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5일-카오산에서 보낸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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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일-카오산에서 보낸 하루

필리핀 7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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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모범생으로 사는 삶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가끔은 정도에서 벗어난 일들을 저지르며 살고 싶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탈과 해프닝은 한 모금의 청량음료처럼 삶의 활력제가 된다.
아침에 눈을 뜨자 어젯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오늘 새벽까지 계속되었던 일련의 사건들이 떠올라 입꼬리가 춤을 춘다. 한국에서는 감히 시도해볼 수 없는 일들을 저질러 보는 것, 그 또한 떠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쾌락이다.
침대에 누워 잠시 뒹굴거린다. 내일은 아침 일찍 북부터미널로 가서 캄보디아 국경과 가까운 아란 행 버스를 탈 예정이다. 그러나 오늘은 별다른 일정이 없다. 어떻게 하면 오늘 하루를 심심찮게 보낼 수 있을까. 잠시 궁리하다가 카오산 탐험을 떠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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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자들에게는 제2의 고향 같은 카오산


카오산 탐험이라고 표현하니 거창해 보이지만, 실은 카오산의 골목골목을 누비면서 새로 생긴 업소들을 구경하는 일이다. 카오산에는 수시로 없어지고 새로 생기는 업소들이 꽤 된다. 카오산 탐험을 하면서 그 업소들을 구경하다보면 카오산의 유행과 흥망성쇠를 엿볼 수 있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숙소를 나선다. 우선 람부뜨리 거리의 노점 죽집에서 아침을 먹는다. 카오산에서 묵을 때마다 이 집에서 아침식사를 해온 지가 벌써 몇 년째다. 죽 한 그릇을 말끔하게 비운 뒤, 가까운 마사지 샾으로 얼굴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카오산에는 저렴한 가격에 얼굴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샾이 여러 군데 있다. 얼굴 마사지는45분짜리 패키지 상품이 250밧이다. 얼굴의 피지를 제거하고 몇 가지 영양 크림을 발라주고 오이 등으로 마사지를 해준다. 그런데 마사지 중간에 추가로 스페셜 마사지(물론 약간 비싸다)를 하라고 자꾸 권하는 게 좀 성가시다. 그럴 때는 살풋이 웃으면서, 하지만 목소리는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표시하면 큰 문제는 없다.
마사지사가 하도 심하게 모공의 이물질을 짜내는 바람에 얼굴이 무척 화끈거렸다. 거울을 보니 마치 여드름쟁이처럼 얼굴이 울긋불긋하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가라앉을 것이다.
마사지를 받고 나오자, 아침을 너무 가볍게 먹어서인지 다시 배가 고팠다. 람부뜨리 거리의 노천 식당에서 밥과 태국 요리 몇 가지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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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집 옆에서 도우넛을 파는 아저씨

여행을 떠나오면 먹고, 마시고, 자고의 연속이다. 아침을 먹고 나면 점심에 뭐를 먹을지를 걱정하고, 점심을 먹고 나면 저녁에 뭐를 먹을 지가 가장 큰 걱정이다. 온종일 먹는 생각만 하다 보면 마치 먹기 위해서 여행을 온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사람은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인가,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인가.
점심을 먹고 근처 노점에서 과일 쉐이크를 사먹었다. 과일 쉐이크를 파는 중년의 사내는 이빨이 거의 다 빠지고 몇 개 안 남아서 약간 희극적인 인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쉐이크 맛은 괜찮았고 가격도 저렴하다. 다른 곳에서는 쉐이크 하나에 20밧 정도 하는데 이곳은 10밧이다.
배는 부르고 입에는 시원한 쉐이크까지 한 봉지 물고 있으니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 이제 무얼 해야 하나. 갑자기 다음 일정이 막막하다. 오늘 오후쯤 어디론가 떠나는 교통편에 몸을 실으면 딱 좋은데...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기운을 차려 카오산 탐험을 계속하기로 한다.
카오산 로드... 여행자의 천국. 동남아 여행의 베이스 캠프.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 이 국적불명의 거리는 이미 수많은 수식어로 치장되어 있다. 카오산은 세계의 다른 어느 곳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확실히 다른,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마치 알리바마와 40인의 도적들의 보물창고처럼, 온갖 신기한 것들을 품 안에 감추고 이방인들을 유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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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산 거리에서 그림을 파는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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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e in Thailand 군것질 꺼리. 맛은 달거나 혹은 아주 달거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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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에 유행했던 색소 음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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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의상을 한 무희들의 모습을 담은 거리의 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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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어와 영어가 섞여 있는 여행자 레스토랑의 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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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액자를 파는 상점. 1개에 90밧.


