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8일-내 마음 속의 앙코르 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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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8일-내 마음 속의 앙코르 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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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시간의 알이 솟아오르고 있는 앙코르 왓


오전 5시, 일출을 보러 가기 위해서 일어났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세상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시커먼 어둠에 갖혀 있다. 전기 사정이 안 좋은 나라라서 더욱 어둡게 느껴진다.
다른 투숙객이 깰세라 조심스레 숙소 문을 열고 나오자 언제 왔는지 씽끗이 기다리고 있다. 참 부지런한 친구다. 씽끗이 모는 뚝뚝을 타고 거리로 나서자 새벽 바람이 약간 쌀쌀하다.
우리처럼 일출을 보러가는 관광객들이 제각각의 교통수단을 타고 몰려나와 거리를 메우고 있다. 앙코르 유적지로 가는 도로의 맨 앞에는 자전거가 달리고 있다. 덥수룩한 턱수염을 휘날리며 백인 청년 몇이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다. 아마 그들은 우리보다 30분은 일찍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도착도 30분은 늦을 것이다.
뚝뚝 부대와 오토바이 부대가 자전거를 추월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뚝뚝 부대는 친구나 연인, 혹은 부부 사이로 보이는 커플을 태우고 있다. 아, 저기 덩치 큰 서양인 아저씨 하나만 달랑 태운 뚝뚝도 눈에 띈다.
오토바이 부대는 솔로 여행자들 차지다. 그런데 저기 나란히 달려가는 두 대의 오토바이에 나누어 탄 남녀는 연인 사이처럼 보이는데 왜 뚝뚝을 타지 않았을까? 오토바이 2대보다 뚝뚝 한 대가 값도 저렴하고 훨씬 편한데???
뚝뚝과 오토바이 부대를 따돌리며 택시들이 쌩~ 하니 지나간다. 택시는 주로 일본인 OL(오피스 레이디의 준말로 일본식 영어)들이 두어 명씩 타고 있다.
택시의 뒤를 이어 가르릉 가르릉 둔중한 엔진소리를 내뱉는 버스들이 단체 관광객을 싣고 줄지어 지나간다. 앙코르 유적지의 단체 관광객은 80퍼센트 가량이 한국인이다. 나머지 20퍼센트는 나이 든 비영어권 백인과 중국인이 차지한다. 일본인은 단체로 다니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주로 2명씩 짝을 지어서 가이드를 고용해서 다닌다.
어두룩한 새벽길을 다양한 교통수단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달려가는 모습이 마치 아기 예수의 탄생을 맞으러 성지를 향해 가는 순례자의 행렬 같다.
앙코르 왓에 도착하자 동녘 하늘 위로 서서히 여명이 번지고 있다. 벌써 수많은 사람들로 입구가 북적인다.
우주의 자궁 속에서 막 태어난 2004년 9월 8일의 태양이 동쪽 하늘 위로 서서히 솟아오른다. 저 거대한 시간의 알이 오늘 하루 하늘 위에 머무는 동안, 지구는 또 어떤 생성과 파괴의 역사를 이루어낼 것인가.
일출을 보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한 뒤 본격적인 유적지 관광에 나선다. 오늘의 첫 방문지는 반띠아이 쓰레이. 주요 유적지 군에서 북동쪽으로 25킬로미터 정도 따로 떨어져 있는 곳이다.
뚝뚝은 한적한 시골길을 달려간다. 여행자를 태운 교통수단은 거의 보이지 않고 현지인들을 태운 자전거와 오토바이만 오가고 있다. 길은 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다. 길 주변에는 푸른 논이 펼쳐져 있다. 당장 뚝뚝을 세우고 성큼성큼 논 속으로 걸어들어가 풍경을 이루고 있는 존재의 일원이 되어 평생을 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평화로운 정경이 계속 이어진다.
반띠아이 쓰레이는 내가 좋아하는 앙코르 유적 중 한 곳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보존 상태가 좋고 건물들의 예술성이 뛰어나다. 반띠아이 쓰레이는 '여자의 城'이라는 뜻인데, 이름처럼 전체적으로 섬세하고 화사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반띠아이 쓰레이 관람을 마치고 반띠아이 삼레로 향한다. 반띠아이 삼레는 지난번에 왔을 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상당히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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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고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반띠아이 쓰레이


아는 이 중에 앙코르 유적지만 열 번 넘게 온 사람이 있다. 그가 말하길, 앙코르의 유적들은 올 때마다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이제서야 그의 말이 이해가 된다. 정말 앙코르의 유적들은 볼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란 참으로 어리석은 존재이다. 앙코르의 유적들은 수백 년 동안 줄곧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데, '나'의 심리 상태와 지적 수준에 따라서 이렇게 다르게 보이니 말이다.
오늘은 숙소로 가지 않고 유적지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하지만 씽끗은 집에 가서 점심을 먹어야 한다. 그렇게 한 푼이라도 아껴야 결혼자금을 모으지. 씽끗이 점심을 먹고 오는 동안 우리는 식사를 빨리 끝내고 앙코르 왓을 한번 더 볼 생각이다.
씽끗이 자신이 아는 식당이 있다고 앞장 서서 안내를 한다. 아마 우리를 데려가면 커미션을 받겠지. 어차피 다른 식당도 음식값은 비슷할테니 그가 소개하는 식당으로 가기로 한다. 그래야 씽끗이 커미션을 챙길 수 있을테니까. 음... 우리도 그의 결혼자금에 일조를 한 셈이다.
소문과는 달리 유적지의 식당은 별로 비싸지 않았다. 숙소 식당의 가격과 비슷한 편이다. 음식 맛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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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식당에서 먹은 볶음밥과 뽁음국수. 일단 푸짐해서 좋았다.


