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태국,캄보디아 배낭여행 18일- 콰이강의 다리로
16. 15일째(1월 21일): 칸차나부리(콰이강의 다리, 남똑 열차)
엊저녁 어떤 서양 연놈들 몇이 워낙 시끄럽게 해대는 통에 잠을 몇 차례 깨었다. 새벽 두시쯤인데 워낙 시끄럽게 해서 그 방으로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고 주의를 시켰다. 누구냐고 서양계집애가 나오더니 ‘네 조용히’ 알아서 자기가 먼저 쉿소리를 낸다. 진작 알아서 할 일이지. 그 이후에도 소리는 조금 적어졌지 신경을 끌 정도는 못되게 계속되었다. 어쩔 것이냐 그냥 자자.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6시부터 준비를 했다. 최소한 남부터미널에서 7시 버스를 타고 깐차나부리로 가야 하니까. 그래야 두 시간 정도 걸려 거기에 도착하고, 곧바로 기차를 타고 콰이강의 다리를 지나고 그 죽음의 철도길이라는 남똑까지 갈 수 있으려나.
예정대로 7시 버스를 탔다. 아홉 시면 칸차나부리에 도착한다. 이제 그까짓 두 시간 버스는 이제 자신 있다. 그런데 이 버스가 완행이다냐 직행이다냐, 틈만 나면 쉬고 손님이 오르내린다.
칸차나부리에 도착하니 택시 기사들이 호객행위를 한다. 서로 자시 택시로 실어다 주겠다고 하는데, 시간이 넉넉지 않고 남똑기차는 놓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택시 하나로 책에서 보아 두었던 비티(B.T)여행사란 곳을 찾고 곧바로 숙소를 정하고 다시 역으로 간다는 생각으로 50밧에 내가 택시에서 내려 여행사 일을 보고 숙소까지 가는 시간에 기다린다는 조건으로 택시를 탔다. 길도 잘 모르는 녀석이 여기저기 헤메다가 여행사에 도착하여 내일 플로우팅마켓에(수상시장)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겟하우스를 잡았다. 120불짜리 싱글인데 깨끗하고 지금까지 전망 중에서 제일 뛰어난 곳이다. 목욕탕만 달리지 않았을 뿐 최고의 조건이다. 앞에 연못이 크게 있고 넓고 확 트인 전망과 마당과 주변에 새장과 다람쥐집, 그리고 나무 등을 잘 길러 놓아 참 마음에 들었다.
두말 할 것 없이 방을 정하고 가방을 던져 놓고 다시 택시 기사에게 역으로 가자고 했다. 역에 막 도착하니 기사가 100밧을 내라고 한다. 오래 기다리고 여기저기 다녔으니 100밧 아니면 안된다고 한다. 무슨 소리냐며 나도 좀 미안하고 해서 80밧으로 결정하고 역에 내리니 아직 시간이 충분하다. 외국인을 위한 열차가 따로 300밧짜리가 배정되어 있다. 그리고 증기 열차인데도 100밧이란다. 표를 끊었다. 실제 안락한 여행을 바라지도 않았고 오랜만에 증기 열차를 타보고 싶었기 때문에 100밧을 주고 증기 열차표를 끊었다. 소풍을 가는 듯 학생 수백 명이 함께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남녀 학생들이 무어라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웃으며 나를 쳐다본다. 내가 태국사람 같이는 안 생겼나보다. 내가 말을 붙이면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그녀석이 내게 책을 보여준다. 한국책이라고... 보니까 ‘늑대의 유혹2’라는 태국어 번역판을 재미나게 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건 우리 딸이 보고 아직도 우리 집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 아닌가. 괜히 한 번 책장을 넘겨 보았다. 정말 한류열풍은 여기까지 밀려 오고 있는 것인가.
