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2일-꼬 피피에서의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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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2일-꼬 피피에서의 사색

필리핀 1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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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피피섬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보트트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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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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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모래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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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케익과 쉐이크를 파는 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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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팬케잌과 망고 쉐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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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피섬 골목 풍경

9월 12일-꼬 피피에서의 사색


숙소 때문에 아내와 다퉜다. 아내는 고물 선풍기가 끽끽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침대 매트리스가 푹 꺼져버린 300밧짜리 숙소가 영 불만이다. 조금 비싸더라도 쾌적한 숙소에 묵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나는 평생 살 집도 아니고 2~3일 묵을 곳인데 싼 게 최고 아니냐고 주장한다. 결국 나의 판정승으로 끝났지만 아내의 불만은 말끔히 해소되지 못했다.
좋은 숙소에 묵고 비싼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여행자를 종종 만난다. 어제도 커다란 랍스터 한 마리에 왕새우 네 마리, 게 두 마리, 생선 한 마리를 둘이서 해치우는 광경을 목격했다.
우리도 여행 초보자 시절에는 바닷가에 오면 랍스터와 새우로 포식을 하곤 했다. 바닷가에서는 해산물을 먹어야 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고, 해외여행을 왔으니 평소에 한국에서 먹어보지 못했던 별미들을 섭렵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몇 차례나 시식을 해보았지만, 입이 싸구려라서 그런지 랍스터가 별미라는 것에 좀체 동의할 수가 없었고, 결정적으로 방콕보다 두 배 이상 비싸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바닷가에서 해산물을 먹는 습관을 없애게 되었다.
일년에 한번 뿐인, 그것도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휴가를 와서 좋은 호텔에서 묵고 맛 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 비용만큼 실질적인 효용 가치를 얻느냐 하는 점에서는 의문이 든다. 바닷가에 왔으니까, 몸에 좋다니까, 남들도 다 이렇게 하니까, 이런 이유들로 별다른 고민 없이 관습을 추종하는 건 문제인 것 같다.
여행지에서 만난 서양인들은 개성이 독특하다. 지난번 여행 때 꼬 묵에서 같은 숙소에 묵는 독일인 커플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맞벌이를 하는 관계로 독일에서도 중산층 수준의 생활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허접한 숙소(화장실은 물을 부어야 오물이 내려갔고 천장의 선풍기는 녹이 잔뜩 슬어 있었다)에 묵느냐고 물었더니, 독일에서는 그동안 멋진 집에서 살았으니 여행지에서는 이렇게 허름한 곳에 묵어보는 것도 좋은 추억거리이지 않느냐고 대답했다.
여행지에서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각각의 얼굴만큼이나 그들의 생각과 행동도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거의가 비슷한 모습이다. 비슷한 헤어스타일(헤어클럽의 5천원짜리 컷트, 옆머리와 뒷머리를 바짝 당겨 친 스타일)에 비슷한 패션(무테안경에 목깃을 세운 골프 티셔츠에 베이지색 반바지에 짙은 색 샌들)을 하고 있다. 게다가 묵는 숙소(조식 뷔페가 제공되는 에어컨 룸)와 먹는 음식(랍스터, 새우, 스테이크)도 거의 비슷하다.
한국인들의 이런 성향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독재 정권(군사 정권)과 관련이 깊다. 독재 정권(군사 정권)은 개인의 독창성과 창의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다, 맨 앞에 나서지 말고 맨 뒤에 처지지도 말고 항상 중간만 해라, 남자들은 군대에 가기 전에 이런 소리를 부모나 선배로부터 한번씩은 들었을 것이다. 이것이 지난 40여 년 동안, 일제 감정기를 포함하면 무려 1백여 년 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정신적 모토였다. 끔찍한 일이다.