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먹기 위해 파인애플을 팔고 있는 노점으로 갔다.
"한 통에 얼마?"
"2,000리엘."
태국에서도 그 가격이면 사는데, 캄보디아는 태국보다 물가가 싼 나라니까 좀 깎아보자.
"1,000리엘에 주라."
"오케."
너무 쉽게 흥정이 끝났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아직 자본주의의 때가 덜 묻어서인지 흥정에 약하다. 태국 같았으면 한참을 실갱이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물을 사러 갔다.
"물 한 통에 얼마냐?"
"1달러."
읔, 뭐가 이렇게 비싸? 내 얼굴이 일그러지자 장사치가 재빨리 손가락 2개를 펼친다.
"2개에 1달러."
그래도 비싸다. 4개에 1달러 정도는 해야 태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3개에 1달러."
내가 여전히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자 가격이 계속 내려간다. 결국 원하던 가격에 물을 샀다. 참 재미있는 흥정 방법이다. 얼굴만 약간 찡그리고 있으면 가격이 내려가니까.
유적지 근처에서 엽서와 기념품 따위를 팔고 있는 꼬마들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값을 비싸게 부르다가, 관광객이 아무 말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가격이 내려간다. 최초의 가격은 인심 후한 여행객을 타깃으로 책정한 것 같다. 귀엽게 생긴 꼬마들이 애처롭게 칭얼거리면 마음이 약해져서 쉽게 물건을 사게 될테니까.
하지만 국제 구호단체들은 아무리 딱해 보여도 어린아이들에게서 물건을 사지 말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다. 애들에게서 물건을 사주면 부모들은 돈벌이 욕심에 계속 아이들을 거리로 내보내 장사를 시킨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교육의 기회를 박탈 당하게 되고, 결국 빈곤은 악순환된다. 대충 이런 논리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사탕이나 초콜렛과 같은 단 것을 주지 말도록 권하고 있다. 의료시설이 낙후하고 위생 관념이 약한 나라에서는 관광객이 무심코 건네준 사탕과 초콜렛이 충치의 치명적인 원인이 된다고 한다.
앙코르 왓을 보고 따 깨우, 따 프롬, 반띠아이 끄데이를 관람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하나라도 더 볼 욕심으로 바쁘게 이동하는데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더니 이윽고 소나기가 쏟아진다. 뚝뚝 지붕을 꿰뚫을 듯 엄청난 기세로 쏟아지는 빗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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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프롬은 폐허의 미학이 두드러진 유적지이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고 있자니 몸이 땅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것 같다. 비는 곧 그치겠지만, 더 이상의 유적지 관광은 어렵겠다. 오늘은 여기서 끝이다. 아쉬움이 많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틀은 너무 짧다. 다음에 와서는 한 일주일 정도 앙코르 유적들을 둘러보고 싶다. 그때는 이 돌덩어리들이 또 어떤 비밀스런 신화와 상상력을 머금고 내 마음 속으로 걸어 들어올지 기대가 된다.
올드마켓의 식당으로 씨엡리업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러 간다. 식당 앞에서 씽끗과 헤어진다. 하루치 일당과 약간의 팁을 쥐어주며 '빨리 결혼해라'고 인사말을 건넨다. 그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한다.
연달아 3일째 가니 식당의 모든 종업원이 우리를 알아본다. 한 종업원은 바나나 하나를 손수 까서 내 입에 넣어주다가 문득 옆에 있는 아내를 의식했는지 쑥쓰러운 미소를 짓는다. 그녀의 티 없이 순수한 행동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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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마켓 식당에서 먹은 마지막 만찬


캄보디아의 자랑은 앙코르 유적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리에서 문득문득 마주치는 뚝뚝 운전사와 식당 종업원들의 때묻지 않은 마음과, 그 마음의 연못에서 피어오르는 미소 한 송이가 캄보디아의 진정한 보물인 것이다.

3 Comments
그렇지뭐 2004.10.16 02:58  
  잘 보고 있습니다!
글이 참 명쾌하시네요.
사진은 너무 좋구요...
건강하세요..
주니애비 2004.10.16 09:51  
  볶음밥과 뽁음국수....어떻게 틀리던가요???
뽁음국수는 엄청스리 볶아 내온 느낌이...
크크~
필리핀 2004.10.18 19:34  
  뽁음국수-볶음국수의 오타입니다. [[무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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