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태국,캄보디아 배낭여행 18일- 꿈에 그리던 수상시장
17. 16일째(1월 22일): 칸차나부리 2일째(수상시장-제쓰박물관-시내)
아침 7시 수상시장으로 간다. 네덜란드인 부부 2명과 함께 자가용 승용차로 찾아간 플로우팅 마켓. 아, 태국에 오면서 늘 마음 속에 제 1번으로 두고 있었던 수상시장을 간다. 방콕에서 기사들은 내게 모두 2,000밧을 요구했었다. 그리고 너무 비싸다며 1,500밧(45,000원 정도)으로 가자고 하면 그러자고 약속까지 하자고 했는데, 결국 하지 못하고 이제야 그곳으로 간다.
다행히 투어는 나와 네덜란드 한 부부, 이렇게 세 사람만이 신청해서 편하게 승용차로 가게 되었다. 네덜란드인 부부는 내가 네덜란드 소년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둑에 구멍이 나 물이 새는 것을 발견하고 물이 더 이상 흐르지 않게 한 밤 내내 팔뚝으로 그 구멍을 막아 한 마을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하니, 야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탄성을 올렸다. 더욱이 우리는 몇 년 전의 히딩크로 네덜란드에 친숙함을 느끼고 있다고 하니 더욱 신기해 했다.
수상 시장에 가는 배를 탔다. 처음엔 이곳 시장이 모두 마치는 시간인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산하고 다니는 배도 없었는데, 차츰 폭이 5미터 정도 되는 미로처럼 여러 갈래로 난 수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정말 희한한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갔다. 시장은 차츰 번화해지고 있었다. 그대로 사진에서 보았던 보습, 아니 그보다 더 번화하고 형형색색의 상품들을 진열해 놓은 수로 옆의 수백 여 곳도 넘는 가게들, 수많은 과일을 가득 실은 노를 젓는 배들, 그리고 아예 장사하는 사람들과 관광객들에게 갖가지 먹거리를 만들고 아침까지 지어서 파는 그야말로 보트피플들이 때로 뱃머리를 부딪히기도 하고 서로 엉기어 밀려나기도 하면서 육지에서와 똑같은 장날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태국 담넛의 수상시장, 여기는 저들의 삶의 모습에다 최근엔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이제 순수 현지인보다 관광객들이 더 많이 찾는 번화가가 되어 버린 듯하다. 참으로 내가 그토록 바랬던 관광코스, 자칫 그냥 늘 머릿속으로 상상 속에 그리고만 있었을 수상시장을 내 여행의 막바지에 찾아볼 수 있었으니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돌아오면서 그들의 수공예품 전시관을 관람했다. 수십 년을 조각해야 가능할 것 같은 나무 조각품들, 코끼리 한 마리 사고 싶었지만 내 이번 여행은 선물이 없다는 처음 약속처럼 나는 아무 것에도 손대지 않았다.
겟하우스에 돌아와 다시 전화를 했다. 퉁명스런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는데 1분도 통화를 안 한 것 같은데 2분이라고 우긴다. 내가 핸드폰은 뚜뚜하는 신호음까지 시간에 표시되어 나온다고 하니까 한참 우기더니 요금을 조금 깎아 준다. 이곳 여행사와 겟하우스 등과 관련된 곳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은 영어를 대체로 잘한다. 여행객들을 상대로 한 저들은 우리의 참모습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일 년 내내 열심히 일하다 맞이하는 가장 편안하고 느슨한 모습을 저들은 우리의 참모습인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저들은 우리들 마냥 1년 내내 긴장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곳 태국의 젊은 여인들이 처음 만나게 되는 외국의 여행객들과 쉽게 어울리게 되고 때론 흥청거리는 것을 보면서 들락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사람은 때로 고독하고 때론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을 보고 겪으면서 성숙기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정말 아이러니이다. 이곳엔 미쓰비시, 도요타, 이수주 등의 자동차들이 거리를 활주하고 있다. 대부분의 차량들이 일본차 일색이다. 과거 일본인들에게 희생되고 비참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태국인들, 역사는 그저 역사일 뿐인가. 오히려 그것이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 되고 이곳이 유명한 관광지로 알려져 세계인들이 몰려오게 만든 말할 수 없는 혜택을 베푼 은인이 되어버린 셈이다.
저녁엔 애인으로 보이는 잘생긴 영국인 남녀와 이야기를 했다. 보기와 달리 30, 31라고 했다. 좋은 직장에 다녔는데 둘 다 퇴직을 하고 8개월 계획으로 세계여행을 떠나왔다고 한다. 남자는 지표면을 검사하고 건축설계를 내주는 특수 직종, 여자는 장애아동을 가르치는 특수교사, 8개월 후 되돌아가더라도 직업을 구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냥 부럽다. 저 나이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그들은 한국에 대해 남북이 분단된 정도 이상을 잘 모르고 있었다. 한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도약하게 되기까지의 대강을 이야기해 주었다. 영국도 개인소득이 4만불 정도 되지만 상위 10% 정도만 여유가 있고 나머지는 보통이고, 그 나머지 50% 정도는 매우 힘들게 살고 있다고 세상 어느 곳이나 살기는 마찬가지라고, 교육비가 영국도 장난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내가 여행 도중에 결혼하고, 혹 여행 중에라도 아이를 낳으면 되돌아가라고 말해 주니 껄껄 웃었다. 아마 둘이 얼마 전 눈이 맞아 이번 여행을 떠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좋아 한 시도 떨어지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저들이 마지막까지 변치 않고 저렇게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행복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러기를 기원했다.