아직 아침을 먹지 않아서 근처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기차를 오르니 노랗게 페인트칠을 한 널다란 나무의자가 여기 저기 여유가 있다. 오랜만에 타 보는 완행열차다. 통일호 열차를 타 본 것이 20년은 된 것 같다. 오랜만에 기적소리를 들었다. 콰이강의 다리, 기대가 커서인지 실망이 크다. 별 것도 아닌데 너무나 웅장하고 거대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100여 미터 되는 다리 난간에 기차를 피해 관광객들이 손을 흔든다. 다리를 곧바로 건너니 코끼리 훈련하는 모습이 보이고, 멀리 감자밭 종류로 느껴지는 밭과 수수밭이 계속 펼쳐지고 이쪽 남부에서는 그렇게 보기 쉽지 않은 산들이 기차길 옆으로 끊이지 않는다.
열차에는 소풍을 가는 학생들 말고도 서양 단체 관광객들이 함께 탔다. 서양사람들은 젊은이들이 단체로 온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가끔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단체로 온 경우가 있었다. 젊은이들을 보면 야, 나도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뚱뚱하고 나이 들어 험상궂은 얼굴의 서양인들을 보면 그래도 아직 나는 젊은 나이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나이가 들어간다면 어떻게 변할까, 남들은 나를 어떻게 볼까? 저들 젊은이들에게 혐오감을 주지는 말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 중에 닮고 싶은 사람을 찾아보기도 하였다. 더러 ‘나도 야, 저렇게 늙어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동일시 대상도 눈에 띄었다.
어떻든 차창에 펼쳐지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다시 내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누리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뒤 이어 오는 자식들, 나를 이어가며 살아가야 할 내 자식들에게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잘 인도해 주는 일만 남았다. 우리 세대는 몰라서 또 바빠서 누리지 못했지만 너희들은 행복하게 살아다오. 그 길을 이 부족한 아빠가 힘닿는 데까지 가르쳐 주고 이끌어 주마. 나는 다 이루었다. 나는 다 누리어 보았다.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그리고 이제 내가 무엇인가를 더 바란다면 그것은 욕망이고 탐욕이다. 수도 없이 되뇌이었다.
남똑까지 가는 과정에서 가장 난공사 지대로 보이는 끄라세 다리를 지나고 계곡을 스쳐 지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10여 센티도 안 되는 간격을 두고 기차는 아슬아슬하게 절벽을 지난다. 자칫 손을 잘못 내밀었다가는 부상을 당하기 쉬울 정도로 겨우 기차만 지나도록 철로는 건설되었다. 당시에 이 모든 공정을 사람의 손으로 망치나 쇠덩이를 이용해서 깎아내리고 다리를 놓고 해서 만든 철로라고 하니 공사에 동원된 포로들의 험난했던 모습들이 쉽게 짐작이 되었다.
기차는 연기를 쉼없이 뿜어대고 그 연기가 많은 재와 함께 활짝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와 역무원들이 틈틈이 기차 내부를 비로 쓸어내었다. 남똑에 도착해서 10여 분을 쉬고 나서 오후 1시쯤 다시 기차는 되돌아 왔다. 남똑에서 다른 곳을 방문해 볼까 하는 생각을 접고 곧바로 돌아오는 차표를 끊어 되돌아오면서-사진 두 장을 찍고 다시 되돌아 오고 말았는데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나와 같은 방식으로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여행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았다.-나는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장면에 넋을 잃고 있었다.