카오산에는 싸구려 도미토리가 있고 고급 호텔이 있고 길거리 음식이 있고 고급 레스토랑이 있고 최신 유행이 있고 거지 패션이 있고 사기꾼이 있고 멋쟁이가 있고 마약중독자가 있고 게이가 있고 그것들이 한데 어울려 만들어 내는 온갖 불협화음이 있다. 그렇게 인간의 상상으로 가능한 모든 형태의 삶과 희노애락이 존재하는 곳, 그곳이 바로 카오산이다.
카오산에서는 단돈 3,000원으로 하루 생활이 가능하다. 카오산에서는 그 어떤 가짜 신분증이라도 손쉽게 만들 수 있다. 카오산에서는 내일 당장 전세계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는 항공권을 구할 수 있다. 카오산에서는 지구 저 반대편, 지도상에서만 존재하던 나라에서 날아온 사람을 애인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아무런 미련도 없이 그 애인과 작별인사를 나눌 수도 있다. 인종과 문화의 거대한 정류장. 보헤미안과 집시와 베가본드의 환승 구역.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방콕으로 다가갈 때마다 항상 카오산에 대한 기대로 셀레인다. 그동안 카오산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곳의 거리와 상점들과 사람들은 여전할까. 또 어떤 신기한 인종들이 그 거리를 누비며 맥주를 들이키고 바나나 팬케잌을 먹으며 헤나를 새기고 있을까.
카오산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단골 바로 달려가서 시원한 맥주를 한 잔 들이키며 조용히 속삭이리라. 헬로우 카오산... 그러면 등 뒤에서 누군가 역시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화답할지도 모른다. 웰컴 백 프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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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산의 여행자 레스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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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인들과 가난한 여행자에게 인기 만점인 노점 식당


카오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는 카오산의 맛과 냄새와 불빛들이 그리워진다. 그러나 이미 카오산의 일부가 되어 있을 때에는 어느새 카오산에 대한 미련과 그리움은 남아 있지 않는다. 그 안에 있을 때보다 그 밖에 있을 때가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곳, 눈으로 볼 때보다 머리로 느낄 때 더욱 황홀한 모습인 곳.
한동안 쏘다녔더니 다리도 아프고 해서 잠시 쉴 겸 파인애플 한 봉지와 참치 크래커 한 통을 챙겨 들고 방람푸 선착장 부근의 작은 공원으로 갔다. 짜오프라야 강변과 마주하고 있는 공원에는 외국인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고, 현지인들 몇이 나무 그늘 아래 벤취에 앉거나 누어서 한낮의 더위를 피하고 있다.
우리(나와 와이프)도 벤취를 하나 차지 하고 앉아 파인애플과 참치 크래커를 주섬주섬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여행과 그 여행 이후의 삶에 대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 앞에는 짜오프라야 강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그 황토빛 강 위로 수상 버스 몇 대가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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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오프라야 강변 풍경


저녁을 먹기 위해서 동대문에 들렸다. 나도 얼마 전에야 안 사실이지만, 태국에서 해산물을 가장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은 바로 방콕이다. 랍스터와 같은 고급 품목이 아니라면, 카오산은 아주 저렴한 가격에 맛있는 해산물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동대문에서도 해산물 요리를 맛볼 수 있는데, 내가 즐겨 먹는 메뉴는 옥돔구이와 새우구이이다. 옥돔은 버터를 살짝 바르고, 새우는 아무 것도 바르지 않고 숯불에 구워서 주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동대문에서는 옥돔구이 한 마리에 100밧인데, 꼬 사무이나 푸켓 같은 바닷가에서는 200밧 이상이다. 새우도 바닷가가 거의 2배 이상 비싸다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해산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방콕에서 실컷 먹는 게 현명한 선택이다.
저녁을 먹다가 태사랑에서 글을 가끔 접했던 우주제국천황님(태사랑 아이디)을 만나서 술판이 벌어졌다.(여행 중에 만난 어떤 분은 카오산에만 20일 가량 있었다고 했다. 내가 왜 그렇게 오래 있었냐고 물었더니, 이제 어디론가 떠나야지 하고 마음 먹으면 그날 밤에 술판이 벌어지고, 다음날 정말 떠나야지 하고 마음 먹고 있으면 또 다른 사람과 술판이 벌어지고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이게 카오산의 매력이자 함정이다.)
술잔이 몇 번 돌기도 전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 위에서 물의 신들이 양동이로 들이붓는지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열대지방 특유의 장대비였다. 금세 카오산 거리가 물바다로 변했다. 순식간에 많은 양의 비가 쏟아져서 하수구가 감당을 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어차피 이 비는 30분 내에 그칠 것이므로. 그리고 오늘 밤 우리가 지친 영혼을 뉘어야 할 숙소는 걸어서 1분도 안 걸리는 거리에 있으므로.
7 Comments
체리맛초코 2004.10.14 03:21  
  선리플 후감상...^^ 그렇게 기대하던 필리핀님의 글이 올
라왔군요.....감사합니당.`
바닐라스카이 2004.10.14 03:46  
  어-;; 저 짜오프라야 강변에 있던 청년 아직도 있군요-;;
짜쉭 오래도 있는 구나;; - _ - ㅎㅎ..
아 ~ 필리핀님 왜 일케 올만에 글 올리세요 . ㅎㅎ
곰돌이 2004.10.14 13:11  
  저도 먹고 맛사지 받고  돌아다니고 자고.... 살기위해 먹는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살아야 겠다는...
필리핀 2004.10.14 13:16  
  제 여행기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이사 문제에, 지방에 모임이 있어서 며칠 다녀오는 등 좀 바빴습니다. 앞으로도 해결할 일들이 몇 남아 있지만, 암튼 최대한 틈을 내어 속속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부끄]]
아부지 2004.10.14 17:17  
  우..정말 가고싶군여..ㅠ.ㅜ
곰돌이 2004.10.14 17:48  
  내공이 팍팍 느껴집니다.[[원츄]] 기대기대^^;
진영화 2004.10.14 21:56  
  카오산은 카투만두의 타멜로드,중국의 양수오와 함께 배낭여행객들을 내고향처럼 편안하게하는 그무엇인가가 있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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