아침 7시 수상시장으로 간다. 네덜란드인 부부 2명과 함께 자가용 승용차로 찾아간 플로우팅 마켓. 아, 태국에 오면서 늘 마음 속에 제 1번으로 두고 있었던 수상시장을 간다. 방콕에서 기사들은 내게 모두 2,000밧을 요구했었다. 그리고 너무 비싸다며 1,500밧(45,000원 정도)으로 가자고 하면 그러자고 약속까지 하자고 했는데, 결국 하지 못하고 이제야 그곳으로 간다.
다행히 투어는 나와 네덜란드 한 부부, 이렇게 세 사람만이 신청해서 편하게 승용차로 가게 되었다. 네덜란드인 부부는 내가 네덜란드 소년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둑에 구멍이 나 물이 새는 것을 발견하고 물이 더 이상 흐르지 않게 한 밤 내내 팔뚝으로 그 구멍을 막아 한 마을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하니, 야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탄성을 올렸다. 더욱이 우리는 몇 년 전의 히딩크로 네덜란드에 친숙함을 느끼고 있다고 하니 더욱 신기해 했다.
수상 시장에 가는 배를 탔다. 처음엔 이곳 시장이 모두 마치는 시간인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산하고 다니는 배도 없었는데, 차츰 폭이 5미터 정도 되는 미로처럼 여러 갈래로 난 수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정말 희한한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갔다. 시장은 차츰 번화해지고 있었다. 그대로 사진에서 보았던 보습, 아니 그보다 더 번화하고 형형색색의 상품들을 진열해 놓은 수로 옆의 수백 여 곳도 넘는 가게들, 수많은 과일을 가득 실은 노를 젓는 배들, 그리고 아예 장사하는 사람들과 관광객들에게 갖가지 먹거리를 만들고 아침까지 지어서 파는 그야말로 보트피플들이 때로 뱃머리를 부딪히기도 하고 서로 엉기어 밀려나기도 하면서 육지에서와 똑같은 장날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태국 담넛의 수상시장, 여기는 저들의 삶의 모습에다 최근엔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이제 순수 현지인보다 관광객들이 더 많이 찾는 번화가가 되어 버린 듯하다. 참으로 내가 그토록 바랬던 관광코스, 자칫 그냥 늘 머릿속으로 상상 속에 그리고만 있었을 수상시장을 내 여행의 막바지에 찾아볼 수 있었으니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돌아오면서 그들의 수공예품 전시관을 관람했다. 수십 년을 조각해야 가능할 것 같은 나무 조각품들, 코끼리 한 마리 사고 싶었지만 내 이번 여행은 선물이 없다는 처음 약속처럼 나는 아무 것에도 손대지 않았다.
겟하우스에 돌아와 다시 전화를 했다. 퉁명스런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는데 1분도 통화를 안 한 것 같은데 2분이라고 우긴다. 내가 핸드폰은 뚜뚜하는 신호음까지 시간에 표시되어 나온다고 하니까 한참 우기더니 요금을 조금 깎아 준다. 이곳 여행사와 겟하우스 등과 관련된 곳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은 영어를 대체로 잘한다. 여행객들을 상대로 한 저들은 우리의 참모습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일 년 내내 열심히 일하다 맞이하는 가장 편안하고 느슨한 모습을 저들은 우리의 참모습인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저들은 우리들 마냥 1년 내내 긴장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곳 태국의 젊은 여인들이 처음 만나게 되는 외국의 여행객들과 쉽게 어울리게 되고 때론 흥청거리는 것을 보면서 들락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사람은 때로 고독하고 때론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을 보고 겪으면서 성숙기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정말 아이러니이다. 이곳엔 미쓰비시, 도요타, 이수주 등의 자동차들이 거리를 활주하고 있다. 대부분의 차량들이 일본차 일색이다. 과거 일본인들에게 희생되고 비참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태국인들, 역사는 그저 역사일 뿐인가. 오히려 그것이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 되고 이곳이 유명한 관광지로 알려져 세계인들이 몰려오게 만든 말할 수 없는 혜택을 베푼 은인이 되어버린 셈이다.
저녁엔 애인으로 보이는 잘생긴 영국인 남녀와 이야기를 했다. 보기와 달리 30, 31라고 했다. 좋은 직장에 다녔는데 둘 다 퇴직을 하고 8개월 계획으로 세계여행을 떠나왔다고 한다. 남자는 지표면을 검사하고 건축설계를 내주는 특수 직종, 여자는 장애아동을 가르치는 특수교사, 8개월 후 되돌아가더라도 직업을 구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냥 부럽다. 저 나이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그들은 한국에 대해 남북이 분단된 정도 이상을 잘 모르고 있었다. 한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도약하게 되기까지의 대강을 이야기해 주었다. 영국도 개인소득이 4만불 정도 되지만 상위 10% 정도만 여유가 있고 나머지는 보통이고, 그 나머지 50% 정도는 매우 힘들게 살고 있다고 세상 어느 곳이나 살기는 마찬가지라고, 교육비가 영국도 장난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내가 여행 도중에 결혼하고, 혹 여행 중에라도 아이를 낳으면 되돌아가라고 말해 주니 껄껄 웃었다. 아마 둘이 얼마 전 눈이 맞아 이번 여행을 떠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좋아 한 시도 떨어지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저들이 마지막까지 변치 않고 저렇게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행복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러기를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