끄라세 다리라고 하는 철로 위를 지날 때 기차는 속도를 늦춘다. 위험하기도 하겠거니와 아슬아슬하게 계곡을 지나가는 철도구간을 관광객들이 좀 더 실감나게 관람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 죽음의 철도를 만들기 위해 400킬로가(남똑을 지나 미얀마까지) 넘는 구간을 5년이 걸려야 한다는 공사를 일본군은 연합군 포로들과 이곳 동남아 주민들을 이용해서 15개월만에 완공했다고 한다. 바다로 나가는 길이 막히자 일본인들이 이곳 육로를 통해서 미얀마, 나아가 인도까지 지배하려는 속셈으로 건설된 죽음의 철도. 연합군 포로와 현지인들을 동원해 하루 평균 890미터 정도를 완성했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공사에는 연합군 포로(서양인 대부분)를 포함하여 동원된 숫자는 30만명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짐작해 볼 만하다. 그때 한국인은 대체로 징용되어 간 병사들로 감시를 맡았다고 한다. 한국인에게 죽은 사람도 상당하다고 해서 남의 싸움에 우리나라가 원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하니 그저 억울할 따름이다. 공사 도중 10만명 정도가 죽고-그 중 포로는 13,000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들의 참상은 후에 각국에 알려지면서 JEATH 박물관이 생길 정도로 생생한 증언이 이루어져 그들이 포로로 잡혀 철로 공사를 하면서 처참하게 병들어가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살아가는 모습 등을 전시해두고 세계 만방에 일본의 잔인함을 고발하게 되고 그들 포로들에 대한 위령탑까지 생겼는데, 정작 이 철도 공사에 참여한 인부 대부분이 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인으로 그 사망자가 8만명이나 되고 한국인도 1천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들을 추모하는 이들에 대한 참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듯하고, 나도 한국인이 그렇게 끌려가서 죽었다는 사실조차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을 보면, 이것은 똑같은 죽음이어도 부잣집 개나 머슴이 죽어도 떠들썩하고, 초라한 동네 어느 노인이 죽으면 쓸쓸히 장례식이 치러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까.
돌아와서는 콰이강의 다리 바로 옆의 역에서 내려 제2차 전쟁박물관에 들렀다. 맨 아래층에는 당시의 포로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재연해 놓았고 벽에는 당시의 모습을 찍은 사진과 그 후의 신문기사, 포로들의 증언 등을 묘사한 모습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비록 가상의 모습이지만 섬뜩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인이 사용했던 무기류, 차량, 군수용품과 콰이강에 떨어진 연합군의 포탄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엊저녁 어떤 서양 연놈들 몇이 워낙 시끄럽게 해대는 통에 잠을 몇 차례 깨었다. 새벽 두시쯤인데 워낙 시끄럽게 해서 그 방으로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고 주의를 시켰다. 누구냐고 서양계집애가 나오더니 ‘네 조용히’ 알아서 자기가 먼저 쉿소리를 낸다. 진작 알아서 할 일이지. 그 이후에도 소리는 조금 적어졌지 신경을 끌 정도는 못되게 계속되었다. 어쩔 것이냐 그냥 자자.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6시부터 준비를 했다. 최소한 남부터미널에서 7시 버스를 타고 깐차나부리로 가야 하니까. 그래야 두 시간 정도 걸려 거기에 도착하고, 곧바로 기차를 타고 콰이강의 다리를 지나고 그 죽음의 철도길이라는 남똑까지 갈 수 있으려나.
예정대로 7시 버스를 탔다. 아홉 시면 칸차나부리에 도착한다. 이제 그까짓 두 시간 버스는 이제 자신 있다. 그런데 이 버스가 완행이다냐 직행이다냐, 틈만 나면 쉬고 손님이 오르내린다.
칸차나부리에 도착하니 택시 기사들이 호객행위를 한다. 서로 자시 택시로 실어다 주겠다고 하는데, 시간이 넉넉지 않고 남똑기차는 놓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택시 하나로 책에서 보아 두었던 비티(B.T)여행사란 곳을 찾고 곧바로 숙소를 정하고 다시 역으로 간다는 생각으로 50밧에 내가 택시에서 내려 여행사 일을 보고 숙소까지 가는 시간에 기다린다는 조건으로 택시를 탔다. 길도 잘 모르는 녀석이 여기저기 헤메다가 여행사에 도착하여 내일 플로우팅마켓에(수상시장)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겟하우스를 잡았다. 120불짜리 싱글인데 깨끗하고 지금까지 전망 중에서 제일 뛰어난 곳이다. 목욕탕만 달리지 않았을 뿐 최고의 조건이다. 앞에 연못이 크게 있고 넓고 확 트인 전망과 마당과 주변에 새장과 다람쥐집, 그리고 나무 등을 잘 길러 놓아 참 마음에 들었다.
