 보니, 외국인 여행자를 상대로 하는 미니버스와 트럭들은 이미 모두 출발해버린 뒤였다. 트럭과 버스는 씨엡리업까지 6시간 정도 걸린다. 때문에 너무 늦게 출발하면 씨엡리업에 밤이 되어서 도착하므로 정오 무렵에는 출발을 했다.
나는 현지인을 가득 태우고 막 출발하려는 트럭을 겨우 불러세울 수 있었다. 영어가 안 통해서 손짓 발짓을 동원하여 겨우 요금을 협상한 후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 방금 폐차장에서 끌고 나온 것처럼 낡은 트럭은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길을 30여 분쯤 달리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펑크가 난 것이었다.
운전사는 지나가는 차를 불러 세우더니 자신의 트럭과 승객들을 길 한복판에 버려두고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한참 뒤에 사라진 방향으로부터 다른 차를 타고 돌아온 그의 손에는 타이어가 들려 있었다. 예비 타이어가 없어서 가까운 마을에 가서 타이어를 구해 온 것이었다. 타이어를 교체하고 나니 어느새 사방은 막막한 어둠에 포위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날따라 유난히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던 나는 나를 제외한 현지인들이 한 통속이 되어 강도로 돌변해버리지는 않을지,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돈과 귀중품을 강탈한 뒤 달리는 트럭에서 나를 내던져버리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잔뜩 움추린 채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차창 밖에는 마치 나를 집어 삼키려는 악마의 아가리처럼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암흑의 세상만이 나와 동행하고 있었다.
아, 내 평생 그렇게 긴 여행은 처음이었다. 씨엠리업으로 가는 길은 왜 그렇게 먼지, 그리고 무슨 놈의 검문소은 그리 많은지, 30분마다 나타나는 검문소에서 1시간씩 서 있기 일쑤였다.
과연 이 트럭은 씨엡리업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이 길의 끝에 씨엠리업이라는 지명이 존재하고는 있는 건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시지푸스의 여행처럼 암담하고 지루한 시간들이 사정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마침내 무사히 씨엡리업에 도착해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의 문을 두드렸을 때는 새벽 2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잠의 딱지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눈을 비비며 문을 열어주던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은 그 시각에 도착한 나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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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쉬는, 그러니까 일종의 휴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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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자 숙소가 모여있는 스타마트 옆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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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게스트 하우스의 에어컨 더블룸


씨엠리업으로 가는 도로 상태는 여전히 엉망이었다. 군데군데 커다란 웅덩이가 패여 있어서 차는 시속 40킬로미터를 넘지 못했다. 하지만 트럭이나 미니버스에 비해 택시는 확실히 편리한 운송수단이었다. 국경을 출발한지 3시간 만에 씨엡리업에 도착했다.
함께 택시를 타고 온 두 여성은 롱 라이브 게스트하우스에, 우리는 걸리버 게스트 하우스에 각각 여장을 풀었다.
걸리버는 객실 상태가 조금 낡긴 했지만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한글로 된 여러 가지 정보(저렴한 음식점, 한글을 사용할 수 있는 인터넷 카페, 쇼핑 요령, 물건 흥정 요령 등)를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내일 앙코르 유적을 감상할 교통편으로 뚝뚝을 예약한 뒤, 걸리버 게시판에 있는 약도를 참고하여 올드마켓까지 걸어갔다. 대부분의 길은 포장이 안 된 채 시뻘건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올드마켓 주변만 포장이 되어 있었다. 건물들은 초라했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왠지 힘이 없어 보였다.
캄보디아는 야만과 문명의 역사를 한 몸에 지니고 있는 독특한 나라이다. 무려 330여만 명을 살육한 킬링필드의 악몽을 지닌 나라이자, 앙코르 왓으로 대표되는 찬란한 유적을 간직하고 있는 나라가 캄보디아다. 세상에 이처럼 완벽하게 상반된 역사를 간직한 나라는 그렇게 흔치 않다. 그래서일까, 현지인들의 얼굴에서는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올드마켓 안쪽에 한국의 재래식 시장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음식 좌판이 여럿 있다. 현지인들과 엉덩이를 부딪히며 좌판에 끼어 앉아서 비빔국수와 뽀삐야를 먹었다. 맛이 썩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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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이서 앙코르 유적을 관람할 때 가장 편리한 교통편인 뚝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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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마켓 주변의 포장된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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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마켓 주변의 열쇠 복사하는 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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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광고판.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가 없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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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소. 오토바이나 뚝뚝에 넣을 연료를 이렇게 병에 담아서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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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유적지에서는 일본어를 가이드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최근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많아지면서 한국어를 배우려는 현지인들도 늘고 있다. 국가에서 치르는 시험을 통과한 가이드가 되면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과일 가게는 열 살 남짓한 여자아이들이 장사를 하고 있다. 몇 종류의 과일을 사면서 흥정을 해보니 꼬마 숙녀들의 장사 수완이 보통이 아니다. 일일이 잘 익는 놈으로 골라서 주고 덤도 준다.
올드마켓 바깥으로 나오니 현지인을 상대로 하는 식당이 몇 있다. 조리가 된 요리를 여러 가지 진열해 놓고 손님이 골라먹는 시스템이다. 손님이 가장 많은 식당에 자리를 잡고 요리 3가지와 밥을 시켰다. 요리 한 가지에 2,500리엘, 밥은 1,000리엘(약 300원)이다.
음... 음식 맛이 상당히 좋다.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처럼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 앞으로 씨엡리업에 있는 동안 이 집을 자주 이용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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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마켓의 현지인 식당. 값도 저렴하고 맛도 끝내준다.


날이 저문 뒤 돌아오는 길은 상당히 어두웠다. 가로등이 거의 없고, 도로 주변에 간간히 서 있는 건물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도 전력 사정이 안 좋아서 그런지 무척 흐릿하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침대 위에 곧바로 쓰러진다. 하루 종일 차를 타고 이동하느라 시달렸더니 무척 피곤하다. 씨엠리업까지 오는 길은 멀고 힘들었지만, 꿈나라로 가는 길은 금방이었다.

5 Comments
체리맛초코 2004.10.14 03:30  
  개인적으로 필리핀님의 글을 보고 있으니까 많은 생각이 나네요. 요즘 몇몇분들의 공격적인 글때문에 조금 않좋았는데...그냥 좋네요..여행기...많은분들이 느끼시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내일 2004.10.14 10:24  
  정말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후속편도 될수 있으면 빨리 올려 주세요
똥이 2004.10.14 13:21  
  너무 재미나게 읽었어요  ...^^
곰돌이 2004.10.14 13:22  
  필리핀님 지금 모습을 보면 3년전에 그곳(캄보디아) 분들이 동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으힛]]
글고 이건 절대 태클 아닙니다.
캄보디아의 학살로 수백만명이 죽었다는 말은 후에 다른나라에 의해서 조작된(과장된) 것인데... 많은분들이 예전에 들은데로 그대로 믿는 것 같습니다. 하기야 역사는 이긴자의 기록이지요....
룰루랄라 2004.10.14 20:17  
  필리핀님 보라색 바지 엄청 편해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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