지난 세월의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로 인해 한국인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일에 서툴다. 집단주의에 따를 때 편안함을 느낀다. 내가 남보다 앞서가는 것도 싫지만 남이 나보다 앞서가는 것도 싫어한다. 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이런 사고방식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워진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음... 여행 와서 별 생각을 다한다. 그러나 몸은 비록 태국에 있지만 나 자신도 엄연한 한국인이고, 또 얼마 뒤에는 한국에 돌아가서 남은 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인지라 이런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다.
사람의 생은 되풀이 되지 않는다. 인생에 있어서 리바이벌이란 없다. 모든 것이 항상 처음이고 최초이다. 후회하면 늦는다. 남의 눈치 보다가는 나만의 인생을 살지 못하게 된다. 인생은 한번 뿐이다. 두 번 살지 않는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 자신이 좋다고 믿는 것, 그것을 밀고 나가야 한다. 내 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다.
태국 최고의 섬인 꼬 피피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보트 트립이다. 보트를 타고 꼬 피피와 주변의 섬들을 돌아다니며 스노클링을 하고 해변에서 휴식도 취하는 보트 트립은 보트의 종류에 따라 3가지로 나뉜다.
스피드 보트는 요금이 가장 비싼 대신에 빠른 속도로 이동하므로 쾌적하고 여유 있게 섬을 즐길 수 있다. 빅 보트는 빠르지는 않지만 보트가 커서 활동하기에 편하다. 롱테일 보트는 가장 저렴하지만 보트가 작고 모터의 소음이 심한 게 단점이다.
우리는 당연히 롱테일 보트를 신청했다. 점심 포함해서 일인당 400밧인데, 두 명에 700밧으로 합의를 봤다. 두 명이 여행할 때는 이런 점이 편하다. 머릿수를 무기로 할인을 받을 수 있으니까.
태국에는 투어 신청을 대행하는 여행사가 상당히 많다. 그 여행사들은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므로 말만 잘하면 할인은 어렵지 않다. 다만 항상 미소 띤 얼굴을 유지하는 게 좋다. 괜히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실랑이하다가 다툼이 일어나면 좋지 않다.
태국에서는 먼저 성을 내는 사람이 진다. 누가 옳고 나쁨을 떠나서 한 사람이 성을 내면 상대방은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판단하고 응징을 가해 오기 때문이다. 홈그라운드가 아닌 이상 항상 몸조심을 해야 한다.
롱테일 보트는 8명의 서양인과 2명의 동양인을 태우고 떠난다. 바다 위에서 바라보는 꼬 피피의 풍광은 환상적이다. 저 바위 뒤를 돌아가면 물의 요정들이 하프를 퉁기며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만 같다.
해변은 소문대로 많이 오염되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과 그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가 주범이었다. 다들 해변에 내리길 싫어하고 스노클링만 하려고 한다. 바다 속도 예전 같지가 않다. 산호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고 열대어 수도 많이 줄었다.
3군데의 스노클링 포인트를 거쳐 모기 섬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사공이 나눠주는 점심 도시락은 여전히 부실하다. 준비한 바나나로 배를 채운다. 식사 후에 다시 몇 군데의 해변과 스노클링 포인트를 방문했지만, 흥이 나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꼬 피피의 바다는 매력적이지 않다. 하지만 섬 자체의 아름다움은 여전하다. 하늘과 땅을 갈라놓는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 아름다움은 오래 간직될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놓인다.
투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다가 K씨를 만났다.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그도 어제부터 우리를 찾았다고 하는데 길이 어긋나서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K씨와 함께 툭 바베큐로 갔다. 어제의 청년까지 합세하여 다시 술판이 벌어졌다. 등 뒤에서는 꼬 피피의 바다가 출렁이고, 하늘 위에는 별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 내 인생의 어느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 갔다.

1 Comments
ankor 2004.11.24 09:33  
  저도 남부쪽으로 내려가고 싶은데... 앞으로는 일주일 이상의 긴(?) 시간을 빼기가 힘들것 같네요. 다음 이야기도 올려주세요 여행기라도 읽으면서 대리만족 할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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