두말 할 것 없이 방을 정하고 가방을 던져 놓고 다시 택시 기사에게 역으로 가자고 했다. 역에 막 도착하니 기사가 100밧을 내라고 한다. 오래 기다리고 여기저기 다녔으니 100밧 아니면 안된다고 한다. 무슨 소리냐며 나도 좀 미안하고 해서 80밧으로 결정하고 역에 내리니 아직 시간이 충분하다. 외국인을 위한 열차가 따로 300밧짜리가 배정되어 있다. 그리고 증기 열차인데도 100밧이란다. 표를 끊었다. 실제 안락한 여행을 바라지도 않았고 오랜만에 증기 열차를 타보고 싶었기 때문에 100밧을 주고 증기 열차표를 끊었다. 소풍을 가는 듯 학생 수백 명이 함께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남녀 학생들이 무어라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웃으며 나를 쳐다본다. 내가 태국사람 같이는 안 생겼나보다. 내가 말을 붙이면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그녀석이 내게 책을 보여준다. 한국책이라고... 보니까 ‘늑대의 유혹2’라는 태국어 번역판을 재미나게 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건 우리 딸이 보고 아직도 우리 집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 아닌가. 괜히 한 번 책장을 넘겨 보았다. 정말 한류열풍은 여기까지 밀려 오고 있는 것인가.
아직 아침을 먹지 않아서 근처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기차를 오르니 노랗게 페인트칠을 한 널다란 나무의자가 여기 저기 여유가 있다. 오랜만에 타 보는 완행열차다. 통일호 열차를 타 본 것이 20년은 된 것 같다. 오랜만에 기적소리를 들었다. 콰이강의 다리, 기대가 커서인지 실망이 크다. 별 것도 아닌데 너무나 웅장하고 거대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100여 미터 되는 다리 난간에 기차를 피해 관광객들이 손을 흔든다. 다리를 곧바로 건너니 코끼리 훈련하는 모습이 보이고, 멀리 감자밭 종류로 느껴지는 밭과 수수밭이 계속 펼쳐지고 이쪽 남부에서는 그렇게 보기 쉽지 않은 산들이 기차길 옆으로 끊이지 않는다.
열차에는 소풍을 가는 학생들 말고도 서양 단체 관광객들이 함께 탔다. 서양사람들은 젊은이들이 단체로 온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가끔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단체로 온 경우가 있었다. 젊은이들을 보면 야, 나도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뚱뚱하고 나이 들어 험상궂은 얼굴의 서양인들을 보면 그래도 아직 나는 젊은 나이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나이가 들어간다면 어떻게 변할까, 남들은 나를 어떻게 볼까? 저들 젊은이들에게 혐오감을 주지는 말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 중에 닮고 싶은 사람을 찾아보기도 하였다. 더러 ‘나도 야, 저렇게 늙어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동일시 대상도 눈에 띄었다.
어떻든 차창에 펼쳐지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다시 내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누리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뒤 이어 오는 자식들, 나를 이어가며 살아가야 할 내 자식들에게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잘 인도해 주는 일만 남았다. 우리 세대는 몰라서 또 바빠서 누리지 못했지만 너희들은 행복하게 살아다오. 그 길을 이 부족한 아빠가 힘닿는 데까지 가르쳐 주고 이끌어 주마. 나는 다 이루었다. 나는 다 누리어 보았다.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그리고 이제 내가 무엇인가를 더 바란다면 그것은 욕망이고 탐욕이다. 수도 없이 되뇌이었다.
남똑까지 가는 과정에서 가장 난공사 지대로 보이는 끄라세 다리를 지나고 계곡을 스쳐 지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10여 센티도 안 되는 간격을 두고 기차는 아슬아슬하게 절벽을 지난다. 자칫 손을 잘못 내밀었다가는 부상을 당하기 쉬울 정도로 겨우 기차만 지나도록 철로는 건설되었다. 당시에 이 모든 공정을 사람의 손으로 망치나 쇠덩이를 이용해서 깎아내리고 다리를 놓고 해서 만든 철로라고 하니 공사에 동원된 포로들의 험난했던 모습들이 쉽게 짐작이 되었다.
기차는 연기를 쉼없이 뿜어대고 그 연기가 많은 재와 함께 활짝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와 역무원들이 틈틈이 기차 내부를 비로 쓸어내었다. 남똑에 도착해서 10여 분을 쉬고 나서 오후 1시쯤 다시 기차는 되돌아 왔다. 남똑에서 다른 곳을 방문해 볼까 하는 생각을 접고 곧바로 돌아오는 차표를 끊어 되돌아오면서-사진 두 장을 찍고 다시 되돌아 오고 말았는데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나와 같은 방식으로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여행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았다.-나는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장면에 넋을 잃고 있었다.
끄라세 다리라고 하는 철로 위를 지날 때 기차는 속도를 늦춘다. 위험하기도 하겠거니와 아슬아슬하게 계곡을 지나가는 철도구간을 관광객들이 좀 더 실감나게 관람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 죽음의 철도를 만들기 위해 400킬로가(남똑을 지나 미얀마까지) 넘는 구간을 5년이 걸려야 한다는 공사를 일본군은 연합군 포로들과 이곳 동남아 주민들을 이용해서 15개월만에 완공했다고 한다. 바다로 나가는 길이 막히자 일본인들이 이곳 육로를 통해서 미얀마, 나아가 인도까지 지배하려는 속셈으로 건설된 죽음의 철도. 연합군 포로와 현지인들을 동원해 하루 평균 890미터 정도를 완성했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공사에는 연합군 포로(서양인 대부분)를 포함하여 동원된 숫자는 30만명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짐작해 볼 만하다. 그때 한국인은 대체로 징용되어 간 병사들로 감시를 맡았다고 한다. 한국인에게 죽은 사람도 상당하다고 해서 남의 싸움에 우리나라가 원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하니 그저 억울할 따름이다. 공사 도중 10만명 정도가 죽고-그 중 포로는 13,000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들의 참상은 후에 각국에 알려지면서 JEATH 박물관이 생길 정도로 생생한 증언이 이루어져 그들이 포로로 잡혀 철로 공사를 하면서 처참하게 병들어가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살아가는 모습 등을 전시해두고 세계 만방에 일본의 잔인함을 고발하게 되고 그들 포로들에 대한 위령탑까지 생겼는데, 정작 이 철도 공사에 참여한 인부 대부분이 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인으로 그 사망자가 8만명이나 되고 한국인도 1천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들을 추모하는 이들에 대한 참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듯하고, 나도 한국인이 그렇게 끌려가서 죽었다는 사실조차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을 보면, 이것은 똑같은 죽음이어도 부잣집 개나 머슴이 죽어도 떠들썩하고, 초라한 동네 어느 노인이 죽으면 쓸쓸히 장례식이 치러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까.
돌아와서는 콰이강의 다리 바로 옆의 역에서 내려 제2차 전쟁박물관에 들렀다. 맨 아래층에는 당시의 포로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재연해 놓았고 벽에는 당시의 모습을 찍은 사진과 그 후의 신문기사, 포로들의 증언 등을 묘사한 모습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비록 가상의 모습이지만 섬뜩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인이 사용했던 무기류, 차량, 군수용품과 콰이강에 떨어진 연합군의 